편지
홍해리
절정에 닿기 전 내려올 줄 아는 이
그의 영혼 내 처녀처럼 아름답다고
눈물 찍어 그대에게 연필로 쓴다.
산에 오른다고 바랑을 메고 다니면서도
아래 너른 세상을 어찌 못 보았던가
꽃도 활짝 피면 이미 지고 있어
넋이 나간 빈집인데
나의 마음 한 자락 한 자락마다
고요처럼 그윽한 충만이었던가
한때는 정점이 가장 높고 너른 세상
지고의 삶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절정이란 한 점, 찰나일 뿐
위도 아래도 없고 앞도 뒤도 없다
바람 거세고 모래알 날리는 그곳
그립지 않은 것은 마음이 비어 있기 때문
사랑이란 찰나의 홀림
절정에는 이르지 말고
불타는 성전이나 구경할 일이다.
나의 전부인 너를 사랑한다 자연이여, 우주여
이것이 시에 대한 내 영혼의 고요 문법이라고
그대에게 띄운다.
- 시집 『독종』, 북인, 2012
절정에서 떨어지는 몸은 얼마나 허전한가. 그리움도 들이지 못하는 마음은 또 어떤가. 위아래 앞뒤를 구분할 수 없다. 사랑도 시도 “절정에 닿기 전”의 일이어야 한다. 내 영혼은 그, 기억이 꿈틀거리는 느낌만으로 좋다.
편지를 읽으면서, 살아난 “고요 문법”을 받아 적는다. 오르가슴으로 부를 수는 없는, “그윽한 충만”이 내 생각 도처에 한 번씩 당도하는 저녁이다. 자연스럽게 맞이하려고 한다. 화려한 색깔은 없으나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제라도 당신에게 고백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출처 : 금강하구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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