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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금강하구사람 / 다저녁때 - 치매행致梅行 · 1(홍해리)

洪 海 里 2017. 8. 2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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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녁때

        - 치매행致梅行 · 1

 

                홍해리

 

 

아내가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집을 나섭니다

눈은 내리는데

하얗게 내려 길을 지우는데

지팡이도 없이 밖으로 나갑니다

닫고 걸어 잠그던 문 다 열어 놓고

매듭과 고삐도 다 풀어버리고

바람처럼 강물처럼 구름처럼

텅 빈 들판처럼 혈혈孑孑……,

굽이굽이 한평생

얼마나 거친 길이었던가

눈멀어 살아온 세상

얼마나 곱고 즐거웠던지

귀먹었던 것들 다 들어도

얼마나 황홀하고 아련했던지,

빛나던 기억 한꺼번에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사는

슬픈 꿈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삶이 아득한,

아침에 내린 눈 녹지도 않은

다저녁때

아내가 또 길을 나섭니다.

 

 

         - 시집 치매행 致梅行, 황금마루, 2015

 

 

 

 

  가만히 지켜보다가 뒤를 따라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나서는 길이라지만, 아내는 이제 저녁의 길을 놓고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물을 이유도 없는 숙명의 저녁입니다. 저녁이 오면 아내 눈에는 길 없는 길 하나 보이는 모양입니다. 자꾸 문을 나서면서, 품에 들이고 살아온 이야기들을 하나씩 밖으로 풀어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 거짓말처럼 걸음을 멈추겠지만, 또 저녁이 몸에 들어오면 주섬주섬 기억의 조각들을 챙깁니다. 사람들은 모두 문을 닫고 길도 멈추는데, 인생의 저녁을 풀어놓기만 하는 아내 몸짓이 슬퍼 보입니다. 더구나 홀로 나서는 길이라니. 이렇게 쓰고 보니 더 슬퍼집니다. 아무리 다 저녁이라지만, 아직 아침이 지워지지 않은 저녁이랍니다.

출처 : 금강하구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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