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_DAUM->
다저녁때
- 치매행致梅行 · 1
홍해리
아내가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집을 나섭니다
눈은 내리는데
하얗게 내려 길을 지우는데
지팡이도 없이 밖으로 나갑니다
닫고 걸어 잠그던 문 다 열어 놓고
매듭과 고삐도 다 풀어버리고
바람처럼 강물처럼 구름처럼
텅 빈 들판처럼 혈혈孑孑히……,
굽이굽이 한평생
얼마나 거친 길이었던가
눈멀어 살아온 세상
얼마나 곱고 즐거웠던지
귀먹었던 것들 다 들어도
얼마나 황홀하고 아련했던지,
빛나던 기억 한꺼번에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사는
슬픈 꿈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삶이 아득한,
아침에 내린 눈 녹지도 않은
다저녁때
아내가 또 길을 나섭니다.
- 시집 『치매행 致梅行』, 황금마루, 2015
가만히 지켜보다가 뒤를 따라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나서는 길이라지만, 아내는 이제 저녁의 길을 놓고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물을 이유도 없는 숙명의 저녁입니다. 저녁이 오면 아내 눈에는 길 없는 길 하나 보이는 모양입니다. 자꾸 문을 나서면서, 품에 들이고 살아온 이야기들을 하나씩 밖으로 풀어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 거짓말처럼 걸음을 멈추겠지만, 또 저녁이 몸에 들어오면 주섬주섬 기억의 조각들을 챙깁니다. 사람들은 모두 문을 닫고 길도 멈추는데, 인생의 저녁을 풀어놓기만 하는 아내 몸짓이 슬퍼 보입니다. 더구나 홀로 나서는 길이라니. 이렇게 쓰고 보니 더 슬퍼집니다. 아무리 다 저녁이라지만, 아직 아침이 지워지지 않은 저녁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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