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깎기
- 치매행致梅行 · 5
홍해리
맑고 조용한 겨울날 오후
따스한 양지쪽에 나와 손톱을 깎습니다
슬며시 다가온 아내가 손을 내밉니다
손톱을 깎아 달라는 말은 못하고
그냥 손을 내밀고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겨우내 내 손톱만 열심히 잘라냈지
아내의 손을 들여다본 적이 없습니다
손곱도 없는데 휴지로 닦아내고 내민
가녀린 손가락마다
손톱이 제법 자랐습니다
손톱깎이의 날카로운 양날이 내는 금속성
똑, 똑! 소리와 함께 손톱이 잘려나갑니다
함께 산 지 마흔다섯 해
처음으로,
아내의 손을 잡고 손톱을 잘라 줍니다
파르르 떠는 여린 손가락
씀벅씀벅,
눈시울이 자꾸만 뜨거워집니다.
- 시집 『치매행 致梅行』, 황금마루, 2015
이것저것 궁리하고 만드는 아내를 보면 제법 손재주는 있는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손톱 깎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습니다. 대충 네모반듯하게 자르고 귀퉁이를 다듬다가 쥐 파먹은 모양을 만들기 일쑤입니다. 어느 날 내가 손톱 깎는 걸 기웃거리더니, “반달처럼 예쁘게 깎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 넘어가 꼼짝없이 손톱 깎는 당번이 된 후로 나는 아내 손톱에 예쁜 반달을 띄우려고 돋보기를 씁니다.
손톱을 깎으면서, 손톱 끝에 걸린 시간을 덜어냅니다. 몸과 기억이 기우뚱하며 정신없이 살아온 날들이 툭툭 잘려나갑니다. 잘린 손톱 자리에 손톱이 또 채워집니다.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는 기억 하나 또 돋아납니다. 아내 손을 만지면 모든 일이 다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문득 새로 단장한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이고 싶어집니다. 선명한 색깔로 피었다가 스러지는 날을 함께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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