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 치매행致梅行 · 13
홍해리
안개가 짙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앞이 안 보이니 길이 없습니다
너에게 내가 없고
내게 네가 없습니다
한평생 누구에게나 가지 못한 길이 있고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할 길이 있습니다
쉬운 길도 편한 길도 있었지만
먼 길을 돌아, 이제
자갈길 가시밭길에 들어섰다 생각해도
길은 안개에 갇혀 가물거리고 있습니다
빛이 너무 밝으면 눈이 부셔
앞이 보이지 않듯
안개가 짙으면 길이 보이지 않아
청맹과니 하나 칠흑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 시집 『치매행 致梅行』, 황금마루, 2015
안개가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이런저런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낀 안개랍니다. 곁에 있다는 위로를 알지 못하는 이, 그 사람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이의 눈을 생각합니다. 분명히 앞에 있으나 예전 그 사람이 아니어서 가슴 아픕니다. 예전 그 사람이 아니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더 슬픕니다.
사람을 가까이 두고 더듬어도 붙잡지 못하는 안개라니요. 유리창에 성에가 낀 것처럼 당신은 생각 너머 창밖에 서 있습니다. 다가가 손으로 문질러도 금방 흐릿해지는 얼굴입니다. 그곳에서 허둥거리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중심을 잃고 맙니다. 어쩌다 한 번 당신이 맑아지는 날이 와도 우리 생각이 함께 앉았던 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출처 : 금강하구사람
글쓴이 : 금강하구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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