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청별淸別』(1989)

[스크랩] 시간과 죽음 / 홍해리

洪 海 里 2018. 4. 3. 16:15

 

 

 

 

시간과 죽음 / 홍해리


철커덕, 시간과 죽음의 문이 닫히고
빛도 소리도 완전히 차단되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어딘가로 한없이 떨어져 내렸다
걱정의 눈빛들이 잠시 마주치다 돌아선 후
드디어 이승의 경계를 넘어서 굴러갔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다음 하나 두울 세엣 그리고 그만이었다
끓던 번민과 격정도 한 줌 바람일 뿐
저문 강에 떠가는 낙엽이었다 나의 목숨은.

텅 비어 버린 가슴으로 낯선 암흑이 파고들었다
온몸이 묶이고 옥죄어지고
깊은 산 나무들이 마구 베어져 쓰러졌다
나는 자동세탁기 속의 빨랫감이었다
한 치 뒤를 못 보는 장님들이 줄지어 가고 있었다
홀로! 홀로! 하며 어우러짐을 갈구하면서
막막한 들판에 서서 암흑 속에 눈을 던졌다
다시 못 만날 세상을 죽여야 했다 나는.

무엇이 왜 그렇게 서러운지 속으로 속으로 나는 울었다
한 사람의 생애가 바람소리만 내며 흔들리고
이제 눈물 위에 둥둥 뜨는 어둔 바다 잔물결
손에 잡히는 백지마다 크레파스를 마구 문질러댔다
사랑도 추억도 연민도 희망도 그리고 모두를
아무 색깔도 나타나지 않을 때까지
그러고 나서 그 어둡고 기인 터널을 지나
거지중천에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서울의 하늘이 저리 푸르른지 나는 아지 못했다
저 어두운 콘크리트숲도 바퀴벌레의 음흉함도 유쾌하다
다시 보는 모습들과 손길의 살가움이여
이제 나도 스스로 바다를 이루어 저 해를 품고
살아 있는 것들을 사랑해야 하리라
도시의 지평선으로 떨어지는 하루의 빨간 심장을 본다
이 밤은 가고 날을 밝으리라
나도 한 그루 나무로 서서 숲을 지키리라.

 

- 홍해리 시집『淸別』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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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시집 『淸別』1989, 서문

 

- 영혼의 울림을 위하여


  집을 떠나 배를 타고 망망한 바다 그리운 섬으로 떠돌 때면 

나의 시는 확성기를 통해 해면에 깔리는 유행가 한 가락만도 

못하다. 그림 앞에서나 우리의 춤사위를 볼 때도 나의 시는 

맥을 못 춘다. 하물며 자연 앞에서야 그냥 무력해지고 막막할 

뿐이다.

  한 편의 시는 내 영혼의 기록, 그 살로 빚은 한 잔의 독주여야 

하고, 달빛을 교교히 엮어 현현묘묘 울리는 피리 소리 -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 

나의 시는 인수봉의 단단한 바위벽에 뿌릴 박고 천년을 사는
작은 소나무를 싸고 도는 바람소리, 어느 해 남해의 갑도 

절벽 위에서 보았던 정월 초여드렛날의 맑고 푸르른 바닷빛, 

초저녁부터 새벽녘까지 우이동 골짜기를 흔들며 피를 찍는 

소쩍새 울음소리, 예송리 바닷가에서 흰 파도에 온몸을 맡기고 

우는 환상의 흑진주 같은 깜돌, 갑자기 확 달려드는 바다 --- 

그 검푸른 파도와 이랑마다 튕겨오르는 아침 햇살의 

신선한 감동이고 싶다.

  여기 모은 89편의 작품은 재작년에 낸 일곱 번째 시집 

『대추꽃 초록빛』에 이어진 것들로 발표된 것들만 모은 

것이다. 

제1부의 시편들은 겨울마다 섬으로 바다로 떠돌면서 얻은 

것들이고, 제2부의 작품은 주로 꽃과 인사에 관한 것들을 

모았고, 제3부는 서울에서 가장 좋은 동네 우이동의 

일지를 기록한 작품이다.

  80년대를 마무리하는 '89년에 89편의 작품으로 40대를 

마감하는 마흔 아홉의 고개에서 묶는 이 시집을 계기로, 

시를 쓰는 일이 내 육신의 작업과 따로 놀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다. 

그리하여 내 영혼의 울림을 짧고 단단하고 아름답게 

그려 보고 싶다.

                                   1989년 가을 洗蘭軒에서
                                             洪海里 적음.

 

 

출처 : 淸韻詩堂, 시를 찾아서
글쓴이 : 동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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