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로베르트 발저(배수아 역), 『산책자』, 한겨레출판, 2017./이동훈(시인)

洪 海 里 2018. 6. 26. 10:47

   로베르트 발저(배수아 역), 『산책자』, 한겨레출판, 2017./ 이동훈(시인)


   소설 같기도 하고 수필 같기도 하다. 소설이라면 자전적 요소가 많아서, 수필이라면 스토리 구조를 갖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느낌을 주나 보다. 
크리스마스 아침, 산책 길에 눈밭에서 쓰러졌다는 작가 소개 글을 보며, ‘크리마스 이야기’ 편을 다시 본다. 과묵하고 직설적이기도 한 독신자 교수를 ‘나’가 방문한 이야기다. “제가 방해가 된 것 같군요”라는 인사말에 “그야 당연하죠”라는 말을 듣는다. 이유 없이 찾았다는 말에 어쨌든 찾아와줘서 기쁘다는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어색하고도 “의미심장한 침묵”에 빠져든다. 이 상황이 퍽 진지하고 또 웃기기도 해서 별다른 사건도 없는데도 묘한 긴장과 재미가 있다. 마지막 작별 장면도 시작과 전혀 다르지 않다. 
  “당신의 소중한 방문은 참으로 좋은 기분전환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당신과의 대화는 무척 특색 있어서 아주 정신을 빼앗길 정도였습니
다. 덕분에 기분도 무척 좋아졌어요. 무엇보다도 나를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떠나주겠다는 결단이 마침내 당신 안에서 무르익었다는 사실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내가 마침내 돌아가겠다고 해서 당신이 얼마나 해방감을 느끼실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한참 전에 그랬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고, 그 말도 꼭 하고 싶군요.”
  두 사람은 웃으며 헤어졌지만, 농담과 불편 사이의 경계가 아슬아슬하다. “이런 식으로 나는 인간으로부터 멀어졌다. 그 일은 내가 반쯤은 즉흥적으로 반쯤은 장난처럼 내본 용기였다”고 했으니 이 모험이 결실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이어서, 크리스마스 즈음의 풍성한 풍경을 떠올리던 ‘나’는 “이제 나의 즐거운 기분은 모두 지나가버리고 그 자리에서 고통이 마법처럼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마음속 깊은 곳의 진짜 얼굴이다”라고 말한다. 
  중편 분량의 ‘산책’에도 작가의 또 다른 진짜 얼굴 그리고 개성적인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책방과 은행과 초대받은 집에도 들리지만 일없이 길에 있는 것을 즐긴다. 길을 다니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건 자동차다. 아이 생명을 위협하는 자동차에 분노를 표시하며, “이 아름다운 지상을 구성하는 모든 피조물과 사물들을 그냥 휙 지나쳐버리고, 미치광이마냥 질주하면서 비참한 절망에서 달아나기도 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앞으로만 내달리는 일에서 재미를 느끼는 심리를, 나는 절대 납득할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영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 납득하지 못할 일이 너무나 당연하게 행해지는 지금의 현실을 어찌 볼지 모르겠다. 
  매일 산책이나 다니는 걸 지적하며 세금을 더 매기려는 공무원에게 ‘나’는 산책이 얼마나 생산적인 일인가를 역설하는데 산책 예찬론자들의 교본으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좀 길게 인용해 두고 나중에 다시 읽어볼까 한다. 
  “멋진 산책 길에는 형상, 살아 있는 시, 마법, 그리고 온갖 아름다운 자연물들이, 비록 작은 존재들이라고 해도 꿈틀거리며 차고 넘치는 것이 보통이죠. 주의 깊은 산책자의 온몸에서는 눈부신 감각이 열리며 찬란하고 고귀한 생각이 떠오르니, 침울하게 움츠러들고 푹 꺾인 채로 있지 말고 눈을 활짝 열고 응시하기만 하면 그는 오감으로 이것을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헌신과 성실은 그에게 축복이며 그를 높이 들어 올려서, 매일 빈둥대고 돌아다니는 쓸모없는 놈팡이라고 평이 나 있는 그러 그런 산책자 이상의 존재로 상승시킵니다. 다양하고 꼼꼼한 관찰과 연구는 그를 풍요롭게 하고 즐겁게 하고 달래주고 고상하게 만들며, 비록 좀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는 있겠지만 그러다 간혹 무책임한 무위도식자로 보이는 그와 같은 사람에게서 누구도 기대하기 힘든, 정밀한 과학의 가장자리에 견고하게 가 닿기도 합니다. 나는 머릿속으로 항상 치열하고 끈질기게 작업하고 있으며, 심지어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생각 없이 푸른 하늘 아래 초록 들판에서 넋을 놓은 채 게으르게 몽상에 잠겨, 나태하게 최악의 인상을 주는 밥벌레이자 무책임한 껄렁이로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대개 감각을 최고로 작동시키며 일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간략하게 말하자면, 생각과 궁리와 골똘함과 몰입, 숙고, 시, 조사, 연구 그리고 산책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직하게 하루하루의 빵을 법니다. 설사 즐거워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경우라 해도 나는 진지하고 경건하기 그지없으며, 흐늘흐늘 웃으면서 몽롱한 상태처럼 보일지라도 나는 건실한 전문가란 말입니다!”
  크리스마스 방문 때 못했던 말이 산책에서 쏟아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책을 읽는 것도 산책이라는 말을 듣고 공감하지만, 홍해리 시인은 거꾸로 산책이 “살아 있는 책”이란 말을 남겼으니 여기에 옮겨 놓는다.


산책은 산 책이다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책이다
발이 읽고
눈으로 듣고
귀로 봐도 책하지 않는 책
책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도
산책을 하며 산 책을 펼친다
느릿느릿,
사색으로 가는 깊은 길을 따라
자연경自然經을 읽는다
한 발 한 발.
-홍해리, 「산책」전문 (『독종』,북인,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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