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및 영상詩

[스크랩] 홍해리 시집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2)

洪 海 里 2018. 11. 28. 04:08


눈물 부자

   -치매행致梅行 · 239

 

내 몸이 물이었구나

내 눈이 샘이었구나

 

나이 들면 눈물이 흔해진다더니

보는 것 듣는 것마다 날 울리네

 

딸을 시집보내면서 울고

친구가 먼저 떠나가 울고

 

울지 말자, 울지 말자!” 하면서도

말없이 누워 있는 사람 보며 또 우네!

 


 

 

세탁하면서

   -치매행致梅行 · 243

 

어제는 세탁기를 세 번 돌리고

오늘은 다섯 번을 틀었습니다

 

빨랫감 무게에 허리가 휜 빨랫줄이 휘휘거리고

빨랫말미에 마르지 못한 빨래들 빈티가 납니다

 

그리도 내게 때가 많이 끼었나 봅니다

이제 날 세탁기에 넣어야 하겠습니다

 

아니, 빨랫돌 위에 놓고

빨랫방망이로 자근자근 내리쳐야 되겠습니다

 

아내가 병들고 나서 배운 세탁하는 일

돈 세탁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치매행致梅行 · 249

 

세월을 버리면서

 

채워가는

 

헛재산.

 

쌓고

 

 

쌓아올려도

 

무너지고 마는 탑.

 


 

 

늦늦가을

    -치매행致梅行 · 251

 

상강 지나

물 마른 옹달샘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사슴의 눈빛 같은

마음 하나

 

허공에 띄우고

홀로 가는 길

 

팍팍하고

막막한.

 


 

 

동짓달

    -치매행致梅行 · 253

 

풀벌레 노랫소리 어느새 잦아들고,

 

빈 들녘 돌아가는

발길마저 가볍구나.

 

참나무

우둠지마다

겨우살이 퍼렇고,

 

우리 삶의 흔적이 끈끈한

지금 여기 아니라

머잖아 가야 할 그곳에 있을까

영원이란 것?

 


 

 

쬐그마한 사랑

    -치매행致梅行 · 256

 

애기똥풀이 향기롭게 웃고 있다

먹고 싸고, 먹고 자는,

 

스스로 슬픔을 키우는 것이

또는 기쁨이 되어 주려는 것이

차라리 지천이어서 환한 것일까

 

천년 하늘 아래 한 번 짓는 집인데

지구를 들어 올리는 쬐그마한 사랑

자글자글, 무량한 봄빛

 

환하다, 꽃천지

아내여, 우리 세상도 그러하기를!

 


 

 

한여름날의 꿈

    -치매행致梅行 · 258

 

풋고추 날된장에 막걸리 한잔

원두막 소나기에 낮잠 한나절

 

아야라 한잔에 곯아떨어지니

이런 호사 또 어디 있으랴

 

조까지로 취했다 욕하지 마라

까짓 참외 수박 따가거나 말거나

 

아내여, 단 하루, 하루만이라도

양귀비 양귀비꽃처럼 피어나 보면

 

붉게 붉게나 피어나 보면,

오감하겠네 참말로 오감하겠네.

 


 

 

이제 그만

   -치매행致梅行 · 267

 

주변에서, 이제 그만,

아내를 요양시설에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어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것만도 고마운 일

곁에 있어 주는 것도 감사한 일

 

이제껏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빈손으로 떠나보낼 수는 없습니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견뎌내고

가는 데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미안합니다!”

 

 

         * 홍해리 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우리시인선 050, 2018)에서

                                           * 사진 : 석송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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