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물 부자
-치매행致梅行 · 239
내 몸이 물이었구나
내 눈이 샘이었구나
나이 들면 눈물이 흔해진다더니
보는 것 듣는 것마다 날 울리네
딸을 시집보내면서 울고
친구가 먼저 떠나가 울고
“울지 말자, 울지 말자!” 하면서도
말없이 누워 있는 사람 보며 또 우네!
♧ 세탁하면서
-치매행致梅行 · 243
어제는 세탁기를 세 번 돌리고
오늘은 다섯 번을 틀었습니다
빨랫감 무게에 허리가 휜 빨랫줄이 휘휘거리고
빨랫말미에 마르지 못한 빨래들 빈티가 납니다
그리도 내게 때가 많이 끼었나 봅니다
이제 날 세탁기에 넣어야 하겠습니다
아니, 빨랫돌 위에 놓고
빨랫방망이로 자근자근 내리쳐야 되겠습니다
아내가 병들고 나서 배운 세탁하는 일
돈 세탁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몸
-치매행致梅行 · 249
세월을 버리면서
채워가는
헛재산.
쌓고
또
쌓아올려도
무너지고 마는 탑.
♧ 늦늦가을
-치매행致梅行 · 251
상강 지나
물 마른 옹달샘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사슴의 눈빛 같은
마음 하나
허공에 띄우고
홀로 가는 길
팍팍하고
막막한.
♧ 동짓달
-치매행致梅行 · 253
풀벌레 노랫소리 어느새 잦아들고,
빈 들녘 돌아가는
발길마저 가볍구나.
참나무
우둠지마다
겨우살이 퍼렇고,
우리 삶의 흔적이 끈끈한
지금 여기 아니라
머잖아 가야 할 그곳에 있을까
영원이란 것?
♧ 쬐그마한 사랑
-치매행致梅行 · 256
애기똥풀이 향기롭게 웃고 있다
먹고 싸고, 먹고 자는,
스스로 슬픔을 키우는 것이
또는 기쁨이 되어 주려는 것이
차라리 지천이어서 환한 것일까
천년 하늘 아래 한 번 짓는 집인데
지구를 들어 올리는 쬐그마한 사랑
자글자글, 무량한 봄빛
환하다, 꽃천지
아내여, 우리 세상도 그러하기를!
♧ 한여름날의 꿈
-치매행致梅行 · 258
풋고추 날된장에 막걸리 한잔
원두막 소나기에 낮잠 한나절
아야라 한잔에 곯아떨어지니
이런 호사 또 어디 있으랴
조까지로 취했다 욕하지 마라
까짓 참외 수박 따가거나 말거나
아내여, 단 하루, 하루만이라도
양귀비 양귀비꽃처럼 피어나 보면
붉게 붉게나 피어나 보면, 나
오감하겠네 참말로 오감하겠네.
♧ 이제 그만
-치매행致梅行 · 267
주변에서, 이제 그만,
아내를 요양시설에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어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것만도 고마운 일
곁에 있어 주는 것도 감사한 일
이제껏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빈손으로 떠나보낼 수는 없습니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견뎌내고
가는 데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미안합니다!”
* 홍해리 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우리詩시인선 050, 2018)에서
* 사진 : 석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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