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홍해리洪海里(1942~, 충북 청주) / 이동훈(시인)

洪 海 里 2019. 9. 7. 07:00

홍해리洪海里(1941-, 충북 청원)

 

다음은 <난정기蘭丁記>란 제목의 임보 시인의 글이다.

 

세이천洗耳泉 오르는 솔밭 고개

바다만큼 바다만큼 난초蘭草밭 피워 놓고

한란寒蘭, 춘란, 소심素心, 보세報歲

흐르는 가지마다 그넷줄 얽어

구름을 박차고 하늘을 날다

빈 가슴에 시가 익으면

열 서넛 동자놈 오줌을 싸듯

세상에다 버럭버럭 시를 갈긴다.

 

  졸시집『은수달 사냥』(1988)에 수록되어 있는 「난초 書房 海里」라는 글인데 난정에 대한 인상을 8행의 짧은 시 속에 담아 본 것이다. 그가 난에 심취한 것은 세상에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한때는 남도의 산하를 매 주말 누비며 채취해 온 기천 분의 춘란을 기르기 위해 자신의 집보다 넓은 온실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蘭丁’이라고 칭호한 것이다. 그러니 난정이 난을 즐긴다는 것은 특별한 정보랄 것도 없다. 이 글의 핵심은 마지막 두 행에 있다.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시원하게 오줌을 갈기듯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시를 쏟아내는 그의 열정을 찬미한 것이다. 그의 시는 늘 활기에 차 있다. 나이가 들어도 젊음을 잃지 않고 싱싱하다.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홍해리「봄, 벼락치다」전문

 

  난정의 시집『봄, 벼락치다』(2006)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봄의 경이를 낭떠러지와 벼락이라는 역설적인 두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계절적인 급격한 변이를 ‘천길 낭떠러지’로, 봄이 화자의 심리에 던지는 충격을 ‘벼락’으로 보았으리라. 그러나 그 벼락은 화자를 혼절케 하는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을 환하게 밝히는 광명[昭昭明明]이다. 두 이미지를 작품의 전후에 배치하여 사진의 액자처럼 감싸고 있는 구조도 흥미롭다.

  속도감 있게 번지고 있는 북한산 자락의 진달래꽃들을 타오르는 불, 유격대(파르티잔)의 격전, 창궐하는 역병 등 역동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싱그럽게 잎을 피우는 나무는 푸른 불꽃으로 몸을 태우는 소신공양인가? 바위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도 향불 같다. 한겨울 감추었던 종아리 드러내고 거리로 나온 여성들 다 춘향이처럼 곱다. 벌이며 나비 같은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몸치장하고 짝을 찾는구나. 이 밝은 봄날 그냥 보내지 말라고, 내 속에서도 나를 일깨우는 소리 은은하다.

  제4연은 좀 난해한 면이 없지 않지만 내 나름대로 더듬어 읽어 보면 이런 뜻이 아닌가 짐작된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은 일체가 한 집안 식구와 같다. 그러므로 서로 분별할 일이 아닌데 새의 날개나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처럼 내 마음속에도 잔잔한 파동이 일어난다. 속된 욕망을 잘라내고자 하나 뜻대로 잘 되지 않는 이 고뇌, 이 봄에도 북한산의 봄과 더불어 내가 앓는다. ‘화병’의 ‘화’는 火와 花의 중의重義를 지닌 시어로 보아 무방하리라.

  이처럼 난정의 시는 활력이 넘쳐난다.

  이 글을 쓰면서 살펴보건대 난정과 나는 여러 모로 상반된 취향과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난정이 살아 있는 난을 좋아하고 있을 때 나는 생명이 없는 돌[水石]에 빠져 있었다. 그는 천성이 부지런해서 많은 생명들을 보살필 수 있었던 반면, 나는 게을러서 처음부터 부담 없는 돌에 기울었던 것 같다. 그는 열정적인 낭만파라면 나는 이지적인 고전파에 가깝다. 그는 내가 못 가진 적극성과 과단성 그리고 카리스마를 지녔다. 아마도 그가 지닌 이러한 성품이 <우이동시인들>에 이어 <우리시회>를 수십 년 동안 이끌어 왔으리라.

  나와 난정이 북한산 밑자락 우이동 골짝(행정구역상 난정은 우이동 나는 쌍문동이지만 지호지간의 거리다.)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1970년도 후반 무렵이다. 그런데 우리가 교류를 하게 된 것은 1986년부터이니 이웃에 살면서도 서로 모르고 지낸 것이 10년도 더 넘은 것 같다.

  내 맏딸인 우원진이 성신여중 2학년 때 그 학교의 영어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난정을 좋아해서 내 처녀시집 『임보의 시들 <59-74>』를 보낸 바 있다. 이로 하여 우원진의 애비가 임보라는 사실을 난정이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때가 아마 1978쯤으로 기억된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를 계기로 통성명이라도 하고 지냈을 법도 한데 두 사람 다 사귀는 일에 서툴고 또한 얼굴 내밀기 좋아하지 않아서 만나지 못했던 것 같다.

  1986년 가을쯤인가, 우이동 인근에 사는 몇 시인들이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는데 난정을 처음 보게 된 것이 그때로 생각된다. 이를 계기로 홍해리 채희문 신갑선 이생진 등이 자주 만나서 술을 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의기투합하여 사화집을 만들어 보자는 데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우이동 시인들’이라는 동인이 탄생(1986년)하게 되고 이듬해인 1987년 봄에 사화집 창간호가 간행되었다. 그러면서 동인지 출간 기념으로 시낭송을 덕성여대 입구에 자리한 <파인웨이>이라는 카페에서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이동시낭송회의 효시가 된다.

 

  우이동 시인들의 사화집은 매년 2회씩 봄가을에 간행하였다. 1999년 ‘우이시회’에 통합되기까지 총 25집을 만들어 냈다. 신갑선 시인은 제6집까지만 참여하고 떠났기 때문에 제7집부터서는 동인들이 네 사람이었다. 우리는 한 동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주말은 물론 주중에도 틈만 나면 만났다. 꽃이 피면 꽃 핑계로 단풍이 들면 단풍 핑계로, 세이천에서 혹은 소귀천에서, 솔밭에서 혹은 진달래 능선에서 술병을 지고 돌아다녔다. 그것도 성이 차지 않아서 우이동 한 건물의 옥탑을 빌어 사랑방 ‘시수헌詩壽軒’을 만들어 놓고 북을 울리기도 하고, 삼각산 자락에 수십 그루의 복숭아나무로 ‘우이도원牛耳桃源’을 일궈 놓고 흥청거리며 지냈다. 꽃이 한창 피어나는 봄철엔 시화제詩花祭를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에는 단풍시제丹楓詩祭를 천지신명께 올리며 시와 풍악의 잔치를 벌이는 곳도 바로 이 우이도원이다.

  우리 네 사람은 매 사화집에 합작시를 만들어 실었다. 하나의 시제를 놓고 한 사람이 첫 연을 시작하면 그것을 보고 다음 사람이 둘째 연을 쓰고 또 다음 사람이 이어받아 쓰는 공동작의 형식이다. 다음의 글은 제24집 『아름다운 동행』에 수록된 합작시 「우이동 시인들」이란 제목의 상호 인물평이다. 채희문, 홍해리, 임보, 이생진 순으로 썼다.

 

홍해리는 애란가愛蘭歌를 부르며 불도저를 모는 ‘난정법사蘭丁法師

임보는 구름 위에 앉아 마술부채로 시를 빚는‘시도사詩道士

이생진은 섬을 돌며 시를 섬으로 캐는 ‘시심마니’

채희문은 버스 끊어진 정거장의 썰렁한 ‘에뜨랑제’

 

임보 시인은 일경구화一莖九華다, 백운대 청상한 바람으로 향을 날리는.

이생진 시인은 제주한란濟州寒蘭이다, 성산포 청정한 석간수로 꽃을 올리는.

채희문 시인은 중국보세中國報歲다, 인수봉 삽상한 침묵으로 꽃을 피우는.

홍해리는 춘란소심春蘭素心이다, 우이동 옥진의 소주로 향을 씻고 있는.

 

고불古佛 이생진李生珍은 성산포城山浦 물소

포우抱牛 채희문은 포천抱川의 황소

난정蘭丁 홍해리洪海里는 청원淸原의 들소

나 임보林步는 화산華山의 하찮은 염소

 

‘산다는 것은 기다리는 거’ 누가 올 것 같아 문을 닫지 못하는 희문喜門

‘애란愛蘭은 혼의 전령’ 시의 생리生理, 시의 열양熱襄, 시의 정자亭子, 시의 해리海里

‘시인은 북이다. 쓰고 싶은 놈 다 써라’ 소리치며 숲 속으로 걸어가는 임보林步

‘갈매기와 나는 한배에서 태어났으니까’ 끼룩끼룩 바다로 떠나는 생진生珍

 

  서로를 공히 부추기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보이고 있다. 나는 내가 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더 줄여 「네 마리의 소」라는 제목으로 사단시집 『운주천불』(2000)에 실었다.

 

고불古佛 이생진李生珍은 물소

포우抱牛 채희문蔡熙汶은 황소

난정蘭丁 홍해리洪海里는 들소

나 임보林步는 조그만 염소

 

'우이동시인들’ 네 사람을 우직한 소에 비유해서 읊은 것인데 이 작품의 말미엔 다음과 같은 짧은 해설이 달려 있다.

 

*우이동 사인방四人幇의 인물시다. 고불은 섬에 미처 늘 물을 떠나지 못한 것이 마치 물소와 같다. 포우는 이중섭의 그림 속에 나온 황소처럼 강렬해 보이지만 사실 양순하고, 난정은 난과 매화를 즐기는 선비지만 들소와 같은 정력이 없지 않다. 나 임보는 굳이 소라고 친다면 보잘것없는 염소라고나 할까. 이분들의 아호는 내가 붙인 것이다.

 

네 사람의 세상물정 모르는 삶은 「시수헌詩壽軒」이라는 내 한시에 아래와 같이 읊어진다.

 

詩茶酒鼓 佛牛蘭華* 不聽騷音 不問世情 牛耳好日 勝於仙境

(시에, 차에, 술에, 북에/ 시수헌의 네 사람/

세상 소리에 귀 닫고/ 세상 물정에 입 다문/

소귀골의 좋은 나날/ 신선 세상 뺨칠레라!)

 

* 佛은 古佛 이생진, 牛는 抱牛 채희문, 蘭은 蘭丁 홍해리, 華는 華山 임보인데 이를 붙이면 佛牛와 蘭華가 되는 것이 흥미롭다.

 

  시화집을 간행하고, 사랑방 시수헌을 만들고, 우이도원을 일구며 시제를 올리는 등 이러한 일을 꾸미고 주도한 사람이 난정이다. 그에겐 들소처럼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있다.

  또한 그의 성미는 곧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초심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킨다. 그가 한번 좋아한 사람은 평생 변함없이 좋아하고 그의 눈에 한번 거슬린 사람은 회복하기 힘들다. 결벽증에 가까운 그의 이런 성미는 글을 쓰는 데도 작용한다. 그는 산문을 쓰려 하지 않는다. 시인이 시를 쓰지 않고 산문에 기웃거리는 것은 순수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세란헌洗蘭軒」이라 제한 난정의 작품을 보도록 하자.

 

하늘이 씻은 너를 내 다시 씻노니

내 몸에 끼는 덧없는 세월의 티끌

부질없이 헛되고 헛된 일이 어리석구나

동향마루 바람이 언뜻 눈썹에 차다.

 

  그는 이 글의 말미에 ‘우이동에서 난을 기르고 있는 달팽이집만한 마루’라고 주를 달았다. <세란헌>은 난정의 당호다. 난은 원래 정결한 식물이다. 그런데도 만족치 못하고 그 난을 더 정결히 하려고 씻는 집이란 뜻이다. 이 작품에서의 난은 난정 자신의 상징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염결 지향의 그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난정은 담배를 아주 싫어한다. 그 주변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간 핀잔을 듣기 마련이다. 많은 애연가들을 금연토록 만든 금연전도사다. 평교사인 그가 학교의 교무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장실의 재떨이까지 추방한 일화는 유명하다. 잡기雜技도 그는 싫어한다. 화투는 말할 것도 없고 바둑 장기 당구 같은 오락을 일절 가까이 하지 않는다.

  문학단체에서 거들먹거리는 소위 문단정치인이라든지, 조잡한 문예지를 만들어 수준미달의 신인들을 양산하는 문단 장사치들을 그는 혐오한다. 감투나 수상을 넘보지 않으며 아첨과 아부를 싫어한다. 다만 그가 좋아하는 것이 시 이외에 하나 더 있다. 술이다. 아마도 마음에 맞는 사람들의 술자리면 종일 마셔도 사양치 않으리라. 수년 전 난정과 나는 거금도 앞 바다에 배를 띄워 놓고 종일 마셔대며 주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독일의 시인

귄터 아이히(Guenter Eich, 1907~1952)는 자랑했다

 

사론스키에 내 시를 읽는 독자가 한 사람

바트나우하임에도 또 한 사람 있음을 안다

그러면 벌써 두 명 아닌가!

 

춘추시대의 악인樂人 백아伯牙

그의 소리를 아는 유일한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세상을 떠나자

거문고 줄을 끊었다

 

귄터는 둘

백아는 하나

오늘 내 소리를 듣는 이는 몇인가?

내가 알기로는 아직

하나도 없다

 

  졸시 「지음知音」이다. 한평생 자신을 알아 줄 지기를 얻기가 힘들다. 나는 하나도 없다고 한탄했는데, 그래도 혹 내 소리를 들어 줄 ‘지음知音’이 한 사람쯤 내 가까이에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있다. 우이동 사인방 가운데서 고불古佛은 방학동으로 포우抱牛는 의정부로 편리한 아파트를 찾아 일찌감치 떠나갔다. 그런데 나는 우이동 골짝을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버티고 있다. 난정이 아직도 세란헌에 머물며 내 소리를 들어 주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두 집의 내외는 매년 4월 25일 전후쯤 자리를 함께 해 서로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며 또한 자축하는 자리를 갖는다. 나의 기념일을 24일, 난정은 26일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홍해리 시인의 <시의 길, 시인의 길>이란 자서이다.

 

  나는 1941년 충북 청원군 남이면 척산리 472번지에서 태어났다.

  당시 남이면사무소에 근무하던 아버지가 이듬해 호적에 올렸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1942년 생으로 되어 있다. 그때는 태어나서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사는 것을 봐 가면서 호적에 올렸던 것이다. 내 명이 길었는지 다음해까지 살아남아서 문서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내 아래로 사내아이가 세 명 태어났고, 이어서 네 명의 딸이 줄을 이었다. 해서 나는 8남매의 소대장으로 이제껏 세상을 살아오고 있다. 아버지가 남이면에 근무해서 그리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40년대와 50년대가 그리 만만했겠는가? 모두들 보릿고개 아래서 허덕이며 땀을 흘려야만 했다.

  나는 식물성 시인이다. 그 힘든 시절 먹는 것이 모두 식물성이었으니 어찌 내가 식물성 시인이 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초등학교 시절 집에서 학교까지 신작로로 또는 산길로 다니면서 길가 밭에 들어가 따 먹은 목화 다래가 얼마이고 찔레순의 튼실한 줄기를 꺾어 껍질을 까고 대궁을 먹은 것이 얼마인지 모른다. 양지바른 곳에 솟아 있는 삘기, 보리밥나무 열매, 오디, 버찌, 서리 내린 다음에 고욤나무에 올라가 따먹은 고욤열매는 얼마나 달았던가. 소나무 새순을 꺾어 연한 송기를 벗겨 먹기도 하고 진달래꽃을 한 움큼씩 따먹은 것이나 아카시꽃을 훑어서 한 입씩 우물거린 적은 몇 번이었던가.

  그것이 모두 요즘의 참살이 보약이었다. 이렇듯 꽃과 열매까지 먹고 자랐으니 내 몸속에는 풀이 자라고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내게서 나오는 글이 식물성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꽃을 주제로 쓴 시작품만 해도 200편이 넘는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는 증조부모와 함께 삼대가 한 집에서 살다가 증조부가 돌아가시자 조부모와 합쳐 다시 삼대가 같이 살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고향 남이 척산을 떠나 청주로 이사를 와서 중고교를 다녔다. 그래서 청주시 모충동 405번지는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돌아가 세광고와 청주상고에서 9년 동안 근무하다 직장을 서울로 옮기기 전까지 내가 15년을 산 곳이다.

  나는 대학에서 김종길 교수에게 19세기 영미시, 20세기 영미시와 T. S. 엘리엇을 배우면서 시의 맛을 알았다. 어려서 한학을 한 안동 선비의 꼬장꼬장한 김종길(김치규 교수) 시인은 올해 86세인데 그때는 30대 후반의 청청한 학자요 시인이었다. 한편 국문과 교수였던 조지훈(조동탁 교수) 시인에게 시론과 현대문학을, 박성의 교수에게서 가사문학을 배웠다. 검은 두루마기를 펄럭이며 강의실을 드나들던 조지훈 시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분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4년 뒤인 1968년 지병으로 48세에 돌아가셨다. 이 세 분에게서 배운 것이 내가 시를 쓰게 한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이름만 듣고는 내가 여자인 줄 알았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해리’라는 이름은 서양에서도 많이 쓰이는 남자 이름이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라는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해리는 남자이다.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나 영국의 해리 왕자, 그보다도 대한민국에는 시인 洪海里가 있지 않은가. 洪海里라는 이름은 넓은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는 정겨운 마을이란 뜻이다. 전북 고창에는 海里面이 있고, 전남 해남군에는 洪海里가, 해남읍에는 海里라는 마을이 있다. 나는 바다가 없는 충청북도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바다를 많이 동경했었다. 바다를 처음 보고 ‘바닷물이 정말 짠가?’ 하고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기도 했다. 그것이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1964년 대학을 졸업하고 인천에서 1년간 산 것도 바다 때문이었다. 그해 여름 어느 날 해질녘에 바닷가에 나가 소주를 들이켜고 바라다본 석양의 풍경을 나는 다음과 같이 그려 보았다.

 

노을이 타는

바닷속으로

 

소를 몰고

줄지어 들어가는

 

저녁녘의

여인들

 

노을빛이 살에 오른

바닷여인들

  -「갯벌」전문

 

  이것이 시랍시고 처음으로 써 본 것이어서 인천신문에 보냈더니 바로 발표되었다. 처음으로 활자화된 글로 내가 암송할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이 글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단지 바닷가 석양의 풍경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눈앞에 저녁녘의 물든 바다가 펼쳐져 보이지 않는가.

  1969년 시집『투망도投網圖』를 내어 문단에 나온 후 1970년대 초 충북에 동인지 하나 없음을 통탄하고 충주의 박재륜, 양채영 시인과 함께 충북 최초의 동인지『내륙문학內陸文學』창간을 주도하고 1972년 봄부터 73년까지 춘추로 4권의 동인지를 발간하고 나서 모든 걸 그곳 동인들에게 넘겨주고 서울로 직장을 옮겼다.

  1980년대 테마시를 특징으로 한 동인지인『진단시震檀詩』에 가담하였고, 1986년 우이동에 살고 있는 이생진, 임보, 채희문, 신갑선 시인과『우이동시인들』이란 동인을 결성하고 ‘87년부터 봄가을로 동인지를 ’99년까지 25집을 간행했다. (신갑선 시인은 6집까지 참여함)

  1987년 봄 동인지 창간호를 발간한 기념으로 '우이시낭송회'를 개최한 것이 현재의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우이시낭송회, 도서출판 움, 월간『우리詩』)의 모태가 되었다.

  현재는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도봉도서관에서 시낭송회를 열고 월간시지『우리詩』를 발간하며 봄가을로 삼각산에서 시화제와 단풍시제를, 여름에 해변시인학교를 개최하고 있다.

  며칠 전 도서관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데 옆에 있던 한 사십대 중반이 내가 들고 있는 시지를 보고, ‘요즘 우리나라 인구 10분의 1은 시집을 가지고 있지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이 우리나라에 시인이 많다는 말인지, 시집을 낸 사람이 많다는 말인지, 시를 가까이하는 독자가 그만큼 많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환언하면, 시를 공부하고 쓰는 이들이 너무(?) 많다고 조롱하는 말인지 시를 읽는 이들을 놀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하찮은 시라도 쓰는 사람이 쓰지 않는 사람보다는 낫다. 시를 좋아해서 읽고 감상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낫다. 우리나라 5천만 인구가 시집을 갖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라고 대답을 했다. 시집을 갖는다는 말은 모두가 시집을 낸다는 뜻도, 시집을 들고 읽는다는 말도 포함된 것이다. 우문현답인지 현문우답인지 나도 모르겠다.

  시에 대해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나는 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시인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다. 죽을 때까지도 그럴 리야 없겠지만 시를 다 알고 나면 시를 쓰지 않게 되든가 아니면 쓰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여자도 그렇다. 한 여자를 다 알고 나면 매력이 없어 더 보고 싶지도 만나고 싶지도 않게 될 것이다. 시를 다 알려고 하지 않고 아껴두는 것은 죽을 때까지 사랑해야 할 여자이기 때문이다. 시를 다 안다면 무슨 재미로 시를 쓰겠는가.

  시는 어떤 것이고 시인은 누구인가. 시는 시시是是한 것이요, 시인은 그렇다고 시인是認하는 사람이어서 시인은 시로써 인류의 정신을 일깨워 나가는 시인是人이어야 한다. 시는 모든 문학의 꽃, 즉 문학의 정수이다. 시는 문학이라는 나무가 피워내는 아름다운 꽃이다. 시는 문학이라는 동물의 맑고 밝은 눈이다. 시는 문학이라는 바다의 반짝이는 등대이다.

  여러분은 시를 찾아서, 시인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 시를 찾으셨는가? 시인을 만나셨는가?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누구인가? 나는 이제까지 시를 써 오면서 시론이라는 것을 말로나 산문으로 써서 펼쳐본 적이 없다. 그런 일은 시론가, 문학평론가, 시를 연구하는 학자가 할 일이다. 시인이란 아무 걸림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자유인이다. 우주를 쫙 펼쳐 놓고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시를 쓰리라. 별을 바라다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한 개 따다가 품어 보리라. 바다를 몽땅 퍼다 밤새워 소금꽃을 피워 보리라.

  나의 시는 무엇이고 나는 어떤 존재인가. 자연 속에 들어가 자연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그래서 내 詩는 가장 완벽한 예술품인 자연을 흉내를 낸 것, 즉 모방한 것뿐이다. 아니면 내 詩는 자연에서 빌린 것뿐이다. 나는 늘 일탈逸脫을 꿈꾸고 시의 모반謨反을 계획한다. 일탈逸脫은 일탈一脫로 족하다. 이탈二脫이 되면 이탈離脫이 되고 만다. 모반은 모반계획만으로 족하다. 그래도 나는 늘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지역汽水地域으로의 일탈을 꿈꾸고 있다. 오늘도 나는 기수지역을 꿈꾸고 내일은 그곳으로 일탈을 감행코자 한다.

 

  1970년대 초 어느 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국어 선생님 한 분이 병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바로 강사를 채용할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에 국어교사들이 한 반씩 맡아 수업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국어교사들이 달려들어도 한 반이 남게 되어 시인이라는 죄로 내가 한 반을 맡아 국어 수업을 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국어교사가 시를 좋아해서 제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생각된다. 대개는 참고서에 있는 답을 책에 적어 가지고 들어가서 시 강의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쩔 수 없이 국어교사가 된 나는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선언을 했다. 나는 여러분이 이제까지 시 공부를 한 대로 가르치지 않고 나대로 자유롭게 시를 함께 공부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내가 가르치는 대로 수업은 받지만 시험을 칠 때는 참고서에 있는 대로 답안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중고등학교에서의 시공부는 교사를 잘 만나면 많은 시를 암송하고 감상할 수 있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참고서가 교사보다 위에 서서 시를 망치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참고서에 있는 대로 한다면 칼과 도끼로 시를 토막치고 잘라서 맛없는 음식을 요리하게 될 수밖에 없다.

  시를 감상한다는 것은 시를 토막 내서 아무 맛도 없이 분석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시감상은 한 그루 나무만 볼 것이 아니라 나무가 모여 이루고 있는 숲을 볼 수 있도록 감상하는 방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줘야 할 것이다. 당신이 중고등학교 국어교사라고 가정해 보자. 학생들에게 시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시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시는 무엇인가? 詩는 是이고 詩人은 是人이어야 한다. ‘語’자를 보면 ‘言’과 ‘吾’가 합쳐 만들어진 글자이다. ‘言’ = ‘吾’의 관계이니 바로 ‘말씀’이 ‘나’란 뜻이다. ‘나’를 ‘말씀’하는 것이 바로 시가 되는 것이니 함부로 할 일이 아니다. '詩'는 '言'과 '寺'가 합쳐진 것이다. 그러니 詩는 말씀의 절이고 그 절에 있는 빛나는 ‘언어의 경전’이다. 나는 시는 시시是是한 것이고 시인詩人은 시인是人이라고 시인是認하는 사람이다.

  시는 쉽고 짧고 재미있어야 한다. 음식도 맛이 있어야 하듯 시도 맛이 있어야 한다. 향기가 있어야 한다. 아름다워야 한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결코 아니다. 시는 한 번 읽고 나면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야 한다. 시는 읽고 난 후에 사색에 젖게 하고 가슴을 시원하게 울려주는 감동이 있어야 한다. 아니면 짜릿하게 파문을 일으키든가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게 할 수 있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시는 진선미의 맑고 고운 맛과 멋이 배어 있어야 한다.

 

  시는 꽃이어야 한다. 꽃은 색깔과 향기와 꿀과 꽃가루가 있어 벌 나비가 모여든다. 꽃의 형태는 얼마나 조화롭고 아름다운가. 독자가 없는 시는 조화나 시든 꽃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시는 물이어야 한다. 사람들을 촉촉이 적시고 가슴속에 스며들어야 한다. 독자들의 갈증을 풀어 줘야 한다. 시는 矢〔화살〕이어야 한다. 독자의 가슴을 꿰뚫을 수 있는 말씀의 화살, 언어의 금빛 화살이 되어야 한다. 독자들의 가슴에 꽂혀 파르르 떨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시에서 '나'를 써라. 내 이야기를 하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나의 경험, 내 주변의 이야기를 써라. 나의 가족, 친구, 풀, 꽃, 나무, 새를 주제로 삼아 솔직한 표현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라. 시를 쓰는 가장 초보적인 단계는 좋은 시를 많이 암송하고 필사하는 것이다. 모방과 흉내의 단계를 거치면서 자신의 목소리, 자신만의 세계를 찾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연필과 종이를 가지고 다니며 시의 씨앗을 메모하고 초고를 만들어 퇴고를 거듭하라. 한 편의 시를 완성했다고 생각되면 여러 번 소리를 내서 읽어보고 쓸 만하다고 여겨지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읽어 보게 하라.

  왜 시인인가. 시를 쓰는 이는 왜 '詩家'가 아니고 '詩人'인가? 소설가, 수필가, 평론가, 극작가처럼 '家'가 아니고 '人'인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시는 말씀 가운데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고 진실된 말씀의 '경전'이고 시인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장인이 아니라 '시를 낳는 어미'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길은 어떠한 길인가. 시인은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是人]이다.

시인에게 있어 어떤 정신이 바른 정신인가? 시인정신이란 선비정신과 풍류정신이 하나로 합쳐진 정신이다. 선비정신은 어떤 것이고 풍류정신은 어떤 것인가.

  선비정신이란 청렴과 결백의 염결廉潔정신이다. 청렴이란 마음이 고결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음이고, 결백이란 행동이나 마음이 조촐하고 깨끗하여 허물이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선비정신에는 독서, 분수, 배려, 관용, 포용의 정신이 들어 있으며 지조와 절개로 상징되는 의리정신도 포함된다. 그래서 선인들은 선비의 서재에는 '책과 거문고와 칼[書琴劍]'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독서를 많이 해야 함은 물론이고 거문고를 켜지 못해 벽에 세워만 놓아도 저절로 울어 줄 것이니 술 한잔이 있으면 풍류로 족할 것이다. 칼[劍]은 자르고 깎고 찌르고 베는 한 날의 칼[刀]과는 달리 양날을 지니고 있어 상대와 내가 조화 균형을 이뤄 중심을 잡고 조심하도록 마음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풍류란 바람이 불듯 물이 흐르듯 자연 속에서 자연을 즐기며 자연처럼 사는 것이다. 풍류도란 화랑도 즉 유불선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엔 음주 가무 놀이와 여유가 있어야 한다. 물처럼 바람처럼 막힘이 없이 멋과 자유를 즐기며 사는 신선사상, 즉 신바람 세상을 꿈꾸는 정신이다. 시인을 일러 선계에서 벌을 받아 인간계로 귀양을 온 선인, 즉 적선謫仙이라 하지 않는가.

시인은 올곧은 정신을 가지고 쓴 시로 세상을 환하고 따뜻하게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시인은 군림해서는 안 된다. 시인은 장사꾼이 아니다. 한마디로 시인의 삶은 참사람의 삶이요, 선비의 삶이어야 한다.]

 

홍해리 시인의 시로 쓴 시론을 붙인다.

 

 

고운야학孤雲野鶴의 시를 위하여/ 洪 海 里

 

나에게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누구인가?

시에 대하여,

시인에 대해 내가 나에게 다시 한 번 묻는다.

 

꽃을 들여다보니 내가 자꾸 꽃에게 길들여지고 있다

꽃을 봐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가장 아름답고 감미로운 꽃의 노래는 들리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은 껍질뿐

껍질 속에 누가 청올치로 꼭꼭 묶어 놓은 보물이 들어 있는가

텅 빈 멀떠구니 하나 아직도 배가 고파

몸 속에 매달려 껄떡이고 있다

자연을 잊고, 잃었기 때문이다

욕심의 허물을 벗어 허물이 없는 詩, 너를 기다리는 마음이 늘 그렇다.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너무나 많다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몰입하는 것이다

마중물 같은 시, 조촐하고 깨끗한 시 한 편을 만나고 싶어

뚱딴지 같이 천리 길도 머다 않고 햇살처럼 달려나가지만

나는 늘 마중만 나가고 너는 언제나 배웅만 하고 있다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해 흘리고 있는 눈물 속에

시가 별것 아니라고 너와 별거를 할 수가 있는가

사람 사는 일이란 길을 트고 길이 들고 길을 나는 것이 아닌가

푸르게 치닫는 치정의 산하로

강 건너 웃는 소리 들리지 않고 산 너머 우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어찌 우리가 하늘까지 닿을 수 있겠는가

마디게 더디더디 익어가는 시도 언젠가는 향기롭게 익으리니

나무가 본능으로 햇빛을 향해 몸을 뒤틀 듯

그리 해야 시가 다가오지 않겠는가.

 

호박꽃 속에서는 바람도 금빛으로 놀고 있다

호박벌 한 마리 황궁 속에 들어가면

금방 황금도포를 걸치고 활개 치는 금풍金風이 요란하다

둥근 침실로 내려가 신부를 맞이하면 어찌 세상이 환하지 않으랴

금세 젖을 물고 있는 아기가 보인다

푸른 치마를 걸친 시녀들이 줄줄이 부채 들고 바람을 맞이하고 있다

하인들은 더듬이손으로 도르르 감고는 놓으려 들지 않는다

사랑이란 기갈나고 감질나는 것이 아니던가

줄줄이 태어나는 왕자와 공주들

이제 천지 사방으로 벋어 나가면 온 세상이 금빛 바람 부는 영토가 되리라

시도 이렇게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으랴.

 

시여, 너를 꿈꾸다 깬 몽롱한 새벽 나 혼자 아득하다

머리맡의 파돗소리 잠들고 백사장은 텅 비어 있다

꿈이란 내가 꾸는 것이어서 너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겠지만 나는 잊어버리기 일쑤지

일수를 빌려 얼마를 갚고 남은 것이 몇 푼인가

도무지 기억이 아물아물 아련하다

꾼다는 것은 잠시 빌려쓰는 것이라서 갚기는 갚아야 하는데

한여름 저녁나절 자귀나무꽃 아래서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자귀나무는 내 꿈속에서 무엇을 꾸려는지 분홍빛 주머니를 흔들고 있다

자귀나무 꽃이 지고 나면 내 시도 콩꼬투리 같은 열매가 맺힐 것인가

꿈이 컸으니 바람만 불어 꿈같은 세월이 아득하게 지고 있다.

 

천둥은 왜 치는가, 천둥은 언제 우는가

울어야 할 때 천둥은 운다, 천 번을 참고 참았다가 친다

피터지게 울고 통곡한다

아무때나 함부로 우는 것은 천둥이 아니다

번개는 왜 치는가, 번개는 똥개처럼 울지 않는다

옆집 개가 하늘 보고 컹컹 짖을 때 똥개는 따라 짖는다

안개도 울고 는개도 운다, 소리없이 운다

번개는 번득이는 촌철살인의 이론이 있어야 한다

유월이라고 느긋하게 놀면서 보내려 했더니 흐르는 듯 수유인 듯 가고 만다

미끈유월이라고 시를 만나지 않고 미끈미끈 보낼 수는 없다

내가 쓴 시에서도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우는가 돌아볼 일이다.

 

혼자 아닌 것이 없다고 함부로 노래하는가, 시인이여

혼자가 아닌 것이 어디 있던가

어느 시인은 '혼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다'(No man is an island!)라고 했지

세상에, 세상에 행이 무엇이고 연이 무엇이란 말인가

행간行間에는 무엇이 있는가, 연간聯間에는 또 무엇이 존재하는가

반평생 너와 살아도 어려운 것은 행간을 읽는 일

연간을 읽는 일이 아니던가

갈 곳이 멀다고 모든 것을 읽고 말면 혼자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이 자는 자 행간에 홀로 누워 코나 골고 있을까

나는 혼자인가 혼자가 아닌가

오늘도 욕심 없고 허물 없는 시 속으로 몸 던져 자폭하고 싶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사랑타령인가

네 개의 사랑 가운데 마지막 사랑이 손을 놓았다

하룻밤 잠 못 자고 울음을 토하다 시원히 손 흔들며 보내 주었다

잘 가거라 마지막 사랑이여

이제는 사랑 없이 살아야 하는 남은 삶을 어이 할 것인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 수 있는가

아무 쓸모없는 사랑이라면 일찍 버리는 것이 좋다.

'이'가 사랑을 만나면 '사랑니'가 되는 것은 사랑의 속성이지만

사랑도 사랑 나름이어서 쓸데없는 사랑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시에서도 필요 없는 사랑은 사랑니처럼 뽑아버려야 한다.

 

입추가 되어 혼인비행을 하고 있는

한 쌍의 가벼운 고추잠자리를 보라

하늘이 제 잠자리라고 그냥 창공을 안아버린다

축하한다고 풀벌레들 목청을 뽑고

나무들마다 진양조 춤사위를 엮을 때

한금줍는 고추잠자리는 추억처럼 하늘에 뜬다

내가 쓰는 한 편의 시도

눈과 머리와 몸통과 꼬리와 날개를 가지고

고추잠자리처럼 푸른 하늘에 자유로이 날 수 있을까.

 

허리띠를 졸라맬 때마다 수도꼭지를 틀곤 했던 시절

주린 배를 물로 채우고 올려다본 하늘은

늘 푸르고 높아 먼 그리움처럼 반짝반짝 윤이 났다

아무리 물 쓰듯 한다지만 수도꼭지는 잠가야 한다

물처럼 쓰고 싶은 시도 꼭지를 잠그고 기다릴 때가 있다

대한大寒도 무섭지만 대한大旱 앞에 견딜 장사가 있는가

물은 생명이다! 라는 구호가 그냥 구호口號가 아니라

구호救護가 되어야 한다

물보다 여리고 욕심 없고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또 있겠는가

시도 그렇다.

 

바위는 제자리서 천년을 간다

제 몸뚱어리를 갈고간 조각들이 버력이 되고 모래가 되어

다시 천년을 흙으로 간다

그렇게 간 거리가 한자리일 뿐, 그래도 바위는 울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오고 강물이 흘러가고 번개 치고 천둥 운들 대수랴

바위는 조촐하고 깨끗한 제자리를 하늘처럼 지킨다

바위 같은 시 한 편을 위해 시인은 바위가 되어 볼 일이다

 

폐허에, 향기로운 흉터에 또 상처를 남기기 위해

가슴속에 자유라는 섬 하나 품고 살거라

너도 상처를 입어 봐야 올곧은 자세로 시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바람은 다리속곳 바람으로 대고 꿈꾸며 불고

물위를 탐방탐방 뛰어가는 돌처럼 우주의 자궁에서 아기별이 탄생하고 있다

웃음이 그칠 때까지, 눈물이 마를 때까지

바람 바람 울어라, 바람 바람 불어라

시도 그렇게 태어나기 마련이다.

 

시는 자연이 보내는 연애편지, 시가 맛이 가면 사랑은 떠난다

시가 상하고 시는 날에는 사람들이 식상하는 법이다

갓 시집온 새색시 시장바구니에서 싱싱한 참붕어를 꺼내 놓고

그냥 두면 쓰레기 될 퍼런 무청을 말린 시래기에 파 마늘 생강 콩나물 무 감자

인삼 양파 깻잎 쑥갓 밤 대추 기름 고춧가루 사골육수 청주까지

듬뿍듬뿍 넣고 찜을 만들어 새신랑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라

상 차려 덮어놓고 맛있는 술도 한 병 준비한 다음---,

시는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

생선회도 숙성을 해야 맛이 더하듯 시도 잘 숙성을 시켜야 한다.

 

자리끼가 놓이던 자리에 백지 한 장 펼쳐 놓고

밤새도록 잠 속에서, 꿈속에서 싸우고 있다

그물과 작살을 바다에 던지고 흐르는 물에 낚시를 드리운다

허공에 그물 치고, 앞산 뒷산에 덫과 올무도 설치한다

고래는 못 잡아도 노루 토끼 고라니 멧돼지는 잡아야지

풀씨나 나무열매라도 털고, 멧비둘기 꿩 메추라기라도 잡아야지

버들치 갈겨니 쉬리 동자개 참마자 치리라도 잡고 싶은 밤은 어이 빨리 지새는가

꿈을 깨고 나면 열심히 암송했던 명시(?) 한 편이 간 곳이 없다

詩앗이나 詩알은 때를 놓치지 말고 그때 그때 잡아야 한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가면서 가래 두 알을 달그락달그락 굴리다 보면

살불이 일어 손바닥에 별이 뜬다

시의 별이 가슴에 와 안긴다

무쇠솥 걸어 놓은 아궁이에 발갛게 타는 참나무 장작불

겨울 하늘까지 탁 탁 튀어오르는 불알, 불의 알처럼 영혼이 뜨겁다

시도 푸른 불알처럼 우리 가슴속에서 불타올라야 한다

하늘에 뜬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야 한다.

 

높이가 없으면 산이 아니고 깊이가 없으면 바다가 아니다

넓이가 없으면 하늘이나 들이 되지 못한다

한 편의 시도 높이와 깊이, 넓이가 있어야 한다

 

오늘도 새벽 세 시 한 대접의 냉수로 주린 영혼을 씻고 몸과 마음에 촛불을 밝힌다

시는 내 영혼이 피워내는 향기로운 꽃이요, 그 꽃이 맺는 머드러기이다

시는 아무리 마셔도 물리지 않는 물이요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밥이다

보이지 않는 공기와 물과 밥이 만들어내는 한 방울의 뜨거운 피와 뼈다

시는 내 집이요 길이요 빛이요 꿈이다

우리의 영토에 드리우는 시원하고 환한 솔개그늘이다.

 

이름 없는 풀이나 꽃은 없다, 나무나 새도 그렇다

이름 없는 잡초, 이름 없는 새라고 시인이 말해서는 안 된다.

시인은 모든 대상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이다

이름없는 시인이란 말이 있다

시인은 이름으로 말해선 안 된다 다만 시로 말해야 한다

이름이나 얻으려고 장바닥의 주린 개처럼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기웃대지는 말 일이다

그래서 천박舛駁하거나 천박淺薄한 유명시인이 되면 무얼 하겠는가

속물시인,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꺼귀꺼귀하는 속물이 되지 말 일이다

가슴에 산을 담고 물처럼 바람처럼 자유스럽게 사는 시인

자연을 즐기며 벗바리 삼아 올곧게 사는 시인

욕심없이 허물없이 멋을 누리는 정신이 느티나무 같은 시인

유명한 시인보다는 혼이 살아 있는 시인, 만나면 반가운 시를 쓰는 좋은 시인이 될 일이다.

 

如是我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