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치매행致梅行」 읽기 / 이동훈 시인

洪 海 里 2020. 11. 16. 04:02

홍해리 시인의 사모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듣고

시인의 치매행을 다시 읽어본다. 매화로 가는 길도, 집으로 가는 길도 당분간 캄캄하실 듯하다.

 

봄은 몸에서 핀다

- 치매행(致梅行) 99 / 홍해리

 

몸에 뿔이 돋아나면 봄입니다

뿔은 불이요 풀이라서

불처럼 타오르고 풀처럼 솟아오릅니다

연둣빛 버들피리 소리

여릿여릿 풀피리 소리

속없는 사람

귀를 열고 닫을 줄 모르는 한낮

봄은 몸에서 피어나는데

봄이 봄인 줄 모르는 사람 하나

있습니다

꽃이 꽃인 줄 모르는 사람 하나

있습니다.

- 『치매행(致梅行)』, 황금마루, 2015.

 

* 임채우 시인은 발문에서 홍해리 시인을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수염 덥수룩한 노인에 견주며, “노인은 기력이 다하지 않는 한 바다로 나가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홍해리 시인에게 바다는 시(詩)다. 험한 파도나 큰 물고기에 패배당할 시인은 아니지만 안에서 생긴 걱정이 격랑 되어 시인을 결박하고 상심하게 한다. 평생의 반려가 몸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몸에서 위로, ㅁ에서 ㅂ으로 싹(촉이라 해도 좋고, 뿔이라 해도 좋겠다)을 내는 게 봄인데, 시인의 가정엔 봄이 사라졌다. 시인은 평생의 업인 시로 다시 봄을 불러오려고 한다. 말문을 닫은 아내에게 “마지막 선물 한 편”(<마지막 선물> 중에서)을 안기려는 일심으로, 매화 벙그는 데까지 나아가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몸의 아픔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묻노니/ 아내여,/ 봄이 오긴 오겠는가!”(<무제> 중에서) 탄식하며 몸과 봄 사이에, 불안과 희망 사이에 주저앉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은 끝내 뿔을 내서 봄으로 가려고 한다. “머잖아 봄이 오는 소리 보는 듯 들리겠다”(<겨울 들녘> 중에서)며 희망을 놓지 않는다.

앞서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패배하지 않았지만 바다 역시 그저 아득할 뿐이다. 시인은 어쩌면 노인과 바다를 함께 바라보는 소년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버들피리 불며 곡조 따라 떠다니고 싶은.(이동훈)

 

집으로 가는 길

- 치매행 致梅行 · 187 / 홍해리

 

어쩌다 실수로 아내의 치매약을 먹었습니다

그날 밤 꿈속에서

하염없이 거리를 헤맸습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을 찾지 못하고

걸어다니는 일도

차를 타는 것도 다 잊은 상태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허우적허우적거리다

때로는 허공을 날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 길을 잃고 헤맨 아내

그 뒤를 쫓아다녔는지도 모릅니다

여덟 시간 미아가 되었던 아내의 긴 세월을

하룻밤 꿈으로 대신했나 봅니다

아내의 치매약으로

다른 한세상을 구경한 내가

약도 없는 치매환자가 되어

환한 대낮에 길을 잃고 허청댑니다.

- 『매화에 이르는 길』,도서출판 움, 2017.

 

* 시를 읽으면서 영화 한 편, 그림 한 편이 연상되었다.

영화는 ‘집으로 가는 길(장예모 감독, 1999)’이다. 시 제목과 일치한 데서 우연히 떠올려진 것이다. 그렇긴 해도 홍해리 시인 역시, 남자 주인공처럼 반듯한 외모에 교사 시절을 지나왔으니 영화 속 부부가 그랬듯이 풋풋한 연애와 서로 간의 존경과 사랑이 컬러로 채색된 시절이 있었으리란 생각도 든다. 영화는 남편의 장례를 준비하는 현재 장면이 오히려 흑백으로 처리된다. 아내가 치매 판정을 받고 집을 나서서 미아가 될 뻔한 시인의 가정사도 이전의 컬러 빛이 빠지며 담담해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넘겨짚어 보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다 큰 미아가 된 아내는 이전보다 자유로워지고 더 천진난만해지기도 했을 테지만 시인과 가족은 그만큼 더 어두워져서 마음을 졸일 때가 많을 것이다.

두 번째 연상된 그림은 샤갈의 <산책>(1917)이나 <마을 위>(1914-18)다. 연인 벨라를 포옹하거나 손을 잡으면서 하늘을 나는 장면인데, 치매약을 먹고 그날 꿈속에서 거리를 헤매고 허공을 날기도 했다는 데서 연상이 되었을 것이다. 샤갈이 고향에 돌아와 안정을 취하며 사랑에 빠진 그 즈음의 모습을 그렸다면, 시인은 실수로 치매약을 먹을 정도로 피곤한 상태에서 꿈속에조차 가위눌리고 또 그런 과정을 통해 아내를 더 이해하려는 마음을 보여준다.

영상이나 그림이 밝다고 해서 다 밝은 것도 아니고 시가 어둡다고 해서 다 어두운 것도 아니다. 행복해 보이는 그림 뒤에 불안의 그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쓸쓸하거나 슬픈 대목이라 해서 반짝이는 행복이 없는 것도 아니다. 장예모는 영화로, 샤갈은 그림으로, 시인은 시로 생의 한때를 잘도 포착해 두었다. 다 다르지만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의 차이로 메모해 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정해진 약도는 없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