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움직이는 것은 바람으로 / 홍인우(시인)

洪 海 里 2020. 12. 11. 09:22

움직이는 것은 바람으로

 

홍 인 우(시인)

 

 


 시인께서 서명을 마치고 건네주시며 말씀하셨다.
 이 시집 읽고 가장 마음에 닿는 거 한 편만 이야기해 줘요.
 작고 낮은 음성이었다.
 돌아오는 전철에서 시집을 펴들었다.
 평소 책 읽는 습관대로, 다시 읽고 싶은 페이지는 위에서, 필사하고
싶은 부분은 아래에서 삼각으로 접으며 읽다가 어느 페이지에서 가슴
이 쿵 떨어졌다.
 몇 번 몇 번을 다시 읽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와 다음 역에서 내렸다.
 아마 창동역이었지 싶다.

 


너를 향해 열린 빗장 지르지 못해


부처도 절도 없는 귀먹은 산속에서


꽃초롱 밝혀 걸고 금강경을 파노니


내 가슴속 눈먼 쇠북 울릴 때까지.

홍해리 시인의 시 「금강초롱」 부분이다.

 


한 행을 한 연으로 삼았는지 행과 행 사이가 넓어 바람이 많이 드나
든다.
드나드는 바람결 사이로 내 묵은 그리움도 함께 슬쩍 다녀갔는가
마음이 시려서 창동역 구석진 자리에 앉아 좀 울었다.
젊음이 사그라진 중년 여자가, 공공의 장소에서, 책에 얼굴을 떨구
고 연신 손수건을 드는 모습이 그닥 아름답진 않았겠지만 그날 나는
감정에 충실했으며 오랫동안 잊은 척 외면했던 지나간 시간의 조각들
과 올곧게 마주보았다.
'너를 향해 열린 빗장 지르지 못해 금강경을 파'던 시절은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내게도 있었으니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나를 이겨야 했던, 내가 당신을 극복해야 했던 힘겨운 시간의 한가운
데에서 돌려깎기하는 사과처럼 도무지 끝나지 않던 질긴 마음. 내동
댕이 치고 싶으면서도 차마 그러하지 못했던 뜨거운 시절의 뜨거운 감
자였다.


버스정류장 옆 강변모텔 돌아
검정 조약돌 섞여 있는 강가에 앉아 한나절
오래된 전설을 한 음절씩 깨문다
어딘가 높은 산에서
저마다 사연 담은 물방울로 생겨나
골골을 흘러흘러
깨진 마음 아픈 상처로 만나는 마을
만나서 똑같은 얼굴로 섞이는 마을
오래도록 접동새 울음소리 슬펐을 강변에서
정선아리랑을 제법 감기게 부르며
나도 이 강물에 가만가만 풀린다
- 졸시 「아우라지」, 전문.


「아우라지」를 쓰던 그 무렵에는 우리 민요 ‘정선아리랑’ 앞 두 소절
을 자주 흥얼거렸다. 그것은 한숨이었고 푸념이었으며 술안주였다. 햇
볕 짱짱한 한여름 강가에서 눈부신 강물을 바라보며 나는 무슨 생각
을 했었던가. 지르지 못하는 빗장 속의 싱싱한 그리움이 버거워 빨리
늙기를 소망했었다. 늙으면 그리움도 애달픔도 모두 무심히 넘길 수
있으리라 착각했던 것이다.
이후로 오랜 나날이 흘렀으나 아직도 가슴은 세월에 물들지 못하고
때때로 출렁인다.

 


터무니없이 붉게 타오르는 칸나처럼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현관 열쇠처럼


있다가 없다가
없다가 있다가


내가 있는 곳
바람이 잠시 머무는 곳


움직이는 것은 바람으로
- 졸시 「움직이는 것은 바람으로」, 전문.

원각경의 한 구절처럼 움직이는 것은 모두 바람이 되어 흔적없이 날
아갈 것이다.
세월도 그리움도 사랑도 미움도 나도 당신도 차례로 왔다가 때 되어
가고 말겠지만 ‘꽃초롱 밝혀 걸고 금강경을 파’던 애달픈 유정의 시대
는 끝이 없어, 나이가 들어갈수록 의젓하고 담담한 사람으로 변해 그
리움 같은 거, 마음속 화석으로나 남을 거라는 섣부른 예상을 이젠 묻
는다.
그리고 페이지의 위쪽이 삼각으로 접혀 있던 이 시로 오늘 밤이 흔들
린다.

 


처서가 왔습니다 그대가 반생을 비운 자리에 난초꽃 한 송이 소리
없이 날아와 가득히 피어납니다 많은 세월을 버리고 버린 물소리 고요
속에 소심素心 한 송이 속살빛으로 속살대며 피어납니다 청산가리 한
덩이 가슴에 품고 밤새도록 달려간다한들 우리가 꽃나라에 정말 닿을
수 있겠으랴만,


피어나는 꽃을 보고
그대는 꽃이 진다 하고
나는 꽃이 핀다 하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피고 지면서
목숨은 피어나는데…,
참 깊은 그대의 수심水深
하늘못이네.

우리가 본시부터
물이고 흙이고 바람이 아니었던가
또는 불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물빛과 하늘빛 속에는 불빛도 피어나 황토빛 내음까지 실
렸습니다 올해에도 여지없이 처서가 돌아와 산천초목들이 숨소리를
거르는데 늦꽃 소심 한 송이 피어 깊이깊이 가슴에 들어와 안깁니다.
푸르르르르 백옥 같은 몸을 떨며 부비며 난초꽃 한 송이
아프게 피었습니다.
 - 홍해리, 「난초꽃 한 송이 벌다」, 전문.

 

* 홍인우 : 2013년《해동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거기, 티눈처럼 박힌 당신이 있습니다』가 있음. inokinok11@hanmail.net

- 월간 《우리詩》 2021.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