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집으로 가는 길

洪 海 里 2024. 3. 24. 06:46

집으로 가는 길

- 치매행致梅行 · 187

 

홍 해 리

 
어쩌다 실수로 아내의 치매약을 먹었습니다
그날 밤 꿈속에서
하염없이 거리를 헤맸습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을 찾지 못하고
걸어다니는 일도
차를 타는 것도 다 잊은 상태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허우적허우적거리다
때로는 허공을 날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 길을 잃고 헤맨 아내
그 뒤를 쫓아다녔는지도 모릅니다
여덟 시간 미아가 되었던 아내의 긴 세월을
하룻밤 꿈으로 대신했나 봅니다 
 
아내의 치매약으로
다른 한세상을 구경한 내가
약도 없는 치매환자가 되어
환한 대낮에 길을 잃고 허청댑니다.  
 
- - 詩選集 <마음이 지워지다> (2021, 놀북)
- 원시 출처: 시집 <매화에 이르는 길> (2017)  
 
 
*홍해리(1942, 충북 청주 생) 1969년 시집 <투망도(投網圖)>로 활동시작.
시집 <대추꼴 초록빛> <투명한 슬픔> <푸른 느낌표!> <독종 毒種>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外 다수.  
#홍해리 #치매 #부부 #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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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 인연은 없으나, 우리 시대에 가장 열정적으로 詩를 쓰고 詩를 가르치고 詩人들을 길러낸 詩人이 홍해리 시인 아닌가 싶다. 70년대 이후 꾸준히 詩를 발표하면서 스무 권 이상의 시집을 냈다. 선집을 포함하면 권수는 훌쩍 늘어난다. 50여년간 최소 2-3년에 한 권씩은 시집을 펴낸 셈이다. 그와 함께 '우리詩'로 수렴되는 우이詩낭송회(우리詩진흥회)를 비롯한 여러 詩문학 단체를 직접 이끌거나 지원했다. 그 덕에 한국에서 詩를 쓰거나 공부하는 사람 치고 洪海里 시인의 명성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 잘못 치매약을 먹고 겪은 하룻밤의 꿈 경험은 詩人에게 깊은 통찰을 주었다.
꿈은 무의식, 현실은 의식이 표현하는 세계다.
흔히들 의식과 무의식은 낮과 밤의 일상을 나누어 관리하면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신분석 연구가 칼 융은 '의식과 무의식의 완전한 상호통합이 인격 발달의 마지막(완성) 단계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현실을 잊어가는 치매환자의 약을 대신 먹은 날에 詩人이 겪은 꿈과 현실세계의 혼재, 꿈 같은 현실과 현실 같은 꿈이 하나처럼 느껴지는 이 경험은 그에게도, 이를 전해 듣는 독자에게도 예사롭지 않다.  
혹은 지금의 시대가 .. 그와 같은 夢遊의 고비를 경험하고 있음을 은근히 말해주는 것은 아닐지..  (丁明)   
 

- https://story.kakao.com/_0UiL87(시와 인생-詩)에서 옮김. 2024.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