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詩論> 뚝!/김영수

洪 海 里 2005. 10. 11. 11:00
<詩論>

뚝!

金 永 秀(문학평론가)

우리들의 요즈음 생활은 우울하다 못해 아예 말문이 막힌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하나같이 답답하다. 더구나 정치판은 갈수록 혼미하여 한마디로 재앙이다. 무슨 시운인지 다양하게 혼미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모 일간지 「아침詩」에는 달이 내려다 본다. 누추한 곳을 속속들이 비춘다, <가는 실밥도 역력히 보>일 터에 굵은 大盜들의 꼴은 더욱 형형하다.
펑펑 눈이라도 쏟아져 어지러운 세상을 덮었다가 열어주기를 바라는 한 시인이 있었다.

눈이 온다.
먼 북국 하늘로부터
잠든 마당을 다독이면서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갸우뚱거리던 눈송이가
살풋이 내려앉는다.
살풋살풋 둥그렇게
마당이 부푼다.
둥그렇게, 둥그렇게

눈은 마당에 깃드는 꿈
마당은 커다란 새가 됐다.
그리고 단풍나무 꼭대기에서
작은 새가 내려앉는다.
저 죽지에
뺨을 대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그의 잠을 깨우지 않고?
- 황인숙, '눈은 마당에 깃드는 꿈' 전문

'눈은 겨울의 서정시'라고 말한 어느 선배 문인의 처지는 그래도 사치스러웠다. 지금이야 그 눈으로 부식한 세상을 덮어 순수한 새 잔등이라도 만들고 싶은 것이 오늘의 시인의 안타까운 꿈이다. 그리하여 그 새의 죽지에 뺨이라도 비비고 싶은 것이다.
시인이 있어 아직 희망 한 점, 꿈길 하나 그리움으로 남아 있으니 다행이다. 몹시 추운 <겨울날>에도 따뜻한 불꽃을 피워내는 시인아, 그런 이적의 지팡이로 만신창이가 된 이 땅을 후려쳐서 봄비라도 재촉하려마.
이제 겨레는 異積이 아니고는 혼절할 판이다.

물 속에 불을 피운다
강가에 나가 나뭇가지를 주워
물 속에 불을 피운다.
물 속이 추운 물고기들이
몰려와 불을 쬔다.
멀리서 추운 겨울을 보내는
솔씨 하나가 날아와 불을 쬔다.
길가에 돌부처가
혼자 웃는다.
- 정호승, '겨울날' 전문

이찬형의 禪詩에는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는다> 그리고 <거미집은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다>. 그야말로 <우주적 여여의 심포니>이다.
그렇다면 <길가의 돌부처가 / 혼자 웃는다>고 한 정호승의 노래는 퇴락한 사회의 이적이다. 모두들 권력의 시녀가 되어 홀로 영광을 누리다 쓰러질 때, 인사철마다 줄대어 입신양명하면서 검찰 조직을 부식시킬 때 어느 고위 검찰관은 홀로 돌올하여 죽기로 작정하더니 찬연하게 살았다.
스스로 울어 참회해야 할 때, 남의 눈물 대신 울어 세상을 뜨겁게 한 심재륜은 스스로 소금이 되었다.

초록에 겨워
거품 물까 봐
지쳐 잠들까 봐
때까치며 지빠귀 혹여 알 품지 않을까 봐
뻐꾸기 운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은 뻐꾸기가
할 일은 할 수 있는 있는 일은
울음으로 뉘우치는 일
멀리서 울음소리로 알을 품는 일
뻐꾸기 운다.
- 이문재, '뻐꾸기는 울어야 한다' 중에서

이문재가 본 뻐꾸기를 해설자 안도현 시인은 <싸가지 없는 새>라 했다. 이문재는 정작 무엇을 보았을까. 권력에 기생하여 국민을 울리는 비루한 고위 공직자를 본 것이 아닐까. 하여, 권력 자체를 죄의 몸통으로 만들어 버린 수많은 하수인들이 보기 민망할 때가 많다.
요즈음 정가 관가의 많은 노략질, 거짓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어느새 인간들 자체가 누추해지고 말았다. 거리를 걸으면서 가로수 하나 새 한 마리가 눈에 멎어 그래도 숨통이 트인다.
세상은 허탄해도 너와 나 사이에 시가 있고 시인이 있어 그래도 우리는 막힌 기를 열고 살아간다.
말 많은 세상에 말을 아끼고 아껴 한 줄, 한 자 시로 상한 우리의 마음과 지혜를 열어주니 만행이다.

해질 녘
강가

돌아갈 줄 모르고
외다리로 서 있는

한 마리


!
-洪海里, '새' 전문

장자는 달팽이 뿔 두 개를 싸우는 두 나라로 비유하면서 한심한 세상을 조소하며 나무라고 있다.
洪海里 시인은 '牛耳詩' 회원들고 함께 꾸준히 세상 지키는 노래를 계속한다.
두 개의 소뿔(牛耳) 사이에 시와 시론을 걸어놓고 온 세상에 사랑의 메시지를 보낸다. <해질 녘 / 강가 // 돌아갈 줄 모르고 / 외다리로 서 있는 // 한 마리 / 학 // !>의 모습을 시인은 스스로 사설하지 않고 단순한 그림 한 폭을 선사해 주고 독자 스스로 이 시의 맛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 시는 향가도 되고 하이꾸도 되고 선시도 된다. 그리하여 뿔과 뿔 사이에는 삶의 동력이 있고 <말씀>도 <금강경>도 있고 연꽃도 핀다.
오늘처럼 말의 홍수 시대에, 말의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 뚝하고 침묵하는 시 한 편이 空이고 진리이고 전부이다.

뚝!
- 洪海里, '동백꽃 속에는 적막이 산다' 전문

오늘 우리 사회는 생각하는 여유도 인내도 겸허도 없다.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여당은 여당대로, 여당 중에도 신주류는 신주류대로 구주류는 구주류대로 중도는 중도대로, 그리고 야당 역시 60대 이상은 이상대로 이하는 이하대로 서로 각개 전투를 벌인다.
여기에 이론에 밝다는 학자가 끼어들지만 뾰족한 수는 없다.
어느날 모 일간지에는 노 대통령이 <모택동을 존경한다>는 말을 잡고 두 지식인의 공방전이 있었다. 그 후 두 사회학자가 또 엇갈리는 시선으로 왈가왈부 했다.
화두의 내용인 즉 송호근 교수의 「한국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에 대한 같은 사회학자 전상인의 서평, 그 서평은 대부분 저자와 공감하는 찬사로 이어졌지만 <그러나>로 덧붙인 부분은 부드러웠으나 강한 비판이었다.
특히 송호근 교수의 논지 가운데에는 지난 때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2030세대였으니 이제 우리 사회는 2030세대에 방향타를 넘기자고 했다나. 이에 서평자 전상인은 송호근 교수에게 <2002년 겨울>은 보았지만 <2003년 여름>의 부정적인 측면은 보지 못한 것이 심히 아쉽다고 했다.
차라리 이들은 <뚝!>하고 침묵하거나 <외다리로 서 있는 / 학>의 모습을 생각해 볼 일이었다. 이 때의 학은 <판단 중지>의 명상이 아니었을까.
(우이시,2003.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