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문학평론> 향가, 그 현대시로의 변용(1) / 헌화가, 서동요 : 박노준

洪 海 里 2005. 10. 31. 17:21

향가, 그 현대시로의 변용(Ⅰ)
-「獻花歌」「薯童謠」를 대상으로
박노준(한양대 교수)

Ⅰ. 머리말
 향가는 그것이 존재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문학사적인 의의가 대단한 것이다. 우리 문학의 원류이자 뿌리라는 점을 새삼 상기하면 이 점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향가의 또 다른 가치와 의의는 불과 14수에 지나지 않는 이 상고 시가가 후대 문학에 졸연치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 있다. 향가는 박물관 진열장에 갇혀 있는 유물과 같은 것이 아니다. 신라 이후에도 천년 세월을 꾸준히 움직이면서 새로운 장르를 접할 때 자주 그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해온 그런 노래다.
현대시와의 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이 점에 관해서 필자는 몇 년 전에 향가의 서정성, 비유법, 교술성 등이 현대시의 저변에 관류하고 있음을 거시적인 시각에서 짚어본 바 있다. 시의 정신면과 기법 등에 걸쳐서 향가와 현대시는 결코 무관한 사이가 아니고, 전통의 계승 차원에서 맥락 연결이 불가피한 관계임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양자 사이의 이런 同根性과 친연성 때문에 진작부터 향가는 이 시대의 일부 시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그러한 관심은 마침내 '향가의 현대적 재창작'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기에 이르렀다. 문학적인 성취도를 따지기 전에, 어쨌거나 현대 시인들이 일궈낸 이러한 작업은 향가로 하여금 우리 시대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였다는 점에서 특기해도 좋을만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그들이 생산해낸 '新 향가'가 아직까지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이 있다면 의당 그곳에 오르게 마련이듯, 문학 연구에서고 텍스트가 존재해 있는 이상 그것은 당연히 분석되고 논의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본고는 이런 점에 유의하면서 그 동안 하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예의 작품들을 고전문학 전공자의 입장에서 성찰하는데 목적을 둔다. 크게 욕심을 내어서 깊이 천착하기 보다는 작품일기를 통한 이해 위주에 무게를 두는 방법을 택하기로 하겠다. 14편의 향가가 모두 현대시로 재창작되었으나 이를 전부 다룬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고, 따라서 우선 「獻花歌」「薯童謠」이 두편에 대해서 살피기로 하겠다.
 현대시로 재창작된 것이지만 그것이 원래의 작품을 어떻게 수용 또는 변용시켰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전 단계로서 신라 향가에 대한 학술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따라서 필자는 본고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간략한 원전 해석을 마친 뒤, 그런 바탕에서 '현대시 헌화가 · 서동요'의 색다른 세계를 조명키로 하겠다.

2. 「獻花歌」의 경우
1)향가 「헌화가」의 본 뜻
「헌화가」는 신라 제 33대 聖德王 때에 이름을 알 수 없는 牽牛老翁이 지은 즉흥의 노래다. 산과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동해변을 무대로 하여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水路夫人과 견우노옹이 우연히 만나 잠시 수작한 끝에 지어진 「헌화가」는, 예사롭지 않은 메시지를 깔끔하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진작부터 널리 알려져 있는 서정시 계열의 향가다.
요새 말로 쉽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자주빛 바위 끝에 / 잡으온 암소 놓게 하시고 /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기록에 의하면 화자는 '암소 고삐를 잡고 있는 노인-不知何許人-건장한 徙者들도 감당하지 못한 折花의 어려운 일을 능히 해낸 인물'로 그려져 있다. 이렇듯 不可解한 인물 묘사는 「헌화가」가 과연 어떤 성격의 노래인지를 명쾌하게 규정짓는 일에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 禪僧이 부른 利他의 노래, 道家의 신선 또는 農神이 지은 노래라는 학설들이 나오게 된 것도 실인즉 예의 아리송한 이 노옹을 그렇게 성스럽고 신비스런 존재로 보지 않는다. 수로부인의 행차가 잠시 멈췄던, 그 부근 어느 곳에서 농사나 지으며 살고 있는 평범하고 순박한 농부였다고 생각한다. \'암소\'를 불교나 도교와 연결시키는 일은 무리한 짝짓기다. 농부가 소를 끌고 있는 장면은 결코 기이한 일이 아니다. 굳이 종교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또 어려운 일을 능히 해냈다는 사실에 사뭇 경악하고 있으나, 그 또한 과잉 반응일 따름이다. 그 근처에 사는 농부라면 비록 늙은 영감일지라도 인근 지형과 높고 험준한 산길에 매우 밝았을 터이다. 외제에서 온 종자들이 못 해낸 일도 그는 쉽게 해낼 수 있었다고 믿어야 한다. 무미건조한 해석에서 벗어난다는 취지에 따라 어렵게 해독하는 것만이 고전 연구의 능사가 아니다.
 따라서 「헌화가」는 성스럽거나 신격인 존재와, 인간의 수로부인과의 관계에서 생산된 노래가 아니다. 무명의 촌로와 귀부인과의 만남에서 잉태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노래' 라고 규정함이 옳다.
 산밑에서 饍을 마친 純貞公의 행차가 다시 강릉으로 향할 때 海龍이 나타나서 수로부인을 납치해간 사건이 발생하였다. '해룡'은 무엇인가? 그것도 '사람'을 상징한 것으로 풀이하여야 온당하다. 옛 문헌에 번다하게 등장하는 용을 그때마다 비인간적인 존재로 확대해석하면 우리의 과거는 온통 기이한 설화 속의 옛날로 변해버리고 만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용'은 어떤 신분이든 '사람'을 빗대어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헌화가」의 성격을 밝힐 때 두 번째로 유의하여야 할 점은, 이를테면 철쭉꽃을 매개로 하여 수로부인과 노옹이 서로 애정심을 나누었다는 식으로 풀이해서는 안되다는 점이다. 단언커니와 「헌화가」는 노옹 일방의 '짝사랑의 獻詩'다. 그것도 사랑의 고백이 직접 노출되지 않고, 그 心緖만이 작품 밑바닥에 조용히 관류하면서 암시되어 있는 그런 노래다. 이 점 관련기록을 훑어보면 쉬이 알 수 잇다. 수로부인과 노옹은 신분상으로 보나, 서로의 나이, 우연히 만나게 된 상황, 부군인 순정공이 그 옆에 있었다는 사실 등에 비추어 볼 때 서로 사랑의 불길을 태울 그런 형편이 아니었다. 단지 수로부인의 아름다움에 도취한 시골의 늙은 영감이 그 자신의 여러 처지도 잠시 잊고 상대방 귀부인을 마음속으로 짝사랑하면서 부른 가요일 따름이다.
「헌화가」의 원전 해석은 대략 이와 같다. 이 경계를 넘으면 곤란하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노래를 현대시로 재창작할 경우, 예기는 전혀 달라진다. 줄거리를 크게 바꾸지 않는 범위 안에서 오늘날의 정서와 언어 감각을 살려 재현시켜 놓는 일은 물론이고, 시인의 상상에 따라 원정의 일부를 바꿔서 변용시켜 놓은 작업도 가능하다. 어느 길을 택하든 고전의 현대화, 전통의 계승과 재해석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일단 얼마나 설득력을 확보하였는지, 또는 과거와 현대를 잇는다는 명분에 지나치게 사로잡혀서 과도한 발상에 견인되지는 않았는지 등은 별도로 검토해 볼 일이다.
 

2)수로의 미색, 그리고 노옹의 戀歌
「헌화가」가 현대시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매력 때문이리다. 含意를 내포하고 있는 노래와 거기에 얽힌 이야기부터가 눈길을 끌기에 족하다. 무엇보다도 노옹은 물론이고, 동해의 용마저 혼절시킨 '姿容絶代'의 주인공 수로부인의 미색과 언행은 매력을 끄기에 충분하다. 신라와 관련된 어느 문헌 기록을 보아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능가할 만한 여인은 없다. 그러니 수로부인이야말로 '신라 제일의 미녀' 요, '만인의 애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수로부인에게 가장 일찍이 매료된 시인은 徐廷柱다. 그는 산문(「하늘도 탐낸 美人 水路」)으로도 찬양했고, 시를 통해서는 무려 세 번이나 즐겨 연창하였다. 「老人獻花歌」(『新羅抄』수록, 1960), 「水路夫人의 얼굴」(『冬天』수록, 1968), 「水路夫人은 얼마나 이뻤는가?」(『鶴이 울고간 날들의 詩』수록, 1982)등의 시에서 우리는 未堂이 그려낸 수로부인의 빼어난 미모를 접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 하나,


암소를 끌고 가던 / 수염이 흰 할아버지가 / 그 손의 고삐를 / 아주 그만 놓아버리게 할 만큼 // 소 고삐 놓아 두고 / 높은 낭떠러지기를 / 다람쥐 새끼같이 뽀르르 기어 오르게 할 만큼 // (…)亭子에서 점심먹고 있는 것 / 엿보고 / 바닷속에서 龍이란 놈이 나와 / 가로채 업고 / 천길 물 속 깊이 들어가 버리게 할만큼(…)
-「水路夫人의 얼굴」일부

 이 시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도 미당은 원전의 테두리 안에서 수로부인의 아름다운과, 견우노옹이나 동해 용과의 관계를 진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헌화가」의 충실한 수용으로 일관하였음을 알게 한다. '미인을 찬양하는 新羅的 語法'이라는 부제가 이를 재확인해 준다.
 미당은 「헌화가」조에 기록된 여러 서사와 사건을 주로 수로부인의 미색을 드러내는 인자들을 해석하였다. "…할 만큼"의 대목이 반복되고, 또한 끊어짐에 따라 간결하고 산뜻한 美人圖를 연상케하는 위의 시는, 원전을 쉽게 풀어낸 「미당의 헌화가」라고 지칭하여도 좋으리라.
원래의 텍스트에서 완전히 벗어나 수로부인의 완미한 아름다움을 우회적으로 형상화시킨 것으로는 文孝治의 변용된 시가 있다.

벼랑은 높았다 / 내가 벼랑 밑에 다달아 / 네게 손짓을 보냈을 때 / 그러나, 정말 놀랍게도 / 너는 넌지시 / 시다리를 내려 보냈다 // 나는 혼신의 힘으로 너를 향해 기어 올랐다
-「나의 水路」5·6연

 시인은 시적 화자를 절대미를 추구하는 화가로 변신시킨다. 이 시에서 벼랑 끝의 꽃은 꽃이면서 또한 수로다. 무수한 행인들이 그 자태에 매료되어서 오르려 했지만 석벽 우의 꽃은 그들을 거부하고, 미를 표현할 줄 아는 화가를 보고는 그제야 그를 가까이 오도록 하기 위해서 "넌즈시 사다리를 내려 보냈다." 수로는 "아무런 빛깔이라도 스며들 수 있는 / 비어 있는 화선지로 펼쳐 있었다." (9연). 이를 보고 아름다운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화가는 "마침내 붓을 들고 / 되도록 진한 먹물을 / 흥근하게 먹여서 / 아, 힘을 주어 / 직 ― / 일필"을(9연)휘두른다.

네 몸뚱이는 순간 바람이 들어 / 공중에 둥실 떠오르는 / 샤갈의 그림이 되었다. / 공중을 쳐다보던 나는 / 아찔한 현기증으로 / 풍선이 되어 사라지는 / 네 모습을 보았다.
-같은 시, 10연

 이미 예술의 높은 경지를 이룬 화가의 손에 의해서 수로부인은 뜻밖에도 '샤갈의 그림'으로 돌변해 버린다. 「新水路夫人圖」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수로의 아름다움을 그 모습 그대로 표현해낸 것은 아니다. 그녀는 화가의 곁을 떠난다. 수로를 그려냄으로써 절대미의 경지와 예술의 완성을 꾀하려던 화가의 시도는 무참하게 무너지고 만 것이다. 수로의 미를 재현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절감한 화가는 벼랑을 내려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는 어쩔 수 없이 / 더듬더듬 벼랑을 내려왔다 / 다시 언젠가는 / 적막한 저 벼랑 위에 / 빈 화선지로 피어날 / 나의 水路를 기다리며
-같은 시, 끝 연

 이렇듯 실패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시인은 미당의 고지식한 형상법을 택하였으리라. 그렇다고 「나의 水路」를 평가절하해서는 곤란하다. 화가의 실패를 통해서 시인은 수로의 빼어난 미모를 역설적으로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그 속성상 찬양의 대상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로하여 마침내 일이 벌어지면서 새로운 화두로 전이되기 마련이다. 朴喜璡(신향가집『獻花歌』수록, 작품 「헌화가」, 1988)은 철쭉꽃을 '紅玉떨기'로, 수로부인을 '홍조가 떠오른' 여인으로, 백발의 견우노옹을' 홍안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인물로 그려 놓았다. 꽃이며 인물들이 모두가 '붉은 색'으로 채색되어 있는 것이다. '붉다'는 것은 무엇인가? 젊음이요 정열이요 수줍음이다. 이렇게 되면 그가 읊은 시에서는 견우노옹의 짝사랑은 더욱 고양되고, 이를 눈치챈 수로부인도 지체와 주변환경도 잠시 아랑곳하지 않고 야릇한 심정을 내비치면서 그에게 화답하는 모습을 취한다.

부인의 비취 팔찌가 무색하게 / 지금 그녀의 손에는 한아름 / 활짝 철쭉꽃이 불타고 있다 / 꽃을 바쳤을 때의 노인의 눈빛처럼
-「헌화가(獻花歌)」끝 연

 까발리지 말고 넌지시 암시해 주는 것이 시의 묘미요 미덕이라면 위의 대목은 거기에 꼭 합당한 것이리라. '노인의 눈빛'에 동화된 수로의 심사가 어떤 것인지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헌화가」가 더 이상 '짝사랑의 헌시'가 아님을 박희진은 미세한 변용을 통해서 슬며시 말해주고 있다.

한없이 / 맑은 / 空氣가 / 요샛말로 하면 ― 그 空氣가 / 그들의 임과 귀와 눈을 적시면서 / 그들의 말씀과 수작을 적시면서 / 한없이 親한 것이 되어가는 것을 / 알고 또 느낄 수 있을 따름이었다.
- 「老人 獻花歌」, 끝 연

 느낌으로도 혹은 文理로 보아서도 두 남녀의 마음이 하나의 꼭지점에서 만나, 서로 친화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암시해 주는 대목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미당도 아름다움의 찬양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이렇듯 변용의 어법을 통해서 두 남녀가 함께 나누는 애정의 시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도 박희진과 마찬가지로 드러내놓고 진술하는 식으로는 읊지 않았다. 독자에게 눈치로 암시하듯, 그렇게 여운을 남기면서 노옹과 수로가 순간적으로 품었던 정감의 세계를 포착해 내는 기법을 원용하였다.
 앞에서 소개한 문효치도 그 일원인 '震檀詩 同人''(權千鶴·金圭和·유승우·朴鎭煥·申奎浩·林步·鄭義泓·洪海里)들의 일련의 작품들은 고전을 동일 테마로 하여 각기 가양한 내용으로 재창작하였다는 점에서 일단 주목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진단시 동인 테마시집 『서동에서 등잔까지』,1991). 이제부터의 성찰은 주로 이들의 群唱에 모인다.
 "자용절대'의 미모를 갖춘 여인이고 보면 뭇 남정네들의 마음을 설레게하였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三國遺事』에서는 젊은 장정이 아닌 '노옹'을 등장시켜서 그로 하여금 신라 최고의 미인에게 혹하도록 서술하고 있다. 그 숨은 의도는 아마도 늙은 영감마저 저토록 미혹할 정도이니 장정들이야 오죽했겠느냐는 뜻일지도 모른다. 「헌화가」가 마침내 「慕水路夫人歌」類로 그 본색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 데는 이런 국면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변용을 시도한 일군의 시인들의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먼저 유승우의 노래를 읽기로 하자.

 그리움을 씨뿌리고 싹틔워 푸르게 가꿔야 할 내 가슴속 언덕에 오오랜 가뭄이 들어, 쇳소리 같은 먼지만 풀썩이고 메마른 바람이 내 사내로서의 뿌리를 말리며 언덕을 기어오르고, 하얗게 눈이 먼 그리움들이 바람의 펄럭이는 손 끝에서 마른 가랑잎처럼 아프게 그대를 부른다. 그대를 부른다. // 물길 트이듯, 물길 트이듯 그대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라.(…)
-「수로부인 연가」일부

 화자는 사랑과 욕정에 목말아 하는 남자의 단내나는 목소리로 수로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 남자는 수로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서, "내 사내로서의 뿌리를 말리며"혼신을 기울이면서 언덕을 기어오른다. 언덕에 피어 있는 철쭉꽃, 그것을 남자는 수로부인의 풍만한 육체로 치부한다. 그리하여 겹겹이 쌓여 있던 "하얗게 눈이 먼 그리움들이"맹렬하게 움직이면서 "아프게 그대를 부른다." 반복해서 부르는 소리를 물길〔水路〕이 시원스레 트이듯, 그렇게 "그대 내게로 오라"는 뜨거운 하소연이다.
 이에 이르러 신라의 「헌화가」는 함의의 베일을 벗고 화자의 속내를 적극적으로 밝힌'戀歌'로 탈바꿈한다. 단순한 수용이 아닌 완벽한 변용인 것이다. 앞에서 예시한 시들과도 전혀 다른 언술이다.
 金圭和의 「水路夫人」은 <꽃길><물길>의 2부로 짜여져 있다. 그 가운데서 전자는 화자인 견우노옹의 사모와 연정의 심경을 옮겨 놓은 것이다.

나 이 꽃을 따 / 수로부인. 그대 손에 쥐어주면 / 바위 / 절벽으로 이어진 철쭉꽃 등성이 / 바다 / 그사이에 난 허연 行旅길 / 걸어가는 그대 / 흰 이마 칠흑머리 / 그대 원한다면 / 절벽에 떨어져 죽어도 / 그대 손에 꽃 쥐어주면 / 나의 行旅는 이루어졌네 / 다 꼭 알맞게 부풀은 事物이 / 耳順을 놓고 바라던 / 나의 완성이네 / 웃는 꽃이네
-「水路夫人」1.<꽃길>중간 부분 이하

「헌화가」의 가사는 빠지고 그와 관련된 기록만을 시로서 형상화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기록의 복사가 아니라 시인이 간파한 견우노옹의 심정을 새로이 첨가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이 시는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한다. 수로부인이 원하는 꽃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면 자신의 인생 행려는 완성된 것이라고 진술하는 이 대목에서, 우리는 화자의 생명과 생애를 건 연모의 심경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하며 절대적인지를 일깨워 준다.
權千鶴도 수로에게 넋을 잃고 있음에서는 위의 시인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소 특이한 국면을 새로이 드러내려고 하였다.

누가 알랴/ 황홀을 꿈꾸는 내 순수의 기다림을 // (…) // 두견이 몇 마리 날아와 / 헛울음 토해내는 꽃그늘 속에 / 길 잘못든 짐승들을 달래어가며 / 진다홍 얼룩을 지우다보면 / 설핏 저무는 봄 / 그 섧은 빛깔 속에 감추어진 내 기다림을 / 누가 알랴 // 분홍빛 그리움으로 / 꽃국 끓여대는 봄기슭 / 내, 속깊이 타오르는 봄을 누가 알랴.
-「水路夫人」1. 첫 부분과 중간 부분 이하

 시인은 「헌화가」를 부르며 折花의 길에 오르기 이전의 견우노옹의 심리를 그리고자 하였다. 그런 심리를 그는 순수한 기다림으로 설정해 놓았다. 앞에서 읽은 시들과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외부로 토해내는 열정이 아니라 안으로 끌어안으려는 內燃의 연정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봄이란 모든 것이 소생하는 계절이여 만물이 제 짝을 찾아 환희를 즐기는 계절이다. 이 계절에 노옹은 수로와 만나는 황홀한 꿈을 꾸며 '설핏 저무는 봄 / 그 섧은 빛깔 속에" 순수한 기다림을 감추고 있다. 끝 연에 이르러 화자는 봄을 맞아 깊은 내면에서 타오르는 소리 없는 열정을 자신 외에 그 누가 있어 짐작이나 하겠는가라고 애를 태운다. 「향가 헌화가」는 우리 시대에 이르러 이런 유형의 내성적인 시로도 바뀌었다.

3)恣女 수로부인의 세상 휘집어 놓기
「헌화가」의 기록에 따르면 그때 수로부인은 미의 화신으로 시종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을 뿐,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좌우의 종자들을 향해 "저 꽃을 꺾어다 줄 사람은 누구일까?" 라고 짧게 물은 것과, 동해 용에게 납치되었다가 풀려 나온 뒤 바다 속의 산해진미가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의 음식맛과는 전혀 딴판이라고 전해준 것이 고작이다. 따라서 사랑에 관한 한 그녀의 속내를 알아낼 단서는 전혀 없다.
 그러나 현대에 다시 태어난 수로는 신라시대의 그녀가 아니다. 시인들에 의해서 여러 모양으로 재생되고 변용된다. 이를테면 견우노옹 이상으로 그녀도 사랑의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외치거나, 심지어는 추한 모습으로 타락하는 존재로 바뀐다. 앞의 장에서 살펴본 미의 찬양과 으레 그러려니 하는 느낌이 주류를 이루지만, 이장에서 듣게 될 수로부인의 생각과 언술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서 일단 시적 긴장과 더불어 그 타당성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한다. 먼저 朴提千의 시 (『달은 즈믄 가람에』수록, 1984)부터 읽기로 하자.

하늘에서 떨어져 흩날리는 꽃잎들 사이로 /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가는 덫을 보았다 / 덫에 갇힌 꿈의 얼굴이 눈물에 젖어 번쩍이고 있었다 /아득한 벼랑 위에 한 무더기 꽃으로 피어나 있었다 / 돌아와 다오 소리쳐도 그 소리마저 돌아오지 않았다 / 뿌리째 뽑힌 한 아름의 붉은 철쭉꽃이 / 풀려날 길 없는 덫을 이끌고 水路夫人의 철쭉꽃이 온하늘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水路」전문

 시인은 수로와 관련된 기록을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해석하고 그런 바탕 위에서 꿈과 현실의 갈등, 또는 현실의 억압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읽어낸다. '덫'은 신분의 덫이자 윤리의 덫이다. "아득한 벼랑 위에 한 무더기 꽃으로 피어나" 있던 수로의 꿈은 그 덫에 갇히고, 그로 인하여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젖는다. 신분의 덫, 윤리의 덫은 " 풀려날 길 없는 덫"이기에 꽃으로 상징되는 수로의 꿈은 뿌리째 뽑힌다. 결국 수로부인의 꽃―꿈은 온 하늘은 떠돌아다니면서 슬픔에 잠긴다. 덫에 걸린 理想으로서의 사랑은 마침내 붕괴되고, 그것을 향한 꿈만 허공은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인이 일궈낸 성과는, 지금까지 짝사랑의 우상으로만 대접을 받았던 수로부인으로 하여금 그녀 역시 사랑의 고뇌에 빠지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수준의 변용은 충분히 납득이 된다.
 그러나 다음의 것들이 문제다. 다시 '진단시 동인'의 작품으로 이어진다. 申奎浩에 의해서 수로는 남정네의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恣女로 변신된다. 고뇌의 덫, 윤리적인 정숙의 덫에서 탈출한 그녀는 이제 무슨 말이든 거침없이 토해내는 그런 여인으로 변한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까짓것 맘 몽땅 주어 한 번 사랑할라치면 / 살상이, 조무래기, 겁쟁이, 얌체 / 졸개 나부래기 가지고야 어디 될 법이나 하랴
-「당돌한 실수」, 첫연

 이렇게 시작되는 신규호의 시에서 수로는 "하늘나라 꼭대기의 꽃이나 짐짓 탐내는 / 당돌한 실수를"(5연) 저지른다. 그 까닭은 "바다나 태산 같은 호걸들이 순정을 몽땅 바친다는 것 / 천년 전에 벌써 잘 알아차렸던 수로"(10연)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探花蜂蝶'은 여자를 탐내어 찾아가는 남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을 시인은 뒤집어 해석해서,  (貧)花'의 수로는 끝내 '耽(好)色'의 여인으로 둔갑시켜 놓았다.

까짓거 사내가 사랑이란 걸 한번 하려거든 / 제일 멋진 산이나 바다의 마음을 사로잡아 넋빼놓을 / 그런 위대한 실수를 터억 저질러 보라고
-같은 시, 끝 연

 이 대목을, "내 수컷을 끊임없이 충동질하고"(1연) 운운한 색정을 연결시키는데 아무 지장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당돌한 실수란, 그녀가 저지른 유혹에 넘어가 순정을 몽땅 바치는 남정네의 불륜의 사랑이다. 그러기에 수로는, '목숨 건 천하 한량이나 차지할 수 있는/폭죽 같은 위험한 정열을/ 싸늘한 미소 뒤에 감춘 도도한 미인'(7연)으로 변모되어 오늘날의 그 어느날 음란한 여인에게도 뒤지지 않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역사와 설화에 등장하는 여인의 미색은 대개 고즈넉한 정절로 일관할 수 없다는 사례를, 이 시인은 변용된 시로서 증험해 주려고 한 것은 아닐까?
鄭義泓의 시에서도 수로는 놀라운 모습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나서 요즘 세상을 날카롭게 비꼬는 얘기를 쏟아낸다.

파도여, 나도 바람이 났느냐 / 서로의 혓바닥을 핥고, 몸을 뒤틀며 / 무서운 힘으로 나를 강간하곤 / 하이얀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채 / 그냥 쓰러진 파도여 / 너의 성난 몸짓을 보면 / 웬일인지 나는 바람이 난다.
-「수로부인의 고백」, 첫째 연

 시작부터가 심상치 않음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그녀를 강간한 '파도'는 무엇인가? "…가난한 풀잎들을 / 짚밟고 일어선 거룩한 사내들을 / 내 맘 속에 오래오래 걸어두고 싶다 / (…) / 바다보다 더 타락한 힘 있는 자들의 / 걸음걸이는 바라보면 / 웬일인지 나는 바람이 난다" (끝 연)라고, 표독하게 쏘아댄 것을 보면 파도는 권력을 거머쥔 자의 푱상일 터이다. 그런 권력에게 정조를 빼앗긴 수로는 자학의 길로 접어들면서 바람난 여인으로 돌변한 것이다.
그러나 수로는 자학하는 여인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이미 강간에 의해 욕정과 함께 횡포까지도 알아버린 수로는, "내 비록 귀족이라 하지만 ? 요즘 사람처럼 죄지은 일이 없다"(3연)라고 천명하면서 현대인의 부정과 부조리, 권력과 성욕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여성을 풍자하고 꼬집는다.

너의 육체처럼 부풀어오른 / 권력의 깃발을 흔들고 싶기도 하고 / 힘께나 쓰는 남정네를 만나면 / 침실 속의 동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 …) // 이 딸에 일어서는 거짓같은 부정을/ 말하자면 도둑 지키는 경비원 모집에도 / 몇십만원 짜리 수표에 / 피눈믈을 얹어 보내야 하는 몸짓을 / 파도여 너도 들었느냐 / …사내의 그것마냥 버릇없이 솟는 바위 / 벼랑 끝 핏자국처럼 핀 꽃들을 위해 내 음탕한 맘을 불사르고 싶다. …
-같은 시, 2·4·5연

 한번 짓밟힌 그녀는 일견 제정신이 아닌 듯하다. 창녀로 추락한 그녀는 "힘께나 쓰는 남정네를 만나" 색욕에 빠지고 싶어하면서 지금 이 딸에서 일어나는 치사하도록 더러운 부정을 자신이 당한 상처와 연결시키면서 폭로하고 비난한다. 격정과 격분을 이기지 못하는 푼수로 보아서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비춰졌으나 실은 그것이 아님을 그녀가 토해내는 독설의 진실은 듣고서 곧 깨닫게 된다. 정의홍이 만들어낸 수로는 이렇듯 일견 제정신을 잃은 듯하지만 그렇지 않은 타락한 여인, 어쩔 수 없이 세태 풍자에 뛰어든 자학적인 여성 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창녀 수로'는 洪海里에 의해서도 출생된다. 그는 7부 연작시를 통해 인간의 내면 세계에 잠복해 있는 성적 욕망을 철저하게 파헤쳐 낸다.

(…)온 몸에 불이 달아 / 싸돌던 여인 // 젊은이 / 늙은이 // 낮은 사내 // 높은 사내 // 제 서방 // 사내란 사내는 모두 / 수컷으로 만든 // 창녀중의 창녀 / 천사창녀여 !
- 「水路여 水路여」 하나, <자화상 또는 타화상>일부

 수로의 '자화상'이라고 했지만 실인즉 신라 때의 자화상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요컨대 그 시대의 미색이 세월을 뛰어넘어 추락하고 굴절되어서 현대 여성에게 투사된 자화상이자, 뭇 사람들도 그렇게 인지하고 있는 '타화상'이다. 어쨌거나 이 시대의 수로는 "사내란 사내는 모두 / 수컷으로 만든" 골수 창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위에서 이미 언명한 바이지만, 여성의 뛰어난 미모는 자칫 타락할 위험 요소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이 시인도 이런 국면을 간과하지 않았다고 짐작한다.

수로여 / 서울 수로여 / (…)종로 뒷골목 / 강남 새 거리 / 어둡고 깊은 이 거리마다 / (…) / 눈 멀고 귀먹은 사내들 / 바보 바보 또 바보들 / (…) / 정신 못 차리네 / 쪽을 못쓰네 / 죽네 죽네 / 죽을 뿐이네.
-같은 시, 셋, <서울 수로>

 창년 수로가 마침내 서울에 나타났다. 서울이 어떤 곳인가? 종로 뒷골목과 신 도시가 과연 어떤 장소인가? 환락·퇴폐· 유흥·섹스가 난무하는 썩은 도시, 광란의 장소가 아닌가? 유감스럽게도 '國終亡'(「處容歌」관련 기록의 한구절)의 불길한 예감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곳이 아닌가. 이렇듯 가뜩이나 어둡기 짝이 없는 여기에 창녀 중의 창녀인 수로가, 마귀와 멸망의 화신과도 같은 수로가, 마치 여왕처럼 나타나서 제딴엔 이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뽐내고 있는 바보, 병신 같은 우리 시대의 어리석은 머저리글을 섹스로 족쳐대고 있는 것이다. "쪽을 못 쓰네 / 죽네 죽네 / 죽을 뿐이네"라는 비속한 소감을 피력할 정도로 저들의 지위와 허위의식에 가득찬 인격과 교양을 수로는 파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읽은 것만으로도 그의 시 전체를 헤아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끝 부분만은, 제 6부분까지 이어지는 추악한 현실의 들춰냄에서 탈출하여 마무리 삼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시인의 메시지가 수용되어 있는 것이므로 일별하기로 한다.

사랑 하나면 / 세상도 버리기 위하여 // (…) // 온 천지를 돌아 / 피는 꽃 다 모으기 위하여 // 모래밭에 맨발로 / 학춤을 추기 위하여 // (…) // 세상이 천이라도 / 사랑을 버리기 위하여
-같은 시, 일곱, <포기 연습>

 사랑이라면 오직 그 하나를 위해서 세상도 쉽게 버리는, 이 시대의 어지러운 풍속을 청산하고 오히려 사랑을 버리고 천의 세상을 얻으라고 강조한다. 그때를 위하여 겉으론 자못 아름답고 고고하게 느껴지는 사랑일지라고 포기하는 연습을 미리 해둬야, 역설적이게도 진정 아름답고 숭고하며 영원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으로 이해된다.
 결국 홍해리는 '창녀 수로'의 방탕함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요즘 여인네와 사내들의 성문란을 빗대어 고발하더니, 끝단계에 이르러서는 교술성이 강한 언술로 마무리짓는다. 거침없는 폭로와 은근한 충고, 이 두가지가 교직되어 그의 시는 흥미와 충격, 그리고 엄숙한 자성을 독자에게 전한다.
 따지고 보면 앞의 신규호와 정의홍의 시도, 단순히 수로의 음란성을 드러내어서 황폐화된 지 오래인 현대여성의 성적인 타락성을 꼬집고 풍자하는 것으로 자족하였다고는 풀이되지 않는다. 홍해리처럼 끝부분에서 명시적으로 진술하고는 있지 않으나 그 밑바탕에는 교훈성이 깔려 있다고 본다. 그것을 읽어내는 일은 독자의 몫이다. 이런 측면에서 성찰한다면, 고전의 현대화는 어느 것이나 의도성이 없이 그냥 재창작되는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달을 수 있다.

4)이야기 형태의 「헌화가」
 지금가지 살펴본 '현대시 헌화가들은 그 대부분이 비록 변용되고 각색되었을지라도 화자의 정감을 서정시로 표출하고 있다는 접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제부터 일고자 하는 2편의 작품은 형식상으론 서정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진술방법이 '이야기'식으로 진행되고 있어서 전자와 구별되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朴鎭煥의 「獻花歌 散調」는 이를테면 마당놀이의 대본을 연상케 하는 작품인데 7부작으로 짜여져 있다.
 시인은 수로를 신라의 마돈나로, 失名(견우)老人을 '失名老人'으로 대체 시켜 놓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名'을'明'으로 치환시킨 것을 보면 앞으로 일어날 일이 예사롭지 않음을 암시한다. 실명노인은 少時 적에 수로의 머슴이었다. 그는 수로의 남편이 될 화랑인 純貞公보다 더 고운 純情을 그녀에게 바친다. 이 경우에도 '純貞과 음이 같되 뜻이 다른 '純情'이라는 단어로 치환시켜 놓고 젊었을 때 수로를 향한 실명노인의 청순한 연정이 누구보다도 우월하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혼을 앞두고 이 소문을 들은 순정공은 칼을 뽑아들면서 결투를 청한다. 그러나 화랑의 계율을 어길 수 없어 젊은 머슴의 목숨 대신 두 눈을 도려낸다. '失名'은 이렇게 해서 생긴 이름이다. 눈 먼 머슴은 쫓겨나서 노인이 되도록 까지 세상에 떠돌다가 수로가 태수의 부인으로 강릉에 온다는 소식을 바람결에 듣고 길목을 지킨다. 아주 먼 옛날에 품었던 짝사랑의 열정은 조금도 변질되지 않았던 것이다. 철쭉꽃과 얽힌 그 뒤의 일은 옛 문헌에 나오는 그대로 진행된다.

玉같이 둘리는 水路의 음성 /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듯도 하여 / 나이도 신분도 그만 다 잊고 / 찌른 벼랑 기어올라 / 꽃을 꺾었지 // (…) // 미움도 한 많음도 / 꽃에 아물고 / 사랑도 슬픔도 꽃에 아므니 / 꽃다발은 純貞 아닌 / 純情의 증표
-「獻花歌 散調」6부의 일부

 시인은 그의 사설을 여기서 끝내지 않는다. 마지막 7부에서 그는 같은 시절 서야으이 미의 여신인 제우스의 헤라를 둘러싸고 일어난 트로이전쟁의 혈전을 상기시키면서 아래와 같이 읊는 것으로 그의 시를 마무리짓는다.

허나 신라인이여 / 사랑 위해 스스로를 줄 줄 알고 / 칼 대신 꽃을 꺾어 바칠 줄 알던 / 오오 신라 남정네여 // (…) // 失名老人이여 / 純貞 아닌 純情의 꽃다발을 꺾어서 바친 / 영원한 戀歌 / 老人 獻花歌여
-같은 시, 끝 부분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는 무엇일까? 신분 질서의 압박으로 패배한 사랑의 비극이지만, 그런 질서에 대하여 복수심을 품지 않고 끝내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신라 늙은이의 넉넉한 순정을 드러내고자 한이었을 터이다. 나아가 피와 살육으로 점철된 서양의 문화에 대응되는 화해와 관용의 신라 정신을 부각시키려는 뜻을 담아내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林步의 「水路夫人의 戀史」는 제목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수로의 사랑편력을 서술해 놓은 시다. 앞의 절에서의 그녀는 현대의 창녀로 태어나서 막말을 토해 내지만 여기서는 무대를 신라 당년으로 설정해 놓고 고상한 연정에 빠진다는 점에서 전자와 다르다.
 다른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 내고 수로뿐만이 아니라 견우노옹까지도 원래의 텍스트에서와는 전혀 다른 역할을 담당케하고 있어서 이도 새로 꾸며낸 이야기류의 '헌화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서두를 보기로 하자.

 三國遺事에 依하면 水路는 平素 方丈山 雲虛寺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는 紫巖尊師의 說法을 즐겨 들으려 함이더라. 水路가 夫君 純貞公을 따라 任地로 가던 중, 方丈山麓을 지나며 紫巖을 못잊어 詩 한수를 지어 이를 전하려고 使者를 구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거늘 자나가는 牽牛老人을 붙들어 은밀히 청하더라.
-「水路夫人의 戀史」첫 연

 이와 같은 산문기록이 세 번이나 거듭되고 그 어간에 수로와 노옹의 시가 나온다. 『삼국유사』의 전승형태를 그대로 밟고 있다는 점도 다른 시인의 기법과 구별된다. 실재하지도 않은 『三國遺事』를 창안해낸 것부터가 허구다. 허구는 '雲虛寺의 紫巖尊師'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헌화가」의 첫 句인 '紫布巖乎迂希'에서 축자되 紫巖은 '자주빛 바위'가 아니라 의인화의 기법에 따라 새로 창조해낸 인물이다. 그가 거처한 '雲虛寺'는 아예 문헌기록에는 있지도 않은 시인이 만들어낸 절집이다. 이 허구적인 尊師가 곧 수로의 연정의 대상이고, 「헌화가」를 지어서 오늘날까지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견우노옹은 신분이 더욱 하락하여 우편배달부가 되어서 方丈山을 오르내리는 인물로 등장한다. 모두가 다 거짓말이다.

온 산과 들히 / 가람되어 / 나를 따르는데 / 그대 붉은 바위 / 홀로 올올함은 // 前世에 / 심은 恨 / 사랑으로 / 태움인가? // 아소, 님하. / 이승에 못닿을 사랑이면 / 만길 바닷물결 끌어다 / 이 가슴 / 메우고져
-「水路夫人의 戀史」 중 <수로의 詩>, 2·3·4연

 변죽만 울렸다고 볼 수 있는 견우노옹의 「헌화가」는 수로부인의 「慕紫巖尊師歌」에 이르러서 이렇듯 간절한 연정시로 면모를 일신한다. 평소 자암과 교우하여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인 견우노옹은 기꺼이 使者가 되어 수로의 시를 자암에게 전했으나 그로부터 화답을 받아내지 못하자 그는 "멋적어 철쭉 한 가지를 꺾어 그녀에게 바치며"노래를 부른다.

紫巖 곁에 / 모시던 손 // 이제 암소 먹이는 일도 / 다 그만두고 // 날 두렵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 곶 것거 / 받드리이다
-「水路夫人의 戀史」 중 <노옹의 시 > 전문

 시인은 이어지는 산문기록의 허두에서 "이를 後世 사람들은 獻花歌라 이르더라" 운운하고 있다 「新獻花歌」가 임보에 위해서 새로 창작된 것이다. 그러나 詞意는 전혀 다르다.
시인의 상상력과 말솜씨는 『삼국유사』의 기록 전문을 현대시로 옮기고자 하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는 수로가 海龍에 의해서 납치된 사건을 다시 패러디하는 작업에 손을 댄다. 산문식으로 서술된 내용의 줄거리인즉 끌던 소도 버리고 수로의 일행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계속 남아서 길을 재촉하던 노옹이 侍從들이 잠든 사이 밤에 몰래 부인을 업고 운허사를 향해 달려가고, 이 때 "마침 그믐달빛에 눈을 씻던 紫巖이 문득 그 氣를 잡자 長衫으로 산등성이를 내리치며 날아와서 水路를 앗아 黑龍洞 巖窟 속으로" 사라진다.
 이쯤에서 작품의 해설은 끝내기로 하자. 그러면 이 시인은 왜 이런 식으로 原 텍스트를 완전히 바꿔서 각색된 작품을 지어냈는지,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할 차례가 되었다. 해답은 간단하다. 즉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이성에 대한 열애와 성적 욕망, 현실과 성욕 사이의 갈등과 그 해소를 통해 본능의 순수성을 부각시키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이 점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시인은 고승대덕인 자암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 내어서 그로 하여금 마침내 여색에 빠지도록 처리하였다. 자암존사가 그렇다면 미색을 갖춘 속인인 수로야 더 말할 나위조차 없다는 시인의 사고가 그의 작품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5)'현대시 헌화가'에 대한 논평
 현대시로 재창작된 '헌화가'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제 이 물음에 해답을 내놓을 차례가 되었다.
 우리는 '현대시 헌화가'의 시작을 수로부인의 미색이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를 살피는 일에서부터 출발하였다.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한다.
 원전에 충실한 미당의 시와 변용과 역설의 기법에 의한 문효치의 시는 각기 나름대로의 시적 성취를 일궈냈다고 평가하고 싶다. 원래의 텍스트나 컨텍스트에 전적으로 매달리다 보면 시적인 긴장감이나 별미를 상실하기가 십상이다. 그럼에도 미당은 깔끔한 구성과 언어감각을 살려서 마침내 '현대시 헌화가'의 '古典'을 창조해냈다. 노옹 일방의 짝사랑의 노래에 수로부인도 슬쩍 편승케 한 「노인 헌화가」 또한 옛 詩歌가 현대의 시간대에서 어떻게 고전으로 남게 되는지를 밝히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문효치의 것은 미당과 전혀 다른 방법을 택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수로의 아름다움을 구상화시키지 못하였다. '脫 텍스트의 미완성 미인도'라는 점에서 그의 시는 고전을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마당과 대척적인 위치에 놓일 수 있다. 천하의 명산을 보고서도 시 한 줄 짓지 못하고 하산한 옛 시대의 시인묵객을 연상하면 이 점 쉽게 이해된다.
 박희진의 「헌화가」는 원래 향가작품을 국문학자들의 건조하고 난삽한 해석에서 해방시켜 문학성도 가미된 쉬운 현대말로 풀어서 대중화시키고자는 데 창작의도가 있다. 따라서 그도 미당과 마찬가지로 원전을 토대로 번안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다만 미당과 다른 점은 언술이 상대적으로 느슨한 것이고, 그가 일궈낸 결실은 이미 천명한 바 "학자들의 노력에 더하기 알파"요 그리고 수로부인으로 하여금 남성의 연정을 설핏 느끼게 한 그 청순한 변용이다.
 짝사랑의 대상인 수로를 향해 목이 마르도록 부르면서 사랑을 고백하거나 불타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점에서 유승수 ·김규화·권천학의 시는 모두 수평선상에 놓인다. 짝사랑의 가슴앓이를 마침내 밖으로 토해내도록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의 시는 향가의 진전된 현대적 변용으로 이해함이 마땅하다. 격정에 넘치는 언술도 탓할 것이 못되며, 이런 수준의 변용이 일정한 선을 넘었다고 보아도 곤란하다. 예사로운 육성의 밋밋한 느낌을 상정하면 쉽게 짐작될 수 있다. 세 시인에 대한 논평은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미당의 「노인 헌화가」와 박희진의 「헌화가」에서 은근하게 피어난 수로의 분홍빛 연정이 박제천의 「수로」에 이르러서 결국 성사될 수 없는 이상으로서의 사랑으로 마무리된 것은 매우 합리적인 처리라 하겠다. 시의 일부 또는 전체로서 형상화시켜 놓은 수로의 사랑은 이 세 시인이 부른 노래가 가장 적절한 변용이 아닌가 싶다. 그년의 사랑을 무리하게 확장시키면 공감과 함께 비판이 뒤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고전의 현대화에서 전통적 이미지와 창조적 이미지의 기능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불 필요가 있다. 전자가 특정한 시대의 사회와 역사적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면, 후자는 그러한 역사성과 사회성을 뒤집는 개인적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리가 바라는 고전의 현대화는 이 두가지를 조화시켜서 새로운 시의 경지를 창조해내는 것이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하여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일일 것이다. 어느 경우든 반드시 유념해야 할 점은 전통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개인적 차원의 창조적인 상상력의 방향이 바르게 설정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고전의 현대적 수용이나 변용은 어려워진다.
 이런 점을 상기하면서 위에서 예시한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면 후하게 평가를 내린 시들도 안타까운 인이나 '전통+창조'에 귀속시킬 수 있는 노래는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모두가 두가지 중 어느 하나에 치중하는 것으로 자족하는데, 그 가운데는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전통의 복제 또는 창조적 이미지의 과잉현상으로 흐르고 말았다는 점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정도는 요컨데 양호한 편이다. 그 바께의 시들이 문제요 얘기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수로를 恣女로 변신케 한 뒤 온갖 음란한 성행위를 자행토록 한 일련의 시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신라의 「헌화가」를 요즘의 방탕한 사회적 상황과 연결시켜서 풍자하고 경종을 울리고자 한 시인들의 사려 깊은 창작의도를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이런 점만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재창작해낸 작품에 대해서 시비를 걸 이유를 찾지 못한다. 수로가 창녀 중의 창녀로 다시 태어날 줄 누가 알았는가? 환락가를 휘집고 다니며 호색의 남성들을 농락할 줄 누가 예상이나 했는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시대의 성적인 타락성을 새삼 떠올리면 그러한 변용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통쾌한 패러디인 것이다. 섹스에 눈이 먼 탕아, 탕녀들이 미친 듯 날뛰는 거리에 수로가 배꼽티를 입고 암내를 풍기면서 화려하게 등장한 것이 얼마나 상쾌한 일인가? 그녀가 쏘아대는 비난과 풍자, 그리고 비수와도 같은 함축된 교훈의 소리를 듣는 우리는 그나마 얼마나 행복한 그녀의 후손들인가. 우리시대의 「헌화가」는 이런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변용된 「헌화가」가 모두 바람직하게 창작되었다고 논단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재고를 요한다. 신라의 최고 미녀를 그 지경까지 추락시킬 필요가 과연 있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옛시대의 아름다움을 고이 자키지 못하고 이를 파괴시킨다는 것은 요컨데 우리 스스로가 귀중한 문화재를 깨뜨리는 행위와 마찬가지다. 그녀를 통해서 꼭 우리사회의 타락한 성윤리를 비판하고 질타할 양이면 굳이 그를 '창녀'로 태어나게 해서 가뜩이나 추잡한 이 세상을 휘집고 다니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예의 역할과 기능을 감당케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었으리라 믿는다. 시인들의 과감한 변용을 이해하면서도 또한 아쉬워하는 이유가 그들의 의도성과 목적의식이 너무 지나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성향의 시들을 張伯逸은 매저키즘의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징은 작품 일기의 결론이면서 또한 그 전체이기도 하다. 뭇사내에게 서슴없이 꽃을 꺾어 달라고 요구하고 그렇게 해서 꺾어온 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받은 행위를 놓고 볼 때 그녀에겐 처음부터 요부적, 애정도착증의 징후가 이미 보인다고 하였다. 재창작된 작품을 매저키즘의 시각으로 일어낸 그의 해석에 우리는 동의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접하게 되는 수로부인의 예의 언행을 그녀의 색정도착으로 연결시킨 그의 논리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다만 그러한 언명이 '전체로서의 논거'가 아니라 \작품 읽기의 결론'으로 끝난다면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존중해도 무방하리라 판단된다.
 다음으로 지적코자 하는 것은 이야기식의 재창작이다. 산문기록을 거느리고 있는 향가이므로 이러한 창작방식을 철저하게 차단할 이유는 없다. 특히 「헌화가 산조」끝 부분에서 읽게 되는 신라정신의 우월성, 「수로부인의 연사」가 보여주고 있는 原 텍스트 형식의 계승 및 격조 높은 수로의 시와 여운을 남기고 있는 노옹의 시는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점이 있다. 시와 그 관련 컨텍스트를 이렇듯 '소설짓기'에 편입시켜도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은 곧 그들의 시는 시의 형식을 취했을지라도 이미 시가 아닐 수도 잇다는 견해와 일치한다. 가령 적층문학인 「춘향전」을 예로 들자면 이를 현대소설로 재창작하는 데 아무 무리가 없다. 한양에 올라간 이도령으로 하여금 백수건달의 싱세가 되게 하거나, 변학도의 강압에 못 이겨 춘향으로 하여금 그의 첩이 되게 하는 일 등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헌화가」의 경우는 그와는 다르다. 관계기록을 수반하고 있지만 그것은 폐일언컨데 구비전승의 산문이 아니고 엄연한 시다. 순정공을 화랑으로, 견우노옹을 수로의 소시적 머슴으로 바꿔놓고 그들로 하여금 투쟁케 하여서 한쪽을 실명시킨 뒤 평생을 유랑케 한다든가, 견우노옹은 뒷전으로 물러나게 하고 자암선사라는 새로운 인물을 등장케 하여서 수로와 통정케 할 수 있는 그런 장르가 아니다. 그렇게 만들어 낼 절실하고 절박한 사정도 실은 없다고 풀이된다. 신라정신의 우월성이나 인간의 본능문제를 부각시키고자는 의도라면 다른 기법과 발상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恣女 수로'와 '소설류의 헌화가'가 나오게 된 경위를 밝히자면 위에서 언급한 바 고전에 담긴 전통적인 이미지에 대한 지나친 자의적 해석과 방향설정을 잘못한 창조성의 실패를 들어야 할 것이다. 흥미·풍자·교훈의 긍정적인 측면도 이런 원론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대충 이런 점들이 '현대시 헌화가'에서 시비거리가 될만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고전의 현대적 변용의 한계와 연결된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4장 마무리에서 다시 첨언할 기회를 갖기로 하겠다.
(『시안』창간호,1998.가을)
 

 

薯童謠

 

洪 海 里

 

 

1
천의 아이들 입마다
불을 밝혀서

서라벌 고샅마다
밤을 밝히던

사랑 앞엔
국경도 총칼도 없어

오로지 타오르는
불꽃 있을 뿐

사랑도 그적이면
꽃이였어라.

2
사랑 앞에선
황금도 돌무더기
신라 천년
사랑 천년
그 언저리
노랫소리
들려요 들려요
그대 옆구리 간질이던
바람
아직도 가슴에 타고
서라벌 나무 이파리 
하나 
흔들리고 잇어요
고샅마다
아롱아롱 일어나는 
아지랑이
몽롱한 꿈자리
보여요 보여요.

3
6월이 오면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지만
시멘트 철근의 숲은
오염에 젖어 있고
흐린 하늘 아래
아래만 살아남은 뜨거운 사랑
순간접착제
뻥튀긴 강정
불꽃만 요란하고
식은 잿더미가 골목마다 쌓인다
별이 뜨지 않는
매연의 거리
이제 사랑도 별볼일없어
찍어 바르고
문지르고 두드려
저마다 몇 개의 탈을 쓰고
거리마다 서성댄다
소리의 집만 무성한 잡초 덤불
깨어진 거울조각이
시대의 흙 속에 묻힌다.

(1987)

 

 

 

水路여 水路여

 

洪 海 里

 

하나. 자화상 또는 타화상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하늘까지 오르고

바다 깊은 줄 모르고
바닷속까지

뭍 너른 줄 모르고
따끝까지
온몸에 불이 달아
싸돌던 여인

젊은이
늙은이

낮은 사내
높은 사내

제 서방
남의 서방

사내란 사내는 모두
수컷으로 만든

창녀중의 창녀
천사창녀여!

 둘. 독백 또는 비원

나를 꺾어다오
나를 꺾어다오

이 몸뚱어리에 피는
불꽃을 꺾어다오

저 낭떠러지의 철쭉보다도
가마 속의 쇳물보다도

더 붉고
뜨거운

그래서 누구도 못 다스리는
이 가슴의 바람을

미칠 것같은 이 어지럼증
비틀대는 허기를

꺾어다오
꺾어다오
  어다오
    다오
      오
       !



 셋. 서울수로



수로여
서울수로여
하늘까지 뻗쳤던
바닷속까지 미쳤던
그대의 바람 진분홍 바람
종로 뒷골목
강남 새 거리
어둡고 깊은 이 거리마다
번쩍이는 그대의 아미
향내나는 몸뚱어리
눈 멀고 귀 먹은 사내들
바보 바보 또 바보들
살몽둥이 나무몽둥이
쇠몽둥이 들고
정신 못 차리네
쪽을 못 쓰네
죽네 죽네
죽을 뿐이네.



 넷. 사랑 또는 절망



독주로 취하는 이 봄날
아지랑이 속으로
자꾸 피어나는 진달래 철쭉꽃
꽃마다 귀신이 붙어
우리 피의 불길을 틔우느니
온 하늘자락 다 사르고
바닷속까지 마르게 하니
이 마음 몸뚱어리
어이 비치지 않으랴
타지 않으랴
사람이 하는 일
뉘 막을 수 있으랴
하늘 둥둥 훨훨 날 수 밖에야.



다섯. 미로학습



사랑해요사랑해요죽은메아리뿐이예요감각의천사같은낮도깨비들의

탈탈탈들이보여요안보여요죽었다살았다살았다죽었다하는춤사위가

끝없이흐느적이고있어요비맞은가을꽃의막막함이이럴까요죽은시간

을넘어굴러가는빈깡통들도소리조차나지않아요펄럭이는마술사의짧

은속치마에이는바람이골목마다휩쓸어도길이안보여요당신이안보여

요어둠속에숨진부끄러움의잔해만이쓰레기처럼뒹굴고있어요사랑해

요어둠을요어둠은꽃인가요천국인가요사랑은폭력인가요혁명인가요

휘청거리는도시의방황하는거리에서서아무리외쳐보아도메아리뿐이

예요안개가루가한치앞까지가려버리고아무것도아무도보이지않아요

하늘도땅도바다도산도진달래도절벽도안보여요휘황찬란한불빛이골

목마다쏟아지고있어도어둠은여전히어둠일뿐이예요봄이올까요그러

면새가울까요안개속에서어둠속에서허수아비들이새를안고있어요깨

지도않은알이예요아니예요모르겠어요아무것도모르겠어요아무것도

안보여요안보여요.



  여섯. 불길 물길



그대 올랐던 
하늘
구름 피는
향기

바닷속에는
오색영롱한
북소리
둥둥 북소리

말없는 그대
몸으로
몸으로만
말하니

창백한 이마들이
모여 모여
그대 안에
안가슴에 도사리어

천지간
온갖 기운
불길로 물길로
넘실넘실 넘치누나.



  일곱.포기 연습



사랑 하나면 
세상도 버리기 위하여

젖지 않은 옆구리
허전함과 외로움을 위하여

모래밭에 맨발로
학춤을 추기 위하여

영원의 눈짓으로
금빛 파도를 잠재우기 위하여

천번 만번
죽음과 입맞추기 위하여

세상이 천이라도
사랑을 버리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