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詩,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 洪海里

洪 海 里 2005. 10. 14. 06:05

<詩에 대한 아포리즘>

詩,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에게는 시론이 없다. 나는 시론을 말하거나 글로 써본 적이 없다. 시론을 가까이하고 그 필요성을 느낀 적도 없다. 
  시는 그냥 시요, 시는 내 삶이요, 내 삶이 시이기를 바랄 뿐이다. 시론은 시론가와 평론가에게 맡기고 나는 시를 쓰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나의 시는 물이고 싶고 그 물로 밝히는 貧者一燈이고 싶다. 
  이제까지 시를 써 오면서, 시와 함께 살아오면서, 시에 대하여, 시인에 대하여 생각한 바를 시로 써서 발표한 몇 편의 작품과 시에 대한 아포리즘을 모아 '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의 지면을 채워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1969년에 낸 첫시집 『投網圖』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발표한 내용을 여기 모아 그간의 내 생각을 다시 한번 다져 보고자 한다. 


그는 
言 寺의 住持, 

말을 빚는 
比丘다. 
    ― 詩人,『投網圖』,1969. 


십리 밖 女子가 자꾸 알찐대고 있다. 
달 지나는지 하루살이처럼 앓고 있다. 
돌과 바람 새 능구렝이가 울고 있다. 
내 안을 기웃대는 눈이 빛나고 있다. 
    ― 詩를 쓰는 理由,『花史記』, 1975. 



슬픔보다 더 순수한 언어로 
말의 집을 이루고자 했었다. 

가장 아름답고 힘있는 
살아 있는 말로 
이리저리 엮고 얽어놓으면, 

별이 보이고 
새들도 날아와 우짖거니 했으나, 

단지 
지붕을 인 
벽일 뿐이었다. 

향그런 흙과 바람 
시원한 내가 흐르고 
햇빛이 찬란히 비춰주기만 한다면, 

새싹이 트일 일이었다. 

II 
부드러운 혀로 쓰다듬고 
눈으로 백 번 천 번 핥으며 
가슴으로 너를 안고 싶었다. 

몇 채의 집을 지으면서도 
흙벽돌 하나 제대로 쌓지 못하고 
벽도 바르지 못한 채, 

무허가 판자집 철거민의 꿈을 안고 
안타까울 뿐, 

너는 어디에도 없이 
막막한 허공이 끝없이 지고 있다. 
    ― 詩, 『洪海里 詩選』, 1983. 


요즘 詩들은 시들하다 
시들시들 자지러드는 
한낮 호박잎의 흐느낌 
마른 개울의 송사리 떼 
겉으로 요란하고 
울긋불긋 시끄럽다 
비 맞은 보리밭처럼 일어서지 못하고 
천둥 번개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미쳐 거리를 헤매는 이도 
독주에 절어 세상을 잊는 이도 
없다 아무도 없다 
차라리 오늘밤엔 말뚝이를 만나야겠다 
말뚝이 애인이라도 만나야겠다 
무릎 꿇고 애걸복걸 
형님, 형님! 
술 한잔 잘 올리면서 
시원하게 물꼬도 트고 
새벽녘의 성처럼 일어서야겠다 
그렇다 그렇다 시인만 하는 
절벽 같은 절망의 어둠을 지나 
육두문자로 시원하고 신선하게 
일어서야겠다 시인이여 
시는 시시하고 
시인은 그렇다고 시인만 하는 
어두운 골목을 지나 
새벽녘 성처럼 일어서야겠다 
시인이여 詩人이여! 
    ― 詩人이여, 『대추꽃 초록빛』, 1987. 

난 속에 
암자 

암자 속에 
비구니 

비구니의 
독경 

독경의 
푸른 
빛. 
    ― 詩 한 편, 『隱者의 북』, 1992. 


말없이 살라는데 시는 써 무엇하리 
흘러가는 구름이나 바라다 볼 일 
산 속에 숨어사는 곧은 선비야 
때 되면 산천초목 시를 토하듯 
금결 같은 은결 같은 옥 같은 시를 
붓 꺾어 가슴속에 새겨 두어라 
시 쓰는 일 부질없어 귀를 씻으면 
바람소리 저 계곡에 시 읊는 소리 
물소리 저 하늘에 시 읊는 소리 
티없이 살라는데 시 써서 무엇하리 
이 가을엔 다 버리고 바람 따르자 
이 저녁엔 물결 위에 마음 띄우자. 
    ― 詩丸, 『난초밭 일궈 놓고』, 1994. 


낫 갈아 허리 차고 
바람 따라 길을 가다 

시흥이 도도하면 
나무 깎아 한 수 적고 

한잔술 거나해서 
노을 베고 자리하면 

저 하늘 깊은 골에 
떠오르는 그믐달. 
    ― 詩刀, 『투명한 슬픔』, 1996. 

수천 길 
암흑의 갱 속 
반짝이는 언어의 사금 
불도 없이 캐고 있는 
이, 

가슴엔 
아지랑이 

하늘엔 
노고지리. 
    ― 시인, 『愛蘭』1998 


詩는 봉숭아 꽃물 들인 그대의 새끼손가락 손톱 속에 내리는 첫눈이다. 
시는 희망이요 절망이다. 희망의 번개요 절망의 천둥이다. 
그리하여 조화요 혼돈이고 혼돈이며 조화이다. 
시는 눈내린 오솔길이다. 그 길 위에 찍혀 있는 한 사람의 
발자국에 고여 있는 순수한 고요이다. 
시는 울음이요 얼음이다. 웃음이요 차돌이다. 

시는 창호지를 갓 바른 지창이요, 그곳에 은은히 어리는 따수운 저녁 불빛이요,
도란도란 들리는 영혼의 울림이다. 
시는 가슴에 내리던 비 그치고 멀리 눈밖으로 사라지는 우렛소리이다. 
시는 실연의 유서이다. 말로 다 못하고 남겨 놓은 싸늘한 삶의 기록이다. 
시는 흙이다. 검고 기름지고 부드럽고 따뜻한 흙의 가슴이다. 
시는 맑디맑은 눈빛이다. 핑그르르 도는 눈물이다. 
그 눈물이 오랫동안 익고 익어서 빚어진 보석이다. 눈물의 보석이다. 
시는 연잎이나 토란잎에 구르는 영롱한 물방울이거나 
풀잎 끝에 맺혀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이슬방울이다. 
시는 화살이다. 막혀 있는 그대의 가슴에 피가 돌게 하는 금빛 화살이다. 
시는 푸른 소나무 바늘 사이를 빠져나온 바람이다. 
순수의 강물 위에 흐르는 맑은 바람이다. 
시는 만추에 피어나는 새싹의 파아란 볼이다. 늦가을을 다시 봄이게 하는. 
시는 절집에 매달려 있는 뼈만 남은 물고기의 
'잠을 깨라, 깨어 있어라' 하는 뜨거운 외침이다. 
시는 잠 속의 꿈이요, 꿈 속의 잠이다. 
시는 깊은 산속 솟아오르는 충만한 옹달샘물이다. 
시는 초록빛 춤을 추는 나무다. 그것은 이상과 휴식과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 준다. 
시는 기다림이요, 그리움이다, 사랑이다, 늘 차지 않아 안타까운 빈 잔이다. 
시는 마지막 불꽃이다.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이다. 
모든 것을 다 태우고 다 타버린 것까지 다시 태우는 불꽃이다. 
시는 상상력의 증폭기이다. 순간과 영원을 함께하고 극락과 지옥을 같이한다. 
시는 사춘기의 꽃이다. 
떨리는 가슴의 언어를 엮어 따스한 마음을 전해주는 대행기관이다. 
시는 문학의 원자요 결정체이다. 
모든 문자로 된 매체는 시로 시작해서 시로 끝나야 한다. 
시는 가장 정교하고 우아한 의상 전시장이다. 
그 의상을 입은 사람들은 스스로 빛이 난다. 
시는 집중이다, 중심이다. 
시는 첫눈이고 첫서리이고 첫얼음이다. 첫성에이다. 그리하여 
첫사랑 같고 첫키스 같고 첫날밤 같아야 한다. 

시는 독주다. 사내들의 우울한 가슴을 태울 100%의 순도를 지닌 
독주의 순수, 그 투명함이다. 
시는 정신의 건전지이다. 피로한 정신의 기력을 채워주는 생명공학이다. 
시는 백담계곡의 맑고 찬물에 노니는 열목어의 붉은 눈빛이다. 
시는 언어의 사리이다. 자신을 태워 만드는 스스로의 사리이다. 
시는 사랑이다. 항상 막막하고 그리웁고 안타깝고 비어 있어 
허전하고 늘 갈구하며 목말라한다. 
시는 똥이다. 잘 썩어 우리들의 영혼의 자양분이 되는 향기로운 똥이다. 
시는 미늘이다. 영혼의 탈출을 막는 날카로운 미늘이다. 
시는 다이아몬드이다. 사람이 사는 빈 자리 마다 푸르게 빛나는 영롱한 보석이다. 
시는 새벽녘에 갓 잡아올린 신선한 생선이다. 그 금빛 비늘이다. 
시는 삶이다. 삶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시는 삶일 뿐이다. 
    ― 시에 대한 단상, 『愛蘭』,1998. 

시는 0이다. 모든 수를 품어 안은 가장 큰 수이면서 가장 적은 수이다. 
있는 수이면서 없는 수이다. 
시는 침묵이다. 시는 침묵으로 말하고, 말로 하는 침묵이다. 
시는 시작이며 끝이다. 시는 영원이다. 
시는 백색이다. 백 가지 색깔이다. 모든 색깔을 버린 흰색이다. 
모든 색깔을 다 날려보내고 그리는 대상이다. 
시는 하늘이고 땅이다. 시는 대지다. 시는 바다로 출렁이면서 산으로 솟아 있다. 
시는 내부에 물길과 불길이 흐르면서 타오른다. 솟구치는 물, 흐르는 불인 용암,
불의 물이요, 물의 불인 용암은 물인가 불인가. 시는 용암이다. 
    ―시인의 산문, 「牛耳詩」, 2003,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