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난초밭 일궈 놓고』1994

<시> 은빛 속의 파스텔

洪 海 里 2005. 11. 28. 06:53
은빛 속의 파스텔
홍해리(洪海里)
 

겨우내 마른 몸으로 텅텅 비어서
홀로 서기조차 겨운 빈 몸으로
천지가 악기 되어 스스로 울더니
안개 속에서 뱀들도 옷을 벗고
연한 속살을 대지 위에 대인다
봄비 내려 촉촉히 젖은 맨살로
바람은 우우우 몰려와
꽃나무마다 껍질 벗길 때
꽃잎 바른 창호지 문살 사이로
기다리던 기별이 쏟아지듯 퍼붓고
은은하고 그윽한 햇살과 바람
고단한 몸 혼절할 듯 포개어져
꽃 같은 잠에 들어 꿈에 빠지면
어디서 누가 사군자라도 치는지
먹을 가는 소리 머리맡에 슬리고
묵묵히 번져오는 맑고 매운 향기
눈앞 커튼을 걷어 올리니
겨우내 목숨을 비우고 비운 이들이
날개가 되어 날아가는구나
가벼이 떠나가는 옷자락과 흰 수건
카시미론 이불처럼 일렁이는 금빛 잔디
아지랑이 타고 갈것 가고 올것 올 때
봄은 은빛 속에 간지러운 파스텔로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