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
1957년 유치환 시인협회장 선출
그 애틋한 그리움이 동백꽃처럼 붉게 타오르던 어느 봄날. 마흔을 바라보던 청마는 여덟 살 연하의 시조시인 정운(이영도)에게 연시(戀詩)
‘행복’을 썼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광복 이듬해에 고향인 통영여중에 국어교사로 부임한 청마. 그는 같은 학교에 있던 정운을 연모했다. 갓 서른에 홀몸이 된 그녀는 달빛 같은
여성이었다. 청마는 그녀의 청초함과 요조숙녀의 자태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청마에게는 부인이 있었다.
청마 유치환.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를 지향했던 생명파 시인. 그러나 시인은 그 엄정(嚴正)한 시어의 뒤편에 헐렁하게 풀어헤친
인간 됨됨이를 보여준다.
생김새가 말상(相)이라고 해서 청마(靑馬)라는 호를 얻었던 술고래. 그는 버스에 치여 숨지던 날에도 만취해 콧노래에 어깨춤을 추고 있었다.
이 거친 사내는 많은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그 가없는 그리움 속에서 시를 길러냈다.
그의 시에는 어금니를 깨물어야 하는 벼랑 끝의 비극미가 있다.
청마는 1940년 겨울 일제의 예비검속을 피해 북만주로 들어갔는데 이곳에서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다. 땅은 얼어 삽이 들어가지 않았고,
허허벌판 밭두렁에 아이를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 끝없이 펼쳐진 북만주의 무한공간. 그는 그때 절망의 광야(曠野)를 보았다.
‘허무의 의지.’ 그는 무한(無限) 앞에 절망한 시인이었고 무한에 매혹된 시인이었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이 되기도 하고, 때론
부드러운 자연의 소묘가 되기도 하고, 때론 귀신도 곡할 피맺힌 고발이 되기도 한다.
그의 시는 기교가 아닌 ‘소리없는 아우성’이었다. ‘생명의 서(書)’였다.
‘그 열렬(烈烈)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통영은 동백(冬柏)이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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