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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재창조와 민족의 정체성
洪申善(시인.수원대 교수)
1.1.『震檀詩』는『원탁시』나『시정신』『시운동』등과 함께 오랜 연륜을 지닌 동인지이다. 동인활동 기간이 길기도 하지만, 동인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시력 역시 20여년 이상 꾸준히 활동을 해오고 있다. 결코 짧지 않은 이같은 이력은 그간의 성과나 열의가 간단치 않은 것임을 알게 한다. 잘 알려진 바와같이, 동인활동은 세계와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기존의 미학과는 다른 새 틀을 성취하려는 움직임이다. 그래서, 지난날의 동인운동은 이념적인 결속을 그 이상으로 여겨왔고 예술이나 문학의 역사에서 새로운 기원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동인활동에 대한 고전적인 생각은 주로 서구의 사조를 통한 문학 이해방식에서 온 것인데 특히 20C 초 유럽의 다양한 전위예술운동이 그 한 본보기를 보여준 바 있다. 우리 문학에 있어서도, 1930년대 구인회를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 운동, 제3세대 시인을 축으로 했던 생명파, 해방후의 청록파 등 숱한 동인 내지 소집단 운동이 있어왔다. 특히, 80년대에 들어와서는 특정의 Topic이나 문제를 그때 그때 집약하고 정리하려 한 소집단 mook운동이 일어나 종래와는 다른 편차의 운동을 보이기도 했다.그러나 이같은 운동은 단기적으로 치고 빠지는 식의 전술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서, 『진단시』등 몇몇 시동인들은 일정한 이념이나 슬로건을 선언하지도 않았고 게릴라식 문화의 첨병을 자처하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작품활동을 꾸준하고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왔을 뿐이다. 말하자면, 구체적인 작품을 통하여 자신들의 문학적 생각을 묵시적으로 드러내는데 열중했을 뿐인 것이다. 왜 그러했던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어설프게 급조된 이념이나 선언을 내기보다는 먼저 작품활동을 통한 동인 상호간의 동질성 확인과 그 확보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진단시 동인들의 정신주소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번째 사항은 『진단시』동인들의 시력이나 자연연령과 무관하지 않다. 즉, 우리 시문학사에서 그 동안 숱하게 부침한 동인운동이, 상당수의 경우 지나치게 이념제시에 성급했던 나머지 선언만 앞서고 그 실질(작품)이 모자라 실패했던 데 대한 반성이 이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각자의 개성을 견지하면서도 동인 모두의 동질성을 점진적으로 모색하고 형성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대체로 그 동질성에 대한 공동의 인식이 마련되고 또 천명된 것은 6집에 이르러서이다. 그때까지 이들이 택한 방법은 테마시의 창작이었고, 한 동인의 설명에 의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해 온 창작적 체험이나 작품분석을 통해 얻은 결과는 지극히 긍정적이면서도 바람직한' 것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긍정적인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점인데, 이는 『진단시』동인의 정신주소와 관련된 사항의 것이다. 아무튼 80년대초의 숨막히는 공간 속에서 『진단시』가 나름대로의 전술적 방략을 구사하면서 동질성과 방향성을 모색한 사실은, 거듭된 지적이지만, 그들의 연령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진단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테마시의 제작일 것이다. 테마시란 우리의 역사, 전통, 민속 등의 특징적인 사물이나 작품, 유물 등을 글감으로 제시하고 이를 재평가 재해석하는 작품들이다. 예컨대, 동인지 1집에서 14집까지 서동, 동동, 배비장, 온달, 정읍사, 서낭당, 놀부 등 옛 문학작품에서부터 역사적 인물, 각종 민속적 유산에 이르기까지 그때 그때 제재를 가리고 작품화 해온 일이 그것이다. 이 테마시를 통하여 모색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단시』의 토양은 우리 정신에 대한 전통에의 천착에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겨레의 정서와 정조를 빚어내어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을 창조하고자 했다. 과거성을 과거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성을 현재의 내면성에 조명시켜, 새로운 정신적 가치관을 재창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ㅡ「편집후기」(정의홍) 가운데에서
이와 같은 기록에 따르자면 테마시를 통하여 이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우리의 정신적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이는 일종의 민족적 자아의 탐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과거의 역사적 유물이나 관습, 민담이나 전설상의 인물들을 통하여 우리의 자아나 민족의 실체를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결국, 전통이란 말도 우리가 민족을 형식으로 보았을 때 그 안에 내재한 정신적인 것들의 지속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진단시』에서 테마로 잡은 일정 관습이나 민담, 역사적 인물들은 일정의 정신이 집중적으로 현현된 사물일 것이다.
1.2. 민중들이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혜나 생각들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구비문학의 형식을 띠고 나타난다. 서구 낭만주의자들이 한 무렵 초개인적인 이념이나 세계관의 표현체로 구비문학을 생각해온 이래 이같은 생각은 상식화되었다. 우리가 전통을 단순한 생활遺制가 아닌 민족과 같은 생활공동체의 세계해석이나 이해의 틀로 생각할 때 구비문학 작품들이나 역사적 전승물들을 주목하는 것을 마땅한 일이다. 물론, 이같은 전승물이나 구비문학 자료들을 통해서 확인된 전통이 그 효용성을 갖기 위해서는 '과거성을 과거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성을 현재에 내면화시켜 새로운 가치로 만들어야할 것이다. 『진단시』동인들의 이같은 정신적 주소는 어디에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까,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 시에서 민족적 자아나 정서를 문제 삼았던 일은 1920년대말의 민족 문학파일 것이다. 六堂이나 爲堂은 조선민족이나 배달민족이란 말로 우리 민족을 지칭하면서, 역사연구 특히 정신사로서의 역사연구를 진행하고 국토순례와 고서 간행 등의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들의 활동은 '조선심'이나 조선의 '얼'로 그 표현을 얻었다. 아울러, 이같은 활동의 연장선 위에서 주요한· 번영노· 박종화등이 시를 썼고 김억이나 김소월이 합류했었다. 이들의 문학적 성과를 이 자리에서 짧게 이야기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전통적 정서를 시로 형상화했던 그 의의와 더 나아가 그들의 한계나 문제점을 살펴야 할 필요가 남아 있다. 내가 보기에는 적어도 이와 같은 작업이 『진단시』의 테마시 제작과 함꼐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그와 같은 노력은 장승이나 도깨비 같은 일정한 전승물을 테마로 내거는 일 못지않게 우리의 문학적 전통을 확인하는 일이고 올바른 방향성의 추구일 것이다. 특히, 이 글을 시작하면서 『진단시』의 정신적 주소가 어디에 놓였는가를 제기한 것은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이다. 문제는, 전통의 확인과 재창조 작업이 일종의 신비주의로 흘러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마치 전통을 정신적 광맥의 하나로 모든 일에 우선한다는 식이거나, 실체 없는 신기루처럼 무조건 미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2.1. 『진단시』의 이번 테마시는 '등잔시'이다. 등불은 우리의 오랜 농경문화를 상징하는 존재이다. 식물 기름이나 동물 기름, 또는 석유를 끌어올려 빛과 열을 내는 등잔은, 도시화 이전 세대에게는, 유년이나 고향, 혹은 어머니 그 자체인 터일 것이다. 이번에 읽는 동인들의 등잔시들 대부분 역시 그 상상력은 모두 이 방향으로 펼쳐지고 있다. 등잔불은, 이용주의 이같은 적절한 지적처럼, 시인들의 마음의 움직임을 그 내부로만 향하게 하였다. 등불의 내면에 대한 몽상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주로 그 속성과 값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상상의 눈길을 불의 외부로 돌리게 되면 거기에는 역사와 현실의 그림자가 어른거림을 발견케 된다. 이 그림자들은 이번의 테마시에서 등불과 함께 바라보는 시인들은 박진환, 洪海里, 이용주 등이다.
ⅰ) 등잔불 하나로 어둠을 밝혀 아시아의 등불을 꿈꾸던 코리아 코리아는 지금 불기둥의 유전을 찾아 밤을 낮으로 바꾼 등불의 나라가 됐다.
ⅱ) 등 시린 현실이여 그것은 한 점 슬픈 역사일 뿐인가 우수의 입술로 피우는 아름다운 불꽃 아래 그래도 조국은 아름다웠다.
ⅲ) 문만 열면 손으로 가려야 하는 슬픈 성상이여 늘 같은 곳에 자리하여 좁은 틈으로만 눈길을 쏟아 조공을 받쳐온 몸부림이어라
ⅰ)은 박진환의 작품이고 ⅱ)는 홍해리, ⅲ)은 이용주의 시이다. ⅰ)에 의하면, 박진환 역시 등잔불을 어머니의 바느질과 함께 몽상하지만, 그 몽상은 현실 인식으로 즉시 대체된다. 곧, 지난날 가난했던 석유등불을 중동의 석유밭을 누비는 오늘의 산업화의 불빛으로 바꿔보는 것이다. 산업화의 불빛 속에는 월훈으로 상징되던 가족들의 동질감이나 애정 대신 물신화된 욕망 만이 깃들고 있다. 그 욕망은 '제법 콧대 높은'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석유 등잔은 더 이상 진학용 참고서를 읽던 시절의 정신성의 상징이 아니다. 반면, 洪海里의 등잔불은 어둠인 시대를 밝혀주고 그래도 아름다운 조국을 깨닫게 해 주는 神性을 지니고 있다. 그 불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문득문득 심지를 통해 기름소리(혹은 수직의 냇물소리)를 낸다. 그러나, 이 불은 현실의 시린 등을 덥혀줄 만한 열을 내지 못한다. 바꿔 말하자면, 빛을 내면서도 열을 지니지못한, 차디찬 역설의 불인 것이다. 그 불 속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동짓달 밤을 새우고 그래도 조국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이다. ⅲ)의 불은 사면의 벽 안에서만 목숨을 이어가는 불이다. 봉창을 막고 풍지와 싸워야 자신을 겨우 지탱하는 연약한 존재인 것이다. 그 모습은, 그래서 시인에게는, 문호를 닫는 쇄국과 사대로 겨우 이어온 지난날의 나라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창문을 열고 외세·태풍에 의연할 수 없는가라는 탄식은 여기에서 발해진다. 이용주의 등잔불은 이 점에서 여타 시인들의 불과는 다른 매우 정치적인 상상력의 불이다. 한 점 역사로서 조국을 아름답게 인식시키는 洪海里의 불과 다르고 산업사회의 물신화된 박진환의 불과 다른 것이다. 시인의 내면세계를 밝히는 일과 달리 외부의 현실과 역사를 드러내는 이 세 사람의 등잔불들은 그 만큼 정치적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정치적 상상력은 전통주의의 또 하나의 귀한 맥이기도 할 터이다.
2.4. 우리 시에서 진술의 두 가닥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압축과 펼침의 원리이다. 압축은 생략에 의해 말수를 줄이고 절제를 통해 표현을 간결하게 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이 원리의 시들은 암시와 함축을 극대화 시키고 틀의 견고함과 세련을 얻는다. 반면에, 펼침의 원리는 일종의 '엮음'과 같이 말수를 늘리고 반복이나 수가적 효과를 중시한다. 특히, 사물이나 서사의 세부사항을 중시하여 현실성과 구체성을 얻고 있다. 바로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들이 그것이다. 이 시들은 전통적인 비유법과 상징적 표현보다는 기지나 유모어, 아이러니 등을 주된 수사적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비해 압축의 원리에 근거하는 시들은 고도의 상징과 비유와 같은 조사를 즐겨 쓰고있다. 시력 20년 이상의 『진단시』동인들 역시 이같은 두 가지 원리로 볼 때는 고전적인 압축의 원리에 많이 기대고 있다. 특히 간결한 묘사의 경우 이 점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ⅰ) 난 속에 암자 암자 속에 비구니
비구니의 독경 독경의 푸른 빛.
ⅱ) 운학동 깊은 골짜 빈 마을에 붉게 익은 감들만 흐드러졌는데 천만 개미 떼들 그 밑에 모여 태평성대 누리며 북적이는데 코 귀가 반쯤 잘린 얼배기 석불 볼따귀 머리통에 홍시 맞고도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만 있데
ⅲ) 팔 보다 긴 혀를 내둘러 한곳 젖지 않은 곳이 없이 전라를 핥아대는 짐승
과 같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i)은 洪海里의『詩 한 편』이고 ii)는 임보의 『감나무』 iii)은 박진환의 『바다』이다. i)은 난을 보면서 그 푸른 빛을 독경소리로 바꿔 듣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말하자면, 난이 푸른 것은 그 속에 든 비구니의 독경소리 때문이라는 놀라운 몽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ii)는, 운학동 골짜기의, 한 장 사진이다. 그 사진은 감과 개미 떼, 석불을 축으로 한 대원융의 풍경을 담은 것이다. 곧, 세 개의 이미지들이 각각의 자성과 그 대전을 이루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진은 사진이되, 불교적 세계관이 뒷면을 받쳐주는 사진인 것이다. iii)은 바다의 역동성을, 수성과 성적 충동으로 해석해 놓은 작품이다. 이상의 설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물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르지만, 모두 간결한 서술과 압축을 통하여 그 해석한 바를 암시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진단시』동인들은 테마시 『등잔불』을 통해서도 확인한 바와 같이, 각자의 신분이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부단히 확인하며 추적하고 있다. 그 추적은 특히 훼손되지 않은 삶을 좇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말하자면, 한국적인 삶의 본래적인 모습을 탐색하고 사진 찍어내는(묘사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 ii)의 경우도 그렇고 洪海里의 『향수』, 장순금의 『외갓집』, 김규화의 『세한도』, 박진환의 『해질녘』, 정의홍의 『산노을』, 『우리 마을의 가을』, 신규호의 『銀紙畵. 4』 등이 모두 이 경우에 해당한다. 문제는, 당연한 말이지만, 이 본래적 유년시절의 기억속에 존재하거나, 아니면 그리움의 저쪽 공간에 놓여있을 뿐인 것이다. 시인들이 개인적 자아의 모습, 특히 정체성을 유년시절에서 확인하는 것은 과거 지향의 일이 되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업은 현실 속에서나 미래의 한 비젼으로 재창조되는 일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자연 가운데서, 특히 산이란 이미지를 통하여 '厚重不遷'의 정신적 자세를 익히고 心物合一에 이르는 일은, 과거의 자연서정시들에서 잘 발견되었던 현상이다. 문효치의 『지리산 시』는 이같은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연하천 야영』에서 '산의 품'에 자아가 안기고 그 품에서 다시 따개비가 안기는 구도 속에 자연과 나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것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번호의 문효치의 자연시들이 크게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천왕봉』에서 자연을 의인화하여 그 속성과 가치 등을 간추려 말하는 일도 앞의 경우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3.1. 이상으로 우리는 『진단시』의 마음의 움직임이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그 주소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말을 탄채 산 구경을 나선 것과 같은 피상적인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과정을 통해 드러난 사실과 문제 등을 적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번호의 테마시 「등잔불」을 중심으로 살펴본 동인들의 상상력은 대체로 고향이나 어머니 아니면 정신적 창조와 깨달음 등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개인의 정체성은 물론 그것의 확대인 민족적 자아의 모습을 추적하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을 터이다. 곧, 정신의 원초적 공간, 혹은 본적지를 탐색하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타난 사실만으로 본다면, 정신의 원초적 공간은 훼손되지 않은 삶 곧 유년이란 등식에서 확인된다. 등불의 월훈으로 상징되는 공간이 그 단적인 예인 것이다. 이 둥글기만한 조화의 공간은, 그러나 지나치게 과거지향적이란 문제에 부딪친다. 출범 이후, 10년동안 조심스럽게 탐색해온 동인들의 테마시 작업이 비록 이같은 복고주의를 극복하자는 데 그 일의적인 목표를 두어왔지만, 아직도 그 선언과 실제 간에는 꽤 거리가 있는 듯이 보인다. 두번째는 이같은 복고주의와 함께 민족적 자아나 전통을 지나치게 문화적인 내용과 동일시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테마시의 글감들은 모두 문화적인 내용의 것들이었다. 대체로 정적이고 정신성 일변도의 글감들을 골랐던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조선조 실학이 제기한 '조선적인 것'으로서의 실사구시 문제나 민족자아의 탐구를 내건 민족문학파의 문제와도 맞물릴 것이다. 보다 다양하고 동적인 전통의 물목들을 찾아야 할 일이다. 또한 전통을 지나치게 신비화하는 문제도 여기서 한번쯤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객관적 실체로서의 확인하기 어려운 전통이야 말로 자칫하면 신비의 베일로 감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비의 안개 속에 있는 것이 전통도 아니며 또 늘 무상의 값만을 지닌 보배가 전통일 수도 없다. 현재의 삶의 문제와 함께 생각하고 재창조해야 할 것이, 바로 우리의 전통이란, 동인들의 생각은 그래서 정확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意味目 위에서, 감히 내가 그렸던 동인들의 정신적 태도는 늘 가변적이고 역동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삶의 구경적 모습을 드러내는 가운데 아울러 민족적 정체성을 밝히고 규명하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유연하고 열린 정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바로 동인지 『震檀詩』를 주목하게 만드는 까닭이 되기도 할 것이다. (『現代詩와 傳統意識』문학예술,1991)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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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불빛 아래 잠 속에서
洪 海 里
시대는 어둠 세상만사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천지의 칠흑 무한 자궁 속 홀로 잠들어 꿈으로 들면 천년 어둠이 흘러왔다 흘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귀를 열면 문득문득 들려오는 짜르르 심지를 타고 오르는 기름소리 하나의 끈으로 우주를 밝히면서 빈 곳 없이 속속들이 채우려 해도 어차피 그댈 만나면 그림자로 길게 누워야 하는 숙명 바람 부는 날 숨을 헐떡이며 벼랑에 끝끝으로 서서 홀로 소리치다 소리치다 눈물로 전신을 사뤄 밝히는 호젓한 적막 등 시린 현실이여 그것은 한 점 슬픈 역사일 뿐인가 우수의 입술로 피우는 아름다운 불꽃 아래 그래도 조국은 아름다웠다 잠 가고 꿈만 남아 꿈도 깨이고 빈 방 홀로 밝는 동짓달 쓸쓸한 지창 흔들리는 불빛으로 눈을 씻었다 등잔불만 혼자서 사위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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