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동아일보

불멸의 연인

洪 海 里 2006. 4. 27. 06:07

2006년 4월 27일 (목) 동아일보

"[책갈피 속의 오늘]

1810년 베토벤 ‘엘리제를 위하여’ 작곡"




어릴 적 골목길을 걷다가 담장 안에서 흘러나오는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을 때면 어디선가 하얀 옷을 입고 피아노를 치고 있을 것 같은 소녀를 상상하곤 했다. 사랑스럽고 깔끔하지만 어딘가 아련한 슬픔이 느껴지는 이 곡은 동서고금의 ‘사랑의 멜로디’ 중 명곡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자신의 대표작 ‘5번(운명)과 6번(전원)’ 교향곡을 작곡하고 난 40세의 베토벤이 갑자기 왜 이렇게 귀엽고 달콤한 피아노 소품을 작곡했을까?

베토벤이 사망하고 40년 뒤 뮌헨에서 발견된 이 곡의 악보 밑에는 ‘테레제의 추억을 위하여. 1810년 4월 27일. L V 베토벤’이라고 적혀 있다.

베토벤이 자신의 피아노 제자이자 빈 사교계에서 미녀로 이름난 17세의 테레제 말파티(1792∼1851)에게 보낸 사랑의 음악편지였던 것. 테레제는 빈 의학협회를 창립하고 베토벤의 임종 당시에도 자리를 지켰던 주치의 요한 말파티의 조카였다.

베토벤은 그녀에게 청혼하기 위해 고향인 본에 있던 친구에게 편지로 출생신고서를 보내 달라는 부탁을 했고, 당시 빈에서 가장 유명한 양복점에 옷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말파티의 가족은 그의 청혼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베토벤은 일생 동안 결혼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여인과 연모의 정을 키웠다. 베토벤이 숨진 뒤 유품 속에서 ‘불멸의 연인에게’라고 적힌 연애편지 3통이 나왔다. ‘불멸의 연인’이 누구일까에 대해서는 ‘월광소나타’를 헌정한 백작부인 줄리에타 기차르디,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를 바친 테레제 브룬스비크 등 추측이 난무해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베토벤이 사랑을 고백했던 여인들은 모두 귀족 출신이었다. 프랑스혁명 직후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시대정신이 유럽을 휩쓸 무렵, 베토벤은 평민 출신임에도 귀족들과 대등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에 여인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또한 베토벤은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뚜렷한 이유 없이 거부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예술적 창작에 고뇌하던 베토벤이 ‘결혼의 구속’까지는 원치 않았던 것이 아닐까. ‘엘리제를 위하여’ ‘월광 소나타’와 같은 명곡을 남기게 해 준 베토벤의 여인들에게 감사드릴 뿐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