牛耳洞 이야기

우이동牛耳洞 · 1, 2

洪 海 里 2006. 11. 26. 19:30

우이동(牛耳洞)

 

  우이동은 북한산 동록에 위치하며, 소귀같이 보이는 봉우리 즉 우이봉(牛耳峯) 아래에 있다 하여 우이동이라 이름하였다. 이 북한산 동록은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길게 혹은 짧게 뻗어 내려왔으며 그 산맥 사이로 계곡을 이루어 맑은 물이 항상 흐르고 또 계곡 사이로 흐르는 물은 돌을 파서 못을 이루기도 하고 다시 바위와 언덕을 휘돌아 폭포를 만들기도 하여 절경을 이룬다. 또 계곡에 즐비하게 있는 크고 작은 흰 바위들이 맑은 물과 조화를 이루고 주위에는 울창한 수림들이 빽빽히 들어서서 계절마다 풍경을 바꾸어 놓는다.

정조대에 한성부 우윤(右尹)을 지낸 바 있는 이계(耳谿) 홍양호(洪良浩)는 일찍부터 이 곳 만장봉 남쪽에 겸산루(兼山樓)를 세우고 ‘우이동 구곡’을 지어 자연의 풍치를 극찬하였다. 이계의 ‘우이동 구곡’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만경대의 높은 봉우리가 백운, 인수봉과 함께 병풍을 둘러친 것 같은 깎아지른 듯한 석벽이 있고 그 위에서 비단필처럼 물이 떨어져 그 소리가 진동하는데 만경폭이라 이름하니 이것이 제1곡이다.

  1곡에서 조금 내려오면 큰 바위가 깔려 수십백 인이 앉을 만한데 이름을 성석(醒石)이라 한다. 여기서부터 산은 점점 낮아지고 동학(洞壑)은 다시 합하여 좌우쪽에는 푸른 석벽이 마주서고 물이 쏟아져 내리니 이름을 적취병(積翠屛)이라 하는데 제2곡이다.

다시 물을 따라 내려오면 돌에 무늬가 있고 물이 그 위로 흐르며 왼쪽 언덕에 층층한 바위가 봉우리를 이루어서 위에 올라가면 먼 들판이 보인다. 이름을 찬운봉(콭雲峰)이라 하는데 여기가 제3곡이다.

  산을 돌아 내려오면 두어 길 되는 큰 돌이 물을 막아 서 있고 솔바람 물소리가 요란한데 이름을 진의강(振衣岡)이라 한다. 앞에는 종만한 큰 바위가 물에 부딪쳐 울리는데 그 소리가 들을 만하니 제4곡이다.

  계곡을 따라 수백 보 내려오면 큰 바위가 대를 이루어 동구(洞口)를 가로막는데 구름도 물도 맑으니 이름을 옥경대(玉鏡臺)라 한다. 바위가 미끄럽고 넓적하여 큰 글자를 쓸 만하고 가운데가 패어 구유 모양 같으니 이름을 세묵지(洗墨池)라 한다. 제5곡이다.

여기서부터 좀 북쪽으로 가면 물이 땅속으로 흘러 수리를 내려가는데 거울처럼 깨끗한 흰 돌이 넓게 깔리고 주위는 여러 봉우리로 둘러쌓여 있는 가운데 둥근 못이 되었다. 앞으로는 수락, 도봉의 여러 산이 그림 병풍처럼 바라보이는데 달 아래 그림자를 볼 수 있어 이름을 월영담(月影潭)이라 하니 제6곡이다.

  다시 수백 보를 내려오면 괴석이 나고 들고 한 한가운데로 작은 폭포가 이루어지고 오른쪽으로는 큰 바위가 집채같이 높이 서서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술잔을 들 만한데 이름을 탁영암(濯纓岩)이라 한다. 그 위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천관봉이 우뚝 솟아 마치 관을 쓴 도인이 구름을 헤치고 단정히 앉은 것 같다. 여기가 제7곡이다.

  또 시내를 따라 수백 보를 내려오면 골짜기는 더욱 넓어지고 물도 많아지면서 소리 없이 흐른다. 다시 돌무더기가 층대를 이루고 물이 높이 떨어지며 여울을 이루니 명옥탄(鳴玉灘)이라 한다. 그 서쪽의 작은 시내는 천관봉 아래서 시작하여 언덕을 따라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 시내를 연미천(燕尾川)이라 한다. 이 시내 위의 작은 집은 소귀당(小歸堂)이라 하는데 이것이 3대째 사는 나의 작은 집이다. 북쪽엔 겸산루라는 작은 누대가 있으며 주위엔 풍송(楓松) 무초(茂草)가 무성하고 그 동쪽 수십 보에는 큰 바위 위에 절벽을 내려다보는 수재정(水哉亭)이 있다. 명옥탄 연미천의 물이 정자 아래로 합류하여 맑은 못이 되는데 이것이 제8곡이다.

  여기 와서는 양쪽 언덕이 밝고 넓으며 물은 맑고 모래는 희다. 두어 채의 집이 돌에 걸쳐 시내를 내려다보는 재간정(在澗亭)이 있다. 이 곳은 3세 상국(相國) 서공(徐公)의 오래된 별장으로 제9곡이다. 이상을 합하여 우이동이라 이름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우이동 계곡 사이에는 겸산루, 수재정, 재간정 등 명소 고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유지마저 없어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우이동 계곡을 올라가면 현 254번지에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가 기거하면서 수련하던 곳으로 알려진 봉황각이 있다. 이 봉황각은 일제초 의암이 천도교 포교와 조국 광복을 위하여 쓰던 집으로 팔작지붕에 26평 남짓한 아담한 건물로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우이동은 벚꽃이 유명하여 봄철이면 벚꽃구경에 인파가 골짜기를 메웠다고 하는데 이 벚나무는 역시 이계(耳谿) 홍양호(洪良浩)가 통신사 일행에게 의뢰하여 벚나무 수백 그루를 가져와 심은 데서 비롯되었다. 당시 이계가 일본의 벚나무를 구해다 심은 것은 활재료로 필요했기 때문이었으나 꽃구경으로 한 몫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수유동에서 우이동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화계사가 있는데 백운대 중턱에 있는 도선사와 함께 탐승객들이 즐겨 찾는다. 이 절은 중종 17년(1522)에 신월대사가 창건하였으나 광해군 10년(1618)에 전소된 뒤 도월스님의 노력으로 복구된 바 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풍우에 시달려 건물이 퇴락해지자 고종 연간(年間)에 대원군의 정성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몇몇 건물이 중건된 바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명부전(冥府殿)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 보화루(寶華樓) 학서루(鶴棲樓) 화장루(華藏樓) 등 건물이 있으며 특히 흥선대원군의 친필 현판을 비롯해서 위당(威堂) 신관호(申觀浩, 申櫶)의 필적이 남아 있다. 또 명부전의 십왕상은 고려말 명승 나옹(懶翁)의 조각으로 전해지는데 상호(相好)가 원만하여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고 있다. 이 십왕상(十王像)은 황해도 금천 강서사에 봉안되어 있던 것을 고종 14년(1877)에 이봉한 것이라 하며, 대웅전 앞 유수옹(鍮水甕)은 헌종의 계비인 홍대비가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우이동 계곡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면 ‘소원(素園)’이라는 표석이 있는데 이 곳이 육당 최남선의 옛 집으로 ‘육당 최남선 기념비’가 있으며 뒷면에는 독립선언서가 새겨져 있다. 이 비는 1959년 10월에 세워졌다.

 

「동곽(東廓)의 동쪽 백양나무 늘어선 길에,

나그네 말 멈추고 끝없는 생각에 잠기네.

무성하게 자란 저 나무들 사이에 여기저기 무덤 있는데,

포곡조(布穀鳥)는 무심도 하다 밭갈기만 재촉하네.」

 

이 시를 보면 400년 전에도 우이동 근처에는 무덤이 많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산수 지리가 좋은 곳을 찾아 유택을 마련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이 계곡에도 근대 현대의 많은 우국지사들이 고이 잠들어 있다.

  이 우이동을 포함한 북한산 일대는 1983년 4월에 건설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서울六百年史>

 

 

우이동(牛耳洞)

 

  우이동은 북한산과 도봉산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우이리였다. 동소문(혜화문)밖에서 약 20리로 서울 중심지에서 좀 먼 거리이지만 자동차, 기차(창동역)편이 있고 또 옛날부터 명승지로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여름철에는 수석을 즐기고, 봄가을에는 꽃과 단풍을 구경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간다.
  북한산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맑은 물이 간간이 돌을 파서 못을 이루고, 다시 바위와 언덕을 감싸면서 이리 저리 돌아 흐르며 냇가를 따라서 자연의 화초가 풍경을 장식하고 우거진 수림이 해를 가리우니 사계절의 경치가 매우 좋다.
  뿐만 아니라 우이동의 벚꽃은 특히 유명하여 일찍부터 봄철만 되면 벚꽃 구경으로 인파가 골짜기를 메웠다. 그런데 이 우이동의 벚꽃은 약 200여년전 정조조의 문무겸전한 인물로 널리 알리어진 대신 홍양호(洪良浩)가 일본에 가는 통신사편에 부탁하여 길야앵(吉野櫻) 수백 그루를 가져다 심은 데서부터 유명하여졌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홍양호가 일본의 앵목을 구해다 심은 것은 꽃구경을 하기 위해서 보다 활 만드는 재료로서 벚나무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는데, 심어놓고 보니 꽃이 좋아 꽃 구경으로 한 몫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일제 강점기에 와서는 이계 홍양호가 일본에서 가져다 심었던 벚꽃나무는 이미 고목이 되어 전날의 성황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전부터 이 곳에 많이 자생하던 산벚꽃나무가 더욱 무성하여 봄철이 되면 산록이 연분홍의 벚꽃으로 덮이니 우이동은 여전히 벚꽃의 명소로 이름 높게 되었다.
동아일보(1920년 4월 17일자)의 「양춘(陽春)의 낙원 우이동」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아래와 같은 기사로서 당시의 우이동 벚꽃이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뜻한 봄 바람이 남으로부터 불어오고 말랐던 나무 끝에 푸른 싹이 터 나오더니 이 나름의 경성 천지는 꽃 세계, 꽃 도읍이 되었다. 장충단 개나리는 벌써 시들어가기를 시작하거니와 시내 도처에 담 밖으로 생긋 웃고 내다보는 행화(杏花), 도화(桃花)들도 양춘(陽春)을 찬미한다. 더욱이 요사이 며칠은 일기가 화창하고 춘풍은 온화하여 혹은 도보로 혹은 전차로 꽃빛을 그리고 춘흥을 못 이기어 시외로 놀러나가는 이가 차차 많아지게 되었다. 이에 연래로 만도(滿都) 인사에게 향기로운 웃음과 유려한 맵시로 말 없는 기쁨을 주며 소리 없는 복음을 전하여 경성 인사의 따뜻한 사랑을 저 혼자 차지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꽃 소문이 높은 우이동 '벚꽃'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코자 우이동으로 향하여 나아가니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다 봄빛과 꽃 소식뿐이다. 우이동 어구에 이르러 아무것보다도 먼저 벚나무 밑으로 달려들어 꽃가지를 들여다 보니 아직도 만개는 멀었으나 방긋방긋 웃으려는 꽃봉오리가 저으기 멀리 온 손의 춘흥을 돋워줌직하다. 군데군데 한 송이, 두 송이씩 벌어져 오는 꽃님들은 즐거운 삼춘을 저 홀로 즐기는 듯, 걸음을 내놓아 손의암이 머물러 있던 별장 정문 앞을 다다르니 좌우 언덕에는 두운화 만개하여 핏빛이 무르녹고, 멀리 들리는 계류소리는 그윽히 다한한 청춘의 눈물을 이끄는데, 저물어가는 석양 아래 쓸쓸히 우뚝 솟은 주인 잃은 손의암 별장 담 너머로부터 청량한 피리 소리가 흘러나오고, 산골로부터 내리는 저녁 바람에 뜰 위에 솟아있던 행화나무 가지에서 두세 잎 꽃잎이 나부껴 넘어옴도 한 경(景)이었으며, 삼각산 수려한 높은 봉 아래로 맑은 시냇물이 졸졸이 노래를 아뢰이며 흘러내리고 유록빛 잔디밭과 천변의 암석들은 풍류객의 찾음이 가까워옴을 말없이 즐기는 듯, 저편 솔밭 사이로 나무를 지고 내려오는 나이 어린 목동에게 꽃 소식을 물으니, 새삼스러히 늦은 누화(樓花) 가지를 쳐다보며, "이제도 열흘 밤은 자야 다 피겠읍니다"한다. 아마도 우이동 꽃구경은 다음 일요일이 제일 좋을 듯 하더라.'

  한편 우이동에서 수유동으로 가는 도중에는 고찰 화계사가 있는데 수림중의 그윽한 경치를 차지하여 4계절 서울 시민들의 유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절은 중종 17년(1522) 신월(信月) 장로(長老)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하는데 고종 3년(1866)에 용선(龍船), 범운(梵雲) 두 대사에 의하여 중수된 건물이 남아 전한다.
  또 우이동에서 서쪽으로 백운대 오르는 길을 따라 풀 나무 무성한 사이로 좁은 길을 헤치며 20분쯤 올라가면 인수, 백운, 만경의 세 봉우리가 머리 위로 쳐다보이고 계곡, 수석의 풍경의 좋은 곳에 옛 절 도선사(道詵寺)가 있는데 수림중의 석탑과 함께 큰 암면 불상이 있어 유명하다.

 

                                        <서울六百年史>

'牛耳洞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곡九曲  (0) 2007.03.06
[스크랩] 우이령길  (0) 2006.12.07
<우이동> 서울의 문학지도 - 삼각산 쇠귀골(우이동)  (0) 2005.12.25
제12회 우이령 걷기대회  (0) 2005.12.08
우이동  (0) 2005.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