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이구곡의 제1곡인 만경폭 | 정상에 올라 땀 훔치고 고함 한번 지르고 내려오는 것이 등산일까. 요즘 산을 찾는 일은 주로 스포츠나 레저 차원에서 얘기될 뿐이다. 그러나 구곡(九曲)을 알면 생각이 바뀔 수 있다.
산(山)과 수(水),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계곡과 냇물을 끼고 정상까지 오르는 길에는 굽이와 마디에 따라 수많은 경치의 변화가 나타난다. 계곡의 높낮이와 냇물의 방향, 주변 산세의 흐름과 그에 따른 시계(視界)의 변화 등이 경치를 달리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같은 아홉굽이(九曲)의 변화상에 자신을 내맡긴 채 쉬엄쉬엄 담론과 시화(詩畵)로 내면세계를 닦는 것, 바로 그것이「우리식 자연감상법」이자 옛 선비들이 구곡을 설정하고 찾은 이유였다. 산세의 경치를 마음속에 담지 못하고 오르기만 하는 것으로는 능사가 아니라는 얘기다.
구곡이란 동양 고전철학의 「홍범구주」(洪範 九疇)에서「가장 큰 수 9」의 개념을 따온 뒤 산세 좋은 지역의 물가에 순서대로 아홉 장소를 선정해 이를 선비의 이상향으로 삼은 것. 중국 송나라 때의 주자가 무이구곡을 노래한 뒤 조선시대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구곡경영은 유행처럼 번졌다.
동양 고전철학‘洪範九疇’개념서 따와
만경폭(萬景瀑·제1곡)을 바라보며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면 아늑하면서도 반짝이는 적취병(積翠屛·제2곡)에 이르고 찬운봉(瓚雲峯·제3곡)으로 한걸음 더 내려서면 우람한 백운대가 돌연 등뒤로 자태를 드러낸다.
계곡의 바윗돌들을 건너뛰며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늘어선 진의강(振衣岡· 제4곡)을 지나면 냇물이 연초록빛 이끼 낀 바위 위를 흐르는 옥경대(玉鏡臺·제5곡). 여기서 옛 선비들은 시회를 열고 붓을 씻었다.
이어 시야가 툭 트이며 멀리 도봉산 자락이 하늘의 관인양 자태를 드러내는 월영담(月影潭·제6곡), 북쪽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작은 급류와 합쳐 동쪽으로 휘돌아가는 탁영암(濯纓巖·제7곡), 제법 물줄기가 굵어지는 명옥탄(鳴玉灘·제8곡), 마을 입구의 정자가 들어선 재간정(在磵亭·제9곡) 등이 이어진다」
이렇게 그럴듯한 경치가 서울 우이동 도선사 바로 밑의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면 믿어질까. 조선조 영정조 때의 대학자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설정한 우이구곡(牛耳九曲)이 이곳.
계곡 자 체가 입산금지 지역인데다 각 장소의 이름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지만 2km도 채 되지 않는 이 계곡을 직접 답사할 수 있다면 그의 말이 오늘에도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60년대 도선사와 흉물스런 요정 그리고 진입도로가 들어서면서 제6~9곡을 완전히 훼손, 옛모습을 그대로 찾기는 어렵다.
이렇게 굽이굽이를 돌아가며 옛 선비들과 같은 방식으로 경치를 즐길 수 있는 장소가 확인된 곳 만도 전국에 30개소가 넘는다.
재미있는 것은 몇몇 군부대 주둔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현재 유원지나 수몰지구라는 점. 아무도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모르지만 경치만은 빼어나다 보니 먹고마시는 유원지로 전락하거나, 인간의 필요에 따라 계곡을 막는 바람에 수몰된 것도 정해진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구곡의 이름을 꼭 알아야 할 이유는 없지요. 그러나 단순히 등산만 하거나 먹고 마시러 산과 계곡을 찾는 것과 「아, 옛사람들은 여기서 이상향을 발견했구나」라고 생각하고 그 흔적을 찾아 즐기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요』
이 30여개소 가운데 이미 알려지거나 북한지역 또는 군부대 주둔지역 안에 있는 5, 6개소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구곡을 찾아내고 답사한 최종현(崔宗鉉·53·우리공간문화연구소장)씨의 말이다. 알고 느끼지 못한다면 설교나 강요를 통해「국토」와 「우리 공간」에 대한 사랑이 생기겠느냐는 지적이다.
예컨대, 계곡 곳곳에 제1~9곡의 각자(刻字)가 모두 남아있는 소백산 자락의 죽계구곡이 우리나라 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구곡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곳을 찾을 때와 그저 무심코 지나칠 때 느낌이 같을 수 있을까.
자연도 감상하고 국토도 사랑하고 ‘一石二鳥’
만약 이곳 저곳의 구곡을 다녀볼 기회가 있다면 대개 제9곡이 끝나는 곳쯤에 불교사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이것은 주변에 장원(莊園)을 소유한 유학자들이 이를 유지 관리하기 위해 당시의 승려들을 동원한 흔적이고 여기서 당시의 사회상까지 확인할 수 있다고 최소장은 설명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전통철학사상에 조금 식견이 있는 사람은 가외의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구곡을 획정하고 경영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대개 영남학파(이퇴계 문하)와 기호학파(이율곡 문하) 일색이고 남명 조식선생 계열에선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혹시 실사구시 정신에 따라 인(仁)보다는 의(義)를 중시하며 평생 관직을 멀리한 그의 학문 경향이 구곡과 같은 유토피아 지향의 다른 학자들과 차이를 낳은 것은 아닐까. 철학을 생활사의 관점에서 되짚어 생각케하는 대목이다.
이렇게 보면 산수(山水)와 자연의 문제가 결코 그것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생활과 철학의 문제에 밀접하게 엮이는 것임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우리 국토에 대한 진짜 사랑이 싹트는 것이라고 최소장은 지적한다.
그의「구곡찾기」에는 25년 이상이 걸렸다. 남들이「돈 안되는 일」이라고 내팽겨쳐둔 문제를 전공 공부하는 짬짬이 혼자 찾아 헤맨 탓이다.
『도시계획학도의 입장에서 우리 고유의 취락을 공부하다가 구곡도(九曲圖)가 그려진 지도나 병풍을 자주 접하게 됐지요. 그러다가 지난 1970년 안동의 의성 김씨 가문에서 반변구곡 얘기를 듣고 또 화양구곡도가 그려진 병풍을 보면서부터 「샛길」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79년경엔 아예 구곡 경영의 원조인 주자부터 공부하려고 주자대전(朱子大典)을 산 것이 본격 탐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구곡 탐사는 결코 단순한 회고 취미나 강단(講壇)의 관심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땅을 가슴으로 끌어안으려는 그의 시도가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다가온다.
<김창희 기자> newsroom@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