牛耳洞 이야기

<우이동> 서울의 문학지도 - 삼각산 쇠귀골(우이동)

洪 海 里 2005. 12. 25. 19:55
서울의 문학지도 - 삼각산 쇠귀골(우이동)

 

김 홍 우  

   우이동의 옛 명칭은 ‘쇠귀골’이다. 쇠귀의 서쪽에는 북한산이 있고 그 우측으로 우이령(쇳고개)을 거쳐 북쪽 우이암牛耳岩, 오봉五峰을 바라보면 그 뒤켠으로 도봉산道峰山(739.5m)이 보인다. 그러니까 우이동은 북한산성으로부터 3연봉 만경봉·백운봉·인수봉까지 합치면 산으로 둘러싸여 ‘쇠귀골’이라고 불려졌다.

   1950년 전만 해도 밤이면 닭, 돼지, 개가 늑대의 무리나 호랑이에게 물려갔다 한다. 당시의 도선사 주지인 정해선 스님은 밤에 절을 오를라치면 호랑이가 멀리서 길을 밝혀주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필자가 살던 곳에서도 간간이 산돼지나 노루, 토끼를 걸머메고 내려오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한국전쟁이 나자 사람들은 허기를 채우느라 사냥과 열매 채취에 나섰다. 여기에 빨치산 소탕작전의 총성에 짐승들은 모두 도망쳐버렸다.까닭에 정부가 환도할 즈음엔 사나운 짐승은 눈에 띄지 않고 노루나 토끼 만이 눈에 들었다.

우이동은 백운대 앞 깔딱고개에서 좌측 우이령에 이르는 중앙엔 농바위와 소당바위가 있어 다른 곳은 굶어도 우이동 사람은 굶지 않는다는 설화가 전한다.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산을 붉게 물들이고 기암괴석이 많아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현재는 환경보호 차원에서 출입이 통제되고 있지만 농바위 밑 ‘샛골’에는 이른 봄이면 도롱뇽이 알을 낳아 약으로 먹었으며, 여름이면 가재잡이를 즐기고 가을이면 각종 열매에 버섯 채취도 하던 곳이다.
반면 만경대에서 좌측으로 능선을 따르면 북한산성이 조성되어 있고, 이는 세검정·승가사 뒷산 비봉(진흥왕 순수비)까지 연결된다.

   이 북한산성은 백제 개루왕(468년) 시대 토성으로 조성되었으나 지금 모양으로 만들어지기는 조선 숙종 57년(1711)이다. 높이 18척, 둘레 9척, 세 군데 장대를 세우고 14개의 문을 만들어 국망봉부터 원효, 문수봉까지 40리에 걸쳐 조성되었는데 일부 헐리기도 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선운각 뒤로 산성에 이르는 골은 깊기가 이를데 없어 옛부터 ‘긴골’이라 불렀다.

   이곳에는 봄이면 나물 채취하는 남녀들이 붐볐으며 나무가 울창해 각종 열매가 지천에 깔려 있고, 6·25 직후엔 공비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을 했다. 이 긴골에서 흐르는 냇물은 우이령밑(병문안) 계곡에서 흐르는 냇물과 그린 파크 호텔 입구에서 만나 쌍문동과 수유리를 가로질러 하나의 내로 연결된다. 6·25 전만 해도 우이동에는 손병희 묘소 옆 鳳皇閣에는 많은 서생들이 천도교를 공부했고 그 봉황각 아랫마을에서 필자는 태어나 잔뼈가 굵었다.
   지금 우이동 도선사 입구의 유일한 아파트 단지는 50년대까지만 해도 육당 崔南善이 거쳐하던 곳이다. 도로에서 육당의 집 들어가는 1백여 미터의 길섶에는 벚나무가 서 있었다. 지금 아파트 단지 끝자락에는 그의 기념탑만이 남아 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손병희 묘소 근처에 수필가 이양하李敭河와 張英淑이 이사해 왔고, 60년대 초 이양하 서거 후 유택에는 장영숙의 오빠되는 시인 張瑞彦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장서언은 시인 金起林과 같이 모더니즘 계통의 시인이었는데 한때 극단 신협에 가담, 배우로서 활동한 바도 있다. 담을 사이에 하고 필자는 그 분과 자주 만나 옛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즈음 집이 많이 늘기 시작해 洪海里, 박신정 시인은 한참 후에야 뿌리를 내린다. 4·19탑부터 가오리까지는 시인 宋爀과 章湖, 극작가 徐恒錫이 뿌리박고 살았으나 이제 그들은 모두 고인이 되었다. 그곳에서 후예들인 소설가 김문수, 강유일, 김중태, 시조시인 박상문, 수필가, 변해명, 이순향 등이 필봉을 휘두르고 있다.가오리부터 화계사 주변까지는 소설가 김국태, 강금숙, 김경남, 김계덕, 김용길, 이영호, 시조시인 오석필등과 수필가 권영자가 살고 있다.
   그리고 우이천에 인접한 쌍문동과 창동 가까이 소설가 박연희, 시인 박희진, 임보, 손보순, 함동선, 황금찬, 채희문 등과 수필가 김양일, 이명희 평론가 이은경, 한성유 등이 살고 있다.그리고 소원동산에서 개울 건너 고개를 넘으면 연산군 묘역인데 우리나라 신파극작의 대가 林仙圭가 살던 곳이 있는데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도 이곳에서 쓰여진 작품이다. 연산묘로부터 창동, 의정부를 잇는 길까지는 아파트 단지가 20여 년 사이 들어찼다.

   시인 이생진과 극작가 전옥주 등도 이곳으로 이사, 지금 생활하고 있는데 예전엔 논밭과 배나무밭이었다. 1960년까지만 해도 전기는 물론, 수도물 혜택도 못 받던 우이동, 버스를 타기 위해 가오리를 거쳐 무너미까지 걸어야 했던 산골 마을 쇠귀골, 지금 생각하면 3·40년만에 우이동의 지도는 참으로 많이도 변모했다.

(희곡작가·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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