牛耳洞 이야기

우이동

洪 海 里 2005. 12. 6. 05:05

『서울六百年史』

 

우이동牛耳洞

 

 

우이동은 북한산과 도봉산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행정구역상으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우이리였다. 동소문(혜화문)밖에서 약 20리로 서울 중심지에서 좀 먼 거리이지만 자동차, 기차(창동역)편이 있고 또 옛날부터 명승지로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여름철에는 수석을 즐기고, 봄가을에는 꽃과 단풍을 구경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간다.
북한산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맑은 물이 간간이 돌을 파서 못을 이루고, 다시 바위와 언덕을 감싸면서 이리 저리 돌아 흐르며 냇가를 따라서 자연의 화초가 풍경을 장식하고 우거진 수림이 해를 가리우니 사계절의 경치가 매우 좋다.
뿐만 아니라 우이동의 벚꽃은 특히 유명하여 일찍부터 봄철만 되면 벚꽃 구경으로 인파가 골짜기를 메웠다. 그런데 이 우이동의 벚꽃은 약 200여년전 정조조의 문무겸전한 인물로 널리 알리어진 대신 홍양호(洪良浩)가 일본에 가는 통신사편에 부탁하여 길야앵(吉野櫻) 수백 그루를 가져다 심은데서부터 유명하여 졌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홍양호가 일본의 앵목을 구해다 심은 것은 꽃구경을 하기 위해서 보다 활 만드는 재료로서 벚나무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는데, 심어놓고 보니 꽃이 좋아 꽃 구경으로 한 몫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일제강점기에 와서는 이계 홍양호가 일본에서 가져다 심었던 벚꽃 나무는 이미 고목이 되어 전날의 성황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전부터 이 곳에 많이 자생하던 산벚꽃나무는 이미 고목이 되어 전날의 성황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전부터 이 곳에 많이 자생하던 산벚꽃나무가 더욱 무성하여 봄철이 되면 산록이 연분홍의 벚꽃으로 덮이니 우이동은 여전히 벚꽃의 명소로 이름 높게 되었다.[註23] 동아일보(1920년 4월 17일자)의 「양춘(陽春)의 낙원 우이동」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아래와 같은 기사로서 당시의 우이동 벚꽃이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뜻한 봄 바람이 남으로부터 불어오고 말랐던 나무 끝에 푸른 싹이 터 나오더니 이 나름의 경성 천지는 꽃 세계, 꽃 도읍이 되었다. 장충단 개나리는 벌써 시들어가기를 시작하거니와 시내 도처에 담 밖으로 생긋 웃고 내다보는 행화(杏花), 도화(桃花)들도 양춘(陽春)을 찬미한다. 더욱이 요사이 며칠은 일기가 화창하고 춘풍은 온화하여 혹은 도보로 혹은 전차로 꽃 빛을 그리고 춘흥을 못 이기어 시외로 놀러나가는 이가 차차 많아지게 되었다. 이에 연래로 만도(滿都) 인사에게 향기로운 웃음과 유려한 맵시로 말 없는 기쁨을 주며 소리 없는 복음을 전하여 경성 인사의 따뜻한 사랑을 저 혼자 차지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꽃 소문이 높은 우이동 「벚꽃」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코자 우이동으로 향하여 나아가니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다 봄 빛과 꽃 소식 뿐이다. 우이동 어구에 이르러 아무 것보다도 먼저 벚나무 밑으로 달려들어 꽃가지를 들여다 보니 아직도 만개는 멀었으나 방긋방긋 웃으려는 꽃봉오리가 저으기 멀리 온 손의 춘흥을 돋워줌직하다. 군데군데 한송이, 두송이씩 벌어져 오는 꽃님들은 즐거운 삼춘을 저 홀로 즐기는 듯, 걸음을 내 놓아 손의암이 머물러있던 별장 정문앞을 다다르니 좌우 언덕에는 두운화 만개하여 핏빛이 무르녹고, 멀리 들리는 계류소리는 그윽히 다한한 청춘의 눈물을 이끄는데, 저물어가는 석양 아래 쓸쓸히 우뚝 솟은 주인 잃은 손의암 별장 담 너머로부터 청량한 피리 소리가 흘러나오고, 산골로부터 내리는 저녁 바람에 뜰 위에 솟아있던 행화나무 가지에서 두 세잎 꽃잎이 나부껴 넘어옴도 한 경(景)이었으며, 삼각산 수려한 높은 봉 아래로 맑은 시냇물이 졸졸이 노래를 아뢰이며 흘러내리고 유록빛 잔디밭과 천변의 암석들은 풍류객의 찾음이 가까워옴을 말없이 즐기는 듯, 저편 솔밭 사이로 나무를 지고 내려오는 나이 어린 목동에게 꽃 소식을 물으니, 새삼스러히 늦은 누화(樓花) 가지를 쳐다보며, 「이제도 열흘 밤은 자야 다 피겠읍니다」한다. 아마도 우이동 꽃구경은 다음 일요일이 제일 좋을 듯 하더라.」

한편 우이동에서 수유동으로 가는 도중에는 고찰 화계사가 있는데 수림중의 그윽한 경치를 차지하여 4계절 서울 시민들의 유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절은 중종 17년(1522) 신월(信月) 장로(長老)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하는데 고종 3년(1866)에 용선(龍船), 범운(梵雲) 두 대사에 의하여 중수된 건물이 남아 전한다.
또 우이동에서 서쪽으로 백운대 오르는 길을 따라 풀 나무 무성한 사이로 좁은 길을 헤치며 20분쯤 올라가면 인수, 백운, 만경의 세 봉우리가 머리 위로 쳐다보이고 계곡, 수석의 풍경의 좋은 곳에 옛 절 도선사(道詵寺)가 있는데 수림중의 석탑과 함께 큰 암면 불상이 있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