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독종毒種』2012

<詩> 씹다

洪 海 里 2008. 3. 5. 07:24

 

씹다

洪 海 里


씹을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세상이 얼마나 질기고 단단했던지
이빨이 다 닳아 시리고 아프다
뭐든 손에서 입으로 직행하는 아이처럼
나도 씹고 싶은 것이 많았다
싶다 싶다 하면서 씹고 싶어
오징어 땅콩처럼 세상을 씹기도 하고
물 같은 세월을 씹기도 했다
입을 씹고 칼을 씹고 돈을 씹었다
치과 의자에 누워
이빨로 세상을 본다
어금니 하나 뽑아내고
양쪽 이를 걸어 다리를 놓아
이승의 한겨울을 건너고 있다
부드러운 애첩 같은 혀는
평생을 같이 해도 닳지 않는데
이빨은 단단해서 목숨이 단단短短하다
내가 너무 허술해서 허수했던가
씹는 일에만 급급했지
씹히는 아픔은 생각도 못했다
씹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지만
씹을 것이 없으면 죽을 목숨
씹는 재미마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동안이 뜬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는 줄곧 서서 무엇으로 씹는가
곰곰 생각해 보니
나무의 이빨은 투명하고 부드러운 혀 같은 뿌리다

                                                          (『시와 사람』2008. 여름호, 49호)


 

* 동안이 뜨다 : 시간이 꽤 걸리다, 거리가 좀 멀다 

 

- 시집『독종』(2012, 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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