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동 시인들> 제16집『깊은 골짝 기슭마다』
우이동 소리
쓰는 일과 남는 일
채 희 문
문학과 예술작품은 생산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남겨 오래도
록 보존하는 것도 그와 못지않게 중요하다.
아무리 각광 또는 인정을 받던 작가라도 그에 대한 것이 후
대에까지 기리 보존되지 않으면 하룻밤 밤하늘을 장식하던 불
꽃놀이에 그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에 대한 자료들이 잘 지켜져 오래도
록 간직되어질 때 그것은 끝없는 생명력으로 점화되며 역사
속에 빛나는 페이지로 수놓아져 갈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생산에만 급급할 뿐, 남겨 지킬 줄
모르며 , 잘 간직하고 보존하는데 서투르다.
재작년 여름 서울에서는 2개의 색다른 기획전이 있었다.
'한국신문학특별기회전'과 '춘원이광수탄생1백주년기념전'
이 바로 그것이다.
2개의 행사 모두 문학 관계 전시회로는 우리 문학사상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할 수 잇다. 그러나 2개의 전시회를 둘러본 관
심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가슴 한 구석에 이는 썰렁한 바람
을 느꼈으리라.
물론 한 사설 박물관의 20년에 걸친 자료수집의 노력은
일단 가상할 만했으나, 다른 나라의 경우에 비해 전시품들이
질과 양적인 면에서 너무나 빈약함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하긴 시인이나 작가의 개인 기념관 하나 없고, 종합 문학
박물관도 없는 이 나라에서 그러한 기대는 무리였는지도 모른
다. 아니, 작가의 가족이나 친지들조차 그들의 유품을 달가워
하지 않거나 부담스런 짐처럼 여기기 일쑤인 풍토에서 그러한
현상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은다.
1천1백여년 전 당나라에 '방림십철芳林十哲'이라는 시동
인이 있었다. '구화사준九華四俊'이라고도 일컫는 이들은
허당, 주요, 장빈, 장교 등의 시객詩客이 주요 멤버였다.
이 방림십철은 산수가 수려한 구화산九華山을 중심으로
자연을 사랑하며 시와 술(詩酒)을 함께 즐겼다.
그들은 권력과 금력의 세파를 풍자하며, 주로 농민들과 같
은 불우한 백성들의 애환을 진솔하게 노래했는데, 국경을 초
월한 문학적 교유도 왕성하게 가져 신라 유학생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읊은 서정시 41수와 구화산에서 75년간 수도 정진
한 신라의 고승 김교각金喬覺을 기리는 시 80여 수도 함께
전당시全唐詩에 남겼다.
오늘도 북한산 기슭 아래선 필자를 비롯한 우이동 시인 몇
몇이 시작詩作을 중심으로 문학활동을 하고 있다. 이미 동
인지만도 16권째가 출간되었고, 시낭송회도 77회에 걸쳐 개최
되었다.
먼 훗날 과연 누가 있어 우리들을 가리켜 뭐라 평가할 것이
며, 우리의 발자취들은 어디에 어떻게 남겨질 것인가.
들었던 붓을 힘없이 내려놓고 북한산 위에 떠가는 구름을
망연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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