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동 시인들> 제21집『바람 부는 날의 수선화』
우이동 소리
딱따구리 새의 시낭송
이생진
시를 읽는다. 숙명의 문서를 읽듯 시를 읽는다. 송상욱*
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나는 그 소리에 맞춰 시를 읽
는다. 시낭송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법도 없고 그래서는
안된다는 법도 없이 하나는 기타를 치고 하나는 시를 읽
는다. 그것이 듣는 사람을 감동시켰다면 그것은 죽이 됐
든 밥이 됐든 먹거리가 된 셈이다.
어느날 나는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자판기에서 뽑아온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축 늘어진 어깨에서 그의 얼
굴을 내려놓듯 기타를 내려놓는 사람을 보았다. 그가 송
상욱이다. 그는 시인이었다. 일찍이 아내를 잃고 아내 대
신에 기타를 메고 떠도는 시인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동
안 우리는 함께 떠돌았다. 사흘 동안 자리를 같이하며 그
가 기타보다 더 슬픈 소리를 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나이 60에
기타를 메고 떠도는 시인, 송상욱
축 늘어진 어깨에서 그의 얼굴을 닮은 기타를
대합실 의자에 내려놓을 때까지도
나는 그를 모른다
누군가 그의 눈물을 달래기 위해
밤새워 떴을 털실 모자도
나는 모른다
어둑어둑한 섭섬 앞에 앉아
기타를 치며 저도 따라 우는 시인
'눈물 젖은 손수건'**
이번엔 내가 울었단다
그는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를 울리고 있단다
그날밤 섭섬에서 자던 새가 모두 울었단다
'눈물 젖은 손수건'
자꾸 모여드는 그의 눈물에
손수건이 되어줄 여자 하나 없을까
돌아가라고 떠밀어도 가지 않는
그런 여자 없을까
나이 육십.
남자란 죽은 뒤에도 여자가 필요한 법인데
이젠 늦은 것일까
저 바보 같은 기타가 여자를 대신할 수 있을까
그의 눈물을 닦아줄
손수건 같은 여자 없을까
'눈물 젖은 손수건'
그런 여자 없을까
그리고 서귀포 섭섬 앞에서 <서귀포 칠십 리>를 치며
노래부르는 그의 옆에 가서 이 시를 읽을 테니 기타를
치라고 했다. 그것이 그 즉석에서 잘 맞아들어 둘이는 식
당이고 커피숍이고 어디서나 노래와 시를 기타에 맞춰
울리게 됐다. 시만 읽는 것보다 기타에 싣고 가는 것이
더 감동적이었다.
제주 시내에 있는 갈치국 식당에서 그는 기타에 노래
를 부르고 나는 그에 맞춰 시를 읽었다. 아까 섭섬 앞에
서 낭송할 때보다 더 손발이 잘 맞았다. 박수가 나왔다.
마지못해 치는 박수가 아니라 진짜 성의있는 박수였다.
성공이었다. 저녁식사 후 이번에는 제주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찻집 '엘 그레꼬'로 갔다. 2층으로 된 고급 커피
전문점인데 홀에는 영상 음악을 즐기러 온 젊은이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이 낭송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아니
그들에게 낭송이랑 엉뚱한 짓이었다. 그런데도 불쑥 송상
욱은 기타를 치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불렀고 나는 시
를 읽었다. 내가 소리 높여 읽으면 그는 자기 음성을 낮
췄고 내가 낭송을 낮추면 그가 소리를 높이며 멋있게 낭
송을 도왔다. 불과 7,8분 동안의 연주와 시낭송이었지만 청
중은 쥐죽은 듯이 우리 분위기에 젖고 말았다. 갈치국 식
당에서보다 더 자연스럽고 처량하게 진행됐다. 낭송은 끝
이 나고 기타는 잠시 이어졌다. 박수가 나왔다. 해프닝치
고는 걸작이었다. 나는 어디에서 이런 힘이 생겼는지 모
르겠다. 시가 뭔데 이렇게 생전 다뤄보지 않은 미친 짓
(?)이 이어져 나오는지 몰랐다. 창피하지 않았다. 나는 배
우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고 송 시인은 광대처럼 콧잔
등이가 벌겋게 달아오르며 커피숍을 나왔다. 그리고 우리
는 공항에서 헤어졌다.
그로부터 삼 주일이 지나 '강남골 시낭송회'에서의 시
낭송은 서울에서의 첫 공연, 나는 여기서 공연이란 말을
쓴다. 그날밤 관중들이 정식으로 박수를 쳤기 때문에 그
렇게 말한다. 그곳 사람들은 송 시인이 강남골 시낭송회
회원인데도 그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는 듯이 새삼스
럽게 그를 확인하고 있었다. 허름한 털실 모자에 낡은 등
산복 차림의 송상욱, 나도 송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의 옷
차림, 푸른 등산모에 낡은 등산복 그대로였다.
이번에는 '우이동 시인들'의 우이시牛耳詩 낭송 105회째
에서 마지막 순서로 무대에 올랐다.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의 감정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약간의 소도구를 준비
했다. 배낭에 막걸리 한 병과 두 개의 질그릇 술잔 그리
고 안주. 송시인은 먼저 무대에 올라가 기타를 치며 '눈
물 젖은 손수건'을 부르고 나는 그 노래가 끝날 무렵에
송 시인 옆으로 가서 막걸리를 권했다. 그리고 나도 한 잔
달게 마시고 다음 잔은 관중석에 앉아 있는 시인에게 돌
렸다. 술 마시는 분위기가 자연스러워서 격식에 맞춰하던
시낭송이 아니라 오히려 서투르게 꾸민 장난 연극 같았
지만 그런 대로 관중들은 좋아하는 눈치였다. 송상욱은
기타를 치고 나는 술 마신 입을 닦았다. 아무도 그게 무
슨 짓이냐고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때 '집어쳐
라'하고 누구 하나라도 소리치면 나는 새파랗게 질려
쥐구멍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대는 자유스럽고 관중
은 맘대로 해라 하는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때문
에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겠다는 자신감이 나뭇가지에
물오르 듯했다. 다음엔 무슨 해프닝이 일어날지 그걸 예상
하지 못하며 우리 눈치를 살피는 관중의 얼굴이 떠올랐
다. 아직 시 읽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송 시인의
얼굴 모습이 기타 모양 같다는 말을 해서 웃겼다. 그때
송 시인도 기타처럼 웃었다. 나는 그의 얼굴 어깨 그리고
팔 다리 그 움직임이 그대로 시라고 말했다. 그들도 그렇
게 느꼈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송 시인은 그의 노래
를 기타에 맡기듯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맡겼다. 그
리고 나서 나는 송 시인의 혼신을 대변하듯 시를 읽었다.
청중들이 좋아했다. 기타에 맞춰 손뼉을 치지 시작했다.
분위기가 고조되자 짧게 끝나는 것이 아쉬워서 나는 마
지막 절을 반복해서 낭송했다.
나이 육십.
남자란 죽은 뒤에도 여자가 필요한 법인데
이젠 늦은 것일까
저 바보 같은 기타가 여자를 대신할 수 있을까
그의 눈물을 닦아줄
손수건 같은 여자 없을까
'눈물 젖은 손수건'
그런 여자 없을까
박수가 터져나왔다. 왠지 멋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딱따구리 새를 연상했다. 이 나무 저 나무 날
아다니며 벌레가 들어 있을 듯한 나무를 두드리는 딱따
구리 새. 먹이를 찾아낸 기쁨도 기쁨이지만 먹이를 찾을
때 두드린 통나무 소리, 그것이 아름다워서 기뻤다. 그것
은 가난한 시인들을 살게 하는 매력인지도 모른다. 관중
이 없고 박수가 없어도 이런 식으로 시를 읽어야 하는
시인의 사명 같은 것을 체험했다. 나와 송 시인은 그렇게
떠돌기로 했다. 그런 사업에 늘 동참할 수 없다 하더라도
마음만은 그런 식으로 시를 대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
었다. 송 시인의 얼굴이 기타를 닮듯 나도 시를 닮은 얼
굴을 갖고 싶다.
* 송상욱宋相煜 :1939년생. 시집 <망각의 바람><영혼 속의 새><승천하는 죄><하늘 뒤의 사람
들> 등이 있음. 한국현대시인상 수상.
** '눈물 젖은 손수건' : 송상욱 시인이 기타를 치며 부르던 노래 중에서.
(『바람 부는 날의 수선화』작가정신, 1997, 정가 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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