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스크랩] 홍해리 선생의 시와 백작약

洪 海 里 2009. 4. 9. 05:40

 

얼마 동안의 꽃샘추위가 사라지자

봄의 불청객 연무가 시야를 어지럽히는데

차창 밖으로 문득 하얀 게 눈에 띄어

내려 본 즉 바로 이 백작약이다.


원래 백작약은 약재로 쓰는 산작약의 뿌리를 말하는데

나는 일찍이 이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꽃을 본 적이 없었다.

산 속에서 이슬만 먹고 자란 것으로 생각되는 들꽃의 여왕,

어디서 데려왔는지 가난한 수선화 아파트 화단을 장식하고 있었다.


낮에 시간을 내어 해마다 찾는 월평동 오른쪽 첫 집에 가본 즉

아뿔싸! 20송이 정도 찬란하게 빛나던 백작약이 

병을 얻었는지 제초제를 했는지 뭉게진 모습이 너무 애처롭다.

작년 것을 두어 장 곁들인다.

 

 

♣ 화사기花史記 - 홍해리(洪海里)

    

♧ 하나


처음 내 가슴의 꽃밭은

열여덟 살 시골처녀

그 환한 무명의 빛

살 비비는 비둘기 떼

미지의 아득한 꿈

흔들리는 순수의 密香

뿌연 새벽의 불빛

즐거운 아침의 연가

혼자서 피 아프게 뒤채이던 늪

아침까지 출렁이며 울부짖는

꽃의 바람, 드디어의 開門.


 

♧ 둘


꽃밭의 꽃은 항상

은밀한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나의 눈썹은 현악기

가벼운 현의 떨림으로

겨우내 기갈의 암흑 속에서

눈물만큼이나 가벼이 지녀온

나약한 웃음을,

잔잔한 강물소리를, 그리고 있었다

조용한 새벽을 기다리는

꽃씨도 꽃나무도

겨울을 벗고 있었다

눈은 그곳에도 내리고

강물 위에도 흔들리며 쌓이고 있었다.


 

♧ 셋


내가 마지막 머물렀던 꽃밭엔

안개가 천지 가득한 시간이었다

돌연한 바람에 걷히는 안개

내해의 반짝이는 시간의 둘레에서

찢어지는 울음을 울고 있었다

기인 겨울의 인내 속에서 빚은

푸른 비늘이 깜빡이는 잠

밤새워 울던 두견이 깨고 있었다

어느 꿈결에서든가

맨살로 불타는 목청이

깊이 깊이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생명은 안개 속에서

온 세상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 넷


꽃밭에는 오히려 향그런 불길,

불이 타오르고 있다

오랜 세월의 흐름은

순수한 어둠 속에서 해를 닦아

꿈속의 원시림을 밝히고 있다

어둠 속에서 밝게 피는

한 잎 두 잎의 웃음

웃음의 이파리가 날리는 숲

밤을 먹은 작은 새들이

금빛 햇발을 몇 개씩 물고 있다

황홀한 아침이면

고운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다.


 

♧ 다섯


수를 놓는

아내의 잠은 항상 외롭다

수틀 속 물오른 꽃대궁마다

태양이 껴안겨 있다

손마다 가득 괴는 가슴의 설움

병처럼 깊어 더욱 외롭다

고물고물 숨 쉬는 고요

사색의 이마는 꽃보다 고운

여름의 꿈이 맺혀 있다

꽃은 죽어 여름을 태우고

꿈보다 예쁜 불을 지피고 있다.


 

♧ 여섯


여름바람은 느릿느릿 걸어서 온다

한밤 창가에 흐르는 바람소리

눈을 가리우고

자그만 하늘과 땅을 열고 있다

가을이 오는 꽃밭

겨울 준비를 하는 사철나무

속으로 속으로 잠을 깁는다

성숙한 날개를 자랑하는 잠

천둥도 번개도 멎은

한여름 밤의 해일도 잠든

하늘에는 은밀한 속삭임뿐.


 

♧ 일곱


겨울 열매로 가득 찬 나의 눈

마을마다 아낙들이 치마를 펴

모든 신비와 향수를 맞고 있다

신들은 하늘에서 내려와

땅 속에서 꿈을 빚는다

빨간 꽃도 되고

하얀 꽃, 밀감나무도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미완의 회화

나의 눈은 언제나 허전하다

죽음과도 친한 나의 잠

나의 꽃밭은 텅 비어 있다.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메모 : * 시「화사기花史記」는 두 번째 시집『花史記』(시문학사, 1975)의 표제시입니다. 작약꽃으로 함박함박하게 꾸며주신 김창집 선생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