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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詩와 우리詩 진흥회 │ 박승류

洪 海 里 2009. 8. 20. 10:29

                                 詩와 우리詩 진흥회


                                   
                                                  박승류 (시인)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타자의 좋은 점을 보면 부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나 스스로가 배려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던 터라,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의 슬로건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이라는 문구를 접하던 당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서 다시 <가꾸다>라는 말을 생각한다. 참으로 싱싱함이 느껴진다. 싱싱함이 느껴진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예측하게 된다는 의미다.


누구도 밝은 미래를 원하지 않는 이는 없겠지만, 원한다고 해서 그것을 다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꾸다>라는 말은 바로 그것을 담고 있다. 물론 가꾸는 객체는 <생명과 자연과 시>이고, 주체는 법에서 사람으로 인정한 법인法人이다. 사단법인社團法人 우리詩진흥회, 즉 사람이 주체다. 사람은 자연보다 부족하다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다. 그런데 혼자 힘으로는 부족하니 여럿이 힘을 합쳐 자연을 가꾼다는 뜻일까?


  이는 어쩌면 사람과 사람의 화합, 사람들과 자연의 화합을 지향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詩진흥회의 슬로건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에 담긴 뜻은 어쩌면 이 보다 훨씬 더 깊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러한 지향점은 구성원들의 시에서도 곧잘 나타난다. 많은 구성원들의 시가 그렇지만 여기서는 지면상, 발원인 牛耳詩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를 이끌고 있는 몇몇 시인의 시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구성원으로서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시 · 1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이생진, 「아내와 나 사이」 전문


이 시는 위에서 언급한 사람과 사람의 화합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人)이라는 한자어의 획이 왜 둘이지에 대해, 인간의 간間이 왜 사이를 나타내는 간인지에 대해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전술된 시의 내용과 조화로우니 울림이 있겠지만,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라는 결구는 가슴에 꽂힌다. 이는 늦은 나이가 되어서야 새삼 느끼는, 자신의 배려가 부족했음을 토로하는 의미로 다가온다.


특히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라는 부분과 연결되어 그러하다. <인생?><철학?><종교?> 등을 이유로 너무 많이 다투었음을 말함이다. 다음의,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라는 부분 역시 다툼으로 허비하기엔 아까운 찰나였다는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사회구성원 가족구성원이 있지만, 범위를 좁히면 배우자는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나 아닌 타자, 공동체의 기본적 구성원이다. 구성원에 대한 이런 토로는 어쩌면 겸양의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노시인이 쓴 시의 구절이라는 점에서 그리 추측이 된다. 평생을 시로 자신의 마음을 닦았을 것으로 생각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때문에 더 많이 베풀지 못한 회한이리라 생각하게 된다.

 


-구성원으로서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시 · 2


언덕 위에 서면 바람들의 길이 보였다

바람들도 빛깔이 있었다

투명하지만 색유리처럼 맑고 깨끗한 빛깔이었다

감귤밭을 넘어온 남풍은 노오란 빛

전나무 숲속을 빠져나온 북풍은 청록빛

쪽빛 바다를 밟고 온 서풍은 남빛이었다

바람들은 들판에서 서로 만나

오색 실타래들이 꼬이듯 몸을 부비며 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바람의 실 가닥은 풀리어

초가집 사립문 틈으로 슬며시 스며들기도 하고

어떤 가닥은 잠자는 송아지 코 속으로 조용히 빨려들기도 했다

문득 꺽꺽꺽 장끼 한 마리 숲을 깨고 솟아오르자

황 록 청 백 홍 오색 바람들이 소용돌이치며 몰려와

눈부신 날개를 허공에 만들었다

주위를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이 어찌된 일인가

감귤밭을 향해서는 다시 황색 바람이

쪽빛 바다 쪽으론 다시 남색 바람이

전나무 숲으론 다시 청록색 바람들이

떼를 지어 달려가고 있었다.

                                          -임보, 「바람들의 길」 전문


바람은 모든 것을 무시하고 제멋대로일 때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광풍이라 하는데 이는 바람이 가끔 보여주는 맛보기일 뿐 자연의 본래 모습은 아니다. 맛보기는 공존공영이라는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연의 강력한 메시지는 무분별한 인간의 행위로부터 촉발된다. 때문에 그 역시 바람의, 반갑지는 않지만 중요한 역할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바람은 자신의 길을 따라 흐르다가 어느 시점 <서로 만나 오색 실타래들이 꼬이듯 몸을 부비>며, 동류同類간 서로 보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떤 바람의 실가닥은 풀리어 초가집 사립문 틈으로 슬며시 스며들기도 하고 어떤 가닥은 잠자는 송아지 코 속으로 조용히 빨려들기도> 한다. 이는 동류 간 화합차원을 넘어 인간세상을 보듬는 자연의 너그러움으로 이해해도 되겠다. 너그러움은 배려하는 마음의 근원이다.


  특히 이 시 두 번째 행 <바람들도 빛깔이 있었다>란 언술은 읽는 이로 하여금 바람이 무채색인 이유를 생각나게 한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바탕으로 바람이, 스스로 선택한 자기표현의 한 방법이 되겠다. 때문에 바람은 <투명하고 깨끗한 길을 비롯해 각양각색의 길>을 보여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양보함으로서 획득되는 천연색의 풍성함은, 바람의 겸손한 행위에 대한 결과물이다. 이는 곧 자연의 지혜로운 모습이다.



-구성원으로서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시 · 3


제 몸을 바쳐

저보다 강한 칼을 먹는

숫돌,


영혼에 살이 찌면 무딘 칼이 된다.


날을 세워 살진 마음을 베려면

자신을 갈아


한 생을 빛내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서로 맞붙어 울어야

비로소 이루는

상생相生


칼과 숫돌 사이에는 시린 영혼의 눈물이 있다.

                                 -홍해리, 「숫돌은 자신을 버려 칼을 벼린다」 전문


여기서는 이 시가 마지막으로 읽고 생각해 보는 시편이다. 위의 시들과는 다르게 이 시는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통해 배려의 미학을 되새기고 있다. ‘되새기고 있다’라 함은 누구에게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 스스로가 곰곰이 생각하는 어투라는 의미다. 혹여 자신의 영혼은 과대하게 살찌지 않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벼리는 일이 남았을 것인데, 벼리는 것을 시인은 상생相生으로 그 의미를 도출해 낸다.


칼은 무뎌진 자신의 날을 벼리는 것이니 타자로부터 받는 것이라 한다면, 숫돌은 그 반대이니 주는 것으로 이해함이 통상적인 양자의 역할役割이다. 하지만 시인의 사유는 다르다. 칼을 벼리는 그 행위로 숫돌 또한 얻는 것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숫돌이 자신을 소모하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네 번째 연, <한 생을 빛내고, / 살아남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이다. 숫돌의 존재이유를 말함이다.


  칼이 없었다면, 날이 무디어진 칼이 없었다면 숫돌은 무엇으로 자신의 존재이유를 확인할 수 있을까? 존재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면 살아도 살아있는 생명이 아닐 수 있다. 여기서 바로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성찰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한지만 이러한 숫돌論은 근본적으로 배려의 마음을 바탕으로 한다. 아무리 제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해도 배려의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만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다.



-가꾸는 것에는 배려가 바탕이 된다


어쨌든 위의 시들은 모두 화합을 말하고 있다. 누구에게? 누구와의 관계에서? 생명체에게, 자연에게, 그리고 생명이 없는 사물에게까지 그것을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다. 물론 詩에게도 마찬가지다. 이쯤에서 서두에 언급했던 <가꾸다>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가꾸는 마음은 <배려>를 바탕으로 한다. 감정을 가꾸는 것뿐만 아니라 육안으로 보이는 실체를 가꾸는 것에도 그것은 필수요소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詩진흥회>가 완벽해서 타자에게 베풀려는 생각을 가진다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세상에 완벽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은 아니며, 우리詩진흥회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詩진흥회>는 <가꾸다>라는 말에서 느끼는 싱싱함을 현실로 만나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때문에 연중행사로, 찾아가서 만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즉 이것은 추구하는 정신의 문제이다.


이상세계를 추구하려는 사람들 중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또한 시인이다.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나, 그와 관련된 시를 쓰는 것 또한 그것의 일환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런 세계를 지향하는 것에 배려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물론 알고 있을 시인들이니, 그와 관련된 작품이 생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겠는가? 끝으로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 역시 잘 동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박승류 (시인)

2007년 월간 『우리詩』로 등단.

이메일 : psr2300@hanmail.net


출처 : 우리시회(URISI)
글쓴이 : 연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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