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詩 다시 읽기

시집『애란愛蘭』(1998)에서 · 1

洪 海 里 2009. 10. 22. 05:00

 

   洪海里 시인  

   시집 『애란愛蘭』(1998) 에서  

 

시집『애란愛蘭』 머리말

 

 난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난을 기른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함께 산다고 한다. 인격을 부여해 주었기 때문이다. 
 한 30년 가까이 같이 살아오면서도 나는 아직 난을 잘 모른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간에 지은 난에 대한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자 

한다.


 난은 꽃과 향도 좋지만 변함없는 초록빛 잎만도 일품이다. 
난은 기다림을 가르쳐 준다. 은근과 끈기를 익히게 한다. 

무심에 젖게 한다.
 가만히 있어도 난향은 소리없이 귀에 들리고 가슴에 온다. 
움직이지 않는 그 춤은 언제나 눈으로 들고 마음에 찬다.
 아무래도 나는 식물성이다. 
한 포기 풀로 풀만 바라보며 사는 청복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단기 4331년 한여름에
                                                            우이동 洗蘭軒에서
                                                                     洪 海 里 

 

 

토란 잎에 이슬 방울 / 홍해리

 

한 치 앞까지 가리던 낙월도 안개
저기 있네

물꽃을 피우던 뜨거운 파도와 폭포
거기 있네

아슬아슬 눈에 밟히는 슬픈 사랑
여기 있네

수정처럼 빛나는 동그마한 우주
저기 있네.

 

 

개불알란 / 홍해리

 

비워둔 
자리마다
소리없이
홀로
울고 있는


삽상한
산마루
바람소리에
홀로
거풍擧風*하고 있는
너.

 

* 거풍 : 산상에 누워 국부를 꺼내 바람을 쐬는 옛사람들의 피서법의 일종.

 

 

마음이 도둑이다 / 홍해리

 

비운다 비운다며 채우려 들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보려고 들고
들리지 않는 것도 들으려 들고
먹지 못할 것까지 먹으려 들고
해서 안 될 말까지 하려고 드는
요놈의 미운 마음, 도둑이구나!

 

 

지명知命 / 홍해리

 

온몸의 단맛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이제
한 알 영롱한 사리 같은
단단한 정신을 위하여
몸은 쓴맛을 밀물처럼 기다리는
어느새
쓴맛이 단 세상이 되었다.

 

 

위리안치圍籬安置 / 홍해리

 

하늘에 바다에
길이 있듯이

마음에도 길이 있어
너에게 가는

가시밭길도
길이 들면

생량머리엔
빛나는 자유가 되네

그대 안에 갇혀서도
자유로웁네.

 

 

저 혼자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 홍해리

 

저 혼자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저 혼자 깨어나고
저 혼자 잠이 들어

천리 밖 작은 목숨 하나
숨을 놓고 떠나가나

매화 꽃잎 하나 소리없이 지고
어디선가 바람이 인다.

 

 

적아소심赤芽素心 / 홍해리

 

세상 오다 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비는 우주공간을 떠돌다 떠돌다
몸 바꾸기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걸어오다 뛰어오다 도망치다
다시 달라붙기도 하네
번개도 치지 않고 천둥도 울지 않고
사냥개처럼 하늘이 젖어도
그대의 행성에는 달맞이꽃이 피고
우기의 구름 사이, 문득
적아소심이 푸른 하늘처럼 잠을 깼다는
삽상한 소식이 귓속에 찬란히 피네
그리운 심정으로 꽃대를 올려
슬픔 같은 꽃잎으로 가을날을 밝히니
눈 마주치기도 두려우리, 그대여
부드러운 물칼 같은 혓바닥으로
우주의 초연한 질서를 노래하는
꽃 속으로 천리를 가면
적멸보궁 지붕 끝이 보이리.

 

 

허핍虛乏 / 홍해리

 

손 한 번 흔들지 않고
너는 그렇게 가고
벽에 갇힌 시간은 죽었다
살아 있음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닫혀 있는 문밖에서
꿈은 깨기 위하여 꾸고 ㅡ.

인생은 짧은 여정
그 짧은 여정 속의 짧은 여정이여
너를 위하여
치마폭만한 자리를 마련하고
홀로 부르는 이름만
허공중에 맴돌다 사라지는 자리
홀로 선 난이여.

 

 

아카사니* / 홍해리

 

눈물 속에서
꽃은 피지 않는다

절정은 없고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눈 속에서
눈물만 솟고 있다

그대를 
밝히는.

 

* 아카사니 : 힘을 써서 무거운 물건을 쳐들려고 할 때 내는 소리. 

 

 

난잎 질 때 / 홍해리

 

곧던 잎 점점 휘어지고
검푸르던 빛깔 누렇게 변해
마침내 똑! 떨어질 때

저 하늘의 작은 별
깜빡! 하며
마지막 숨을 놓는다

광대무변의 세상 점 하나 지워지고
한 순간
눈물 방울 하나 갸우뚱한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지구는 돌고
그렇다, 권위도 순서도 없는
죽음이란 분명한 사실일 뿐

아버지도 그랬고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도 그랬듯이
아들도 아들의 아들도 손자도 그럴 것이듯

눈물도 이슬처럼 햇빛 속에 숨고
자신이 몸을 낮추어
울음으로 찰나의 집 한 채 짓는다.

 

 

남은 길 / 홍해리

 

가자, 벙어리 장님 되어 그냥 가자
가지나무 이파리 무당벌레야
저기 불덩어리 저녁놀 가슴 좀 보아
움찍 않고 달라붙은 무당벌레야
남은 길이 어둠으로 잦아들어도
움찍 않고 붙어 있는 무당벌레야
가자, 벙어리 장님 되어 그냥 가자.

 

 

wet ladybird

 

 

상강霜降에도 난은 피어 / 홍해리

 

찬 서리 지천으로 내려 쌓여도
온 산천 불이 붙어 눈을 데이네
타는 가슴 목마름을 어이하리야
불끈 새벽 이 하늘을 어이하리야
불끈 새벽 이 하늘을 어이하리야.

 

 

ladybird

 

보춘화報春花 / 홍해리

 

2월이 오면
너에게서 말씀 하나가 서네

불안한, 불가해한, 불가사의한, 세상
네 속으로 들어가
머물 별 하나 찾아보네

참, 오래 기다렸다
지난해 무덥던 삼복 중에 너를 만나
멀리도 왔구나, 난아

모랫바람길 가는 낙타처럼
면벽하고 있는 수도승처럼
더 비울 것 없어 홀가분한 선비처럼

생각과 생각 사이를 뛰어넘어
말과 말 사이에 와 있다
이제 그것도 필요 없는 시간

귀 맑게 트이고
눈도 그렇게 트이도록
네 앞에 조용히 앉았느니

서두르지 말자, 이제
촛불을 꺼야 하리.

 

 

난초꽃 한 송이 벌다 / 홍해리

 

처서가 찾아왔습니다 그대가 반생을 비운 자리에 난초
꽃 한 송이 소리없이 날아와 가득히 피어납니다 많은
세월을 버리고 버린 물소리 고요 속에 소심素心 한 송
이 속살빛으로 속살대며 피어납니다 청산가리 한 덩이
가슴에 품고 밤새도록 달려간다 한들 우리가 꽃나라에
정말 닿을 수 있겠으랴만,

피어나는 꽃을 보고
그대는 꽃이 진다 하고
나는 꽃이 핀다 하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피고 지면서
목숨은 피어나는데 ……,

참 깊은 그대의 수심水深
하늘못이네.

우리가 본시부터
물이고 흙이고 바람이 아니었던가
또는 불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물빛과 하늘빛 속에는 불빛도 피어나 황토빛
내음까지 실렸습니다 올해에도 여지없이 처서가 돌아
와 산천초목들이 숨소리를 거르는데 늦꽃 소심 한 송
이 피어 깊이깊이 가슴에 들어와 안깁니다.

푸르르르르 백옥 같은 몸을 떨며 부비며 난초꽃 한 송이
아프게 피었습니다.

 

 

洪海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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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산 최병무시인의 블로그(http://blog.daum.net/dongsan50)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