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 홍해리
눈이 내리고,
수직으로 내리다
사선으로 내리다
사방으로 떠돌다,
망막을 가득 채우며
하염없이
내리는 막막함 속으로
길이 지워지고,
눈이 없어
가려 앉지 못하는
눈이 내리고
내려도,
흔적이 없는---.
夏安居 / 홍해리
- 閑居日誌 · 1
삼복의 병실
천정에 매달려
면벽하노니,
입도 막고
눈도 닫아걸었으나
귀는 줄창 열려 있어,
바람이 울려주는 풍경소리
마음벽에 암각화 한 폭 그리네
묵언정진 중인
와불 하나 새기고 있네.
-『牛耳詩』(2005년 9월호)
高大山 求路庵에서 / 홍해리
- 閑居日誌 · 2
높은 산의 골짜기
깊은 암자에 몸을 묻고
길을 찾노니,
밤하늘
홀로
날아가는 새.
몸이 가는 길 마음 가지 않고
마음 가는 길 몸이 가지 못하네.
눈이 가는 길, 귀가 가는 길
날아가는 길, 기어가는 길
눈물로 가는 길, 꽃의 길은 끝이 없네.
길은 보이지 않아도
늘 떠나고 있네
구로구로 떠도는 별들로부터.
-『牛耳詩』(2005년 9월호)
입원실에서 / 홍해리
-閑居日誌 · 3
허공에 뜬 와불이 되어
실낱 같은 기대와 나락의 절망에서
시퍼런 대낮이 눈을 번뜩이는 사이
기대에 한없이 기대고
절망에서 끝없이 절망하는
죄 없는 눈물의 수인
분통의 분을 삭이고
통증을 날리는
홀로 있어 외려 외롭지 않은 수인
의심과 원망과 분노와 불안과 긴장과
초조와 걱정과 포기를, 체념을
화두로 끌어안고 묵언 수행하는,
나는 하안거 중인 중.
-『牛耳詩』(2005. 9월호)
꿈속에서 / 홍해리
- 閑居日誌 · 4
"얘야!
많이 힘들지?
애비야, 애비야!
곁에 있어 주지 못해 안됐구나!"
살아생전 제대로 모시지도 못한
자식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눈물 촉촉한 음성은 따뜻한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어머니.
"얘야,
얼마나 아프냐?
애비야,
애비야!"
-『牛耳詩』(2005. 9월호)
수술실에서 나와서 / 홍해리
- 閑居日誌 · 5
그곳은 암흑
죽음의 나라
나의 고향이었다
암흑에서 빛이 나오고
생명이 탄생한다
뱀 한 마리
검은 풀밭을 굴러가고 있다
굴렁쇠의 끝없는 선회
뒤따르는 사람이 없다
사람이 병을 만들고
인류가 병을 정복하려 한다
밤에 통증이 심한 것은
병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때문
어둠을 탈출한 후
나를 되찾기까지의 진통
아픔이 없는 생이 어찌 아름다우랴
나는 암흑의 자식
우주를 유영하는 유한 행성.
-『牛耳詩』(2005. 9월호)
병상일지 / 홍해리
- 閑居日誌 · 6
편안과 무료 속에 마음이 짓는
아름다운 죄 하나 만나
벼리는 고독의 날개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나는 살아 있다
가장 큰 어둠의 날개
펄럭이는 소리 잦아들 때
낙심과 낙담으로 앞이 캄캄하여
세상이 막막하고 망막하다
비에도 젖지 않는 비애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다
내일은 철커덕 닫히는 철문으로
무의식 세계로 들어가는 날
어둠의 빛을 만나 꽃이 되는 날
창도 칼도 무섭지 않은
나는 모순의 방패인가.
-『牛耳詩』(2005. 9월호)
한가한 풍월 / 홍해리
- 閑居日誌 · 7
이렇게 아프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고통도 때로는 그리워지고,
과거는 추억이 되어
마음속에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지.
통증이 좀 가셨다고
이렇게 한가한 소리를 하는 것은
얼마나 염치없는 놀음인가.
죽겠다
죽고 싶다는 건
산사람의 사치.
사랑이여
생이 너무 단조롭거든
때로는 아파 보라.
영원의 가지에 그네를 매고
흔들흔들 흔들리는
내 사랑아.
-『牛耳詩』(2005. 9월호)
언제일지 몰라 / 홍해리
- 閑居日誌 · 8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내 生을 완창으로 풀어낼 이는
누구인가 나인가
목숨의 주인은 누구인가
들리는 소리마다 귀에 익은데
어디가 정상인가
피안은 어디고 차안은 어디인가
'죽고 잡아도 또 살고 싶은'
자는 듯 깬 듯 사는 삶
물소리 요란한 계곡에서
물거품 일으키며 흐르다가
구차한 목숨의 질긴 매듭
풀다 보면 영원의 바다에도 이를까
나의 한 生이 절창이 아니었던들
또 어떻겠는가
잠시 이 몸이 어둠을 깨워 환했다면
고요한 바다에 이르는 가벼움도
다 벗어 놓고 갈 투명한 마음도
기쁨 한 자락으로 환하지 않으랴.
-『牛耳詩』 (2005. 9월호)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 홍해리
- 閑居日誌 · 9
자식들아
치사랑이 어디 그리 쉽겠느냐
새끼들에게
내리사랑이나
제대로 내리거라
애비 에미 껍질만 남는 동안
새끼들은 통통하게 살이 오르지
너희들의 속이 다 빠져나가면서
손주들의 재롱으로
할미 할애비는 얼굴에 꽃을 피운단다
새끼들이 세상에 태어나
얼마나 많은 기쁨을 주었는가
생각하라
에미 애비여
그리하여
자식들은 또 제 새끼들에게서
얼마나 큰 기쁨을 얻을 것인가
애비 에미의 길은 내려갈 뿐,
내려가는 것을 보면
서운할 것도 섭섭할 것도 없느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겹지 않은가
영원한 사랑이여, 사랑이여!
-『牛耳詩』(2005. 9월호)
환자는 애기다 / 홍해리
- 병실 소묘
벗기고 씻기고
갈아입히는 간병인
"관찮아요, 괜찮아요, 선생님!
환자는 애기예요."
부끄러워 자꾸만 망서리는
나이 팔십
"환자는 애기만도 못해요.
가만히 계세요, 괜찮아요."
그래도 몸을 움츠리고
가리는 나이 팔십.
洪海里 시인
블로그/ http://blog.daum.net/hong1852
카페 / http:// cafe.daum.net/urisi
* 최병무 시인의 블로그(http://blog.daum.net/dongsan50)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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