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꽃에게 묻다 / 홍해리
지는 게 아쉽다고 꽃대궁에 매달리지 마라
고개 뚝뚝 꺾어 그냥 떨어지는 꽃도 있잖니
지지 않는 꽃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피어나
과거로 가는 길 그리 가까웁게 끌고 가나니
너와의 거리가 멀어 더욱 잘 보이는 것이냐
먼 별빛도 짜장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이냐.
바다와 詩 / 홍해리
난바다 칠흑의 수평선은
차라리 절벽이어서
바다는 대승大乘의 시를 읊는데
나는 소승小乘일 수밖에야
죽어 본 적 있느냐는 듯 바다는
눈물 없는 이 아름다우랴고
슬픔 없는 이 그리워지랴고
얼굴을 물거울에 비춰보라 하네.
제 가슴속 맺힌 한
모두어 품고 아무 일도 없는 양
말 없는 말 파도로 지껄일 때
탐방탐방 걸어나오는 수평선
밤새껏 물 위에 타던 집어등
하나 둘 해를 안고 오는 어선들
소외도 궁핍도 화엄으로 피우는
눈 없는 시를 안고 귀항하고 있네.
복사꽃 그늘에서 / 홍해리
돌아서서
새실새실 웃기만 하던 계집애
여린 봄날을 후리러
언제 집을 뛰쳐나왔는지
바람도 그물에 와 걸리고 마는 대낮
연분홍 맨몸으로 팔락이고 있네.
신산한 적막강산
어지러운 꿈자리 노곤히 잠드는
꿈속에 길이 있다고
심란한 사내 달려가는 허공으로
언뜻 봄날은 지고
고 계집애 잠들었네.
만월滿月 / 홍해리
널 바라보던 내 마음이나
네 작은 가슴이 저랬더랬지
달빛 실실 풀리어 하늘거리는
비단 옷자락
안개 속에서
너는 저고리 고름을 풀고
치마를 벗고 있었지
첫날밤 연지 곤지 다 지워지고
불 꺼진 환한 방안
열다섯에 속이 꽉 차서
보름사리 출렁이는 파돗소리 높았었지
가득한 절정이라니
너는 눈을 감고
우주는 팽팽하니 고요했었지
미끈 어둠 물러난 자리
물컹한 비린내
창 밖엔, 휘영청,
보름달만 푸르게 밝았더랬지.
개화開花 / 홍해리
바람 한 점 없는데
매화나무 풍경이 운다
아득한 경계를 넘어
가도가도 사막길 같은 날
물고기가 눈을 뜬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꽃 피는 소리에 놀라
허공에서 몸뚱이를 가만가만 흔들고 있다
꽃그늘에 앉아
술잔마다 꽃배를 띄우던
소인묵객騷人墨客들
마음 빼앗겨
잠시 주춤하는 사이
뼈만 남은 가지마다
폭발하는,
오오, 저 푸른 화약花藥 내!
시간을 찾아서 / 홍해리
충북 청원군 남이면 척산리 472 번지
신사년 오월 초엿새 23시 05분
스물 세 해 기다리던 아버지 곁으로
어머니가 가셨습니다
들숨 날숨 가르면서
저승이 바로 뒷산인데
떠날 시간을 찾아
네 아들 네 딸 앞에 모아 놓고
며느리 사위 옆에 두고
기다리고 기다리며
가는 시간을 맞추어
마지막 숨을 놓고
말없이,
한 마디 말씀도 없이
묵언의 말씀으로
이승을 멀리 밀어 놓고
어머니는 그냥 가셨습니다
여든 두 해의 세월이, 고요히
기우뚱했습니다.
* 어머니는 2001년 6월 26일(辛巳 오월 초엿새)에 가셨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端午에는 어머님이 자식들을 만나러 오십니다.
洪海里 시인
블로그/ http://blog.daum.net/hong1852
카페 / http:// cafe.daum.net/urisi
* 최병무 시인의블로그(http://dongsan50)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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