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洪海里 신작 소시집 해설 / 이동훈, 장수철 시인

洪 海 里 2010. 2. 26. 05:07

<洪海里 신작 소시집 해설>

 

봄을 주제로 한 여섯 편의 시

 

이동훈(시인)

 

‘봄’에 관한 시인의 여섯 편의 시는 흙으로 반죽한 시다. 흙내가 폴폴 나기도 하거니와 시멘트를 섞지 않아서 말랑말랑하고 매끈매끈하다. 그가 노래하는 매화, 꽃무릇, 벌금자리 등의 나무나 풀꽃은 모두 흙의 기운으로 자란 것들이다. 흙은 뭇 생명이 마음껏 뛰노는 바탕이니 생명을 잉태하고 건사하려는 여성성과 상통한다. 생명을 키우기 위해서는 부드러워야 한다. 여성적인 것은 부드러운 것이고, 부드러운 것은 흙의 고유한 성질이니 생명을 생각하는 시인이라면 흙의 여성성에 이끌리는 건 당연해 보인다.

 

여성성에 대한 화자의 지향은 ‘햇빛은 초례청의 신부’처럼 남성성을 갖고 있는 대상도 여성화시키고 있는 데서 좀더 확연하게 들어난다. 이는 남성성이 주도하는 현실 세계가 보여준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현실에 대한 거부감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흙, 즉 여성적인 것에 의해서 생명이 움을 돋우었다면, 그걸 꽃 피우고 유전시키기 위해서 남성적인 것 역시 불가결한 존재이다.

 

‘벼락같이 달려드는 바람의 보드란 혀’나 ‘바람은/ 밤새도록 풀무질을 하고’에 등장하는 ‘바람’이 남성성을 갖는 상징이며, ‘환한 매화꽃 아래/ 비둘기 한 쌍/ 포록, 올라타더니’ 결국 꽃봉오리를 맺게 하는 비둘기나 직박구리도 남성성을 갖는 구체적 형상이다. 이처럼 홍해리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남성성은 이전의 지배적이고 가부장적인 존재와는 거리가 멀고 여성성을 도와서 생명을 온전하게 키우는 생산적인 역할에 충실하다. 여성성과 남성성이 서로를 거스르지 않고 조화롭게 어울리면서 생을 꽃 피우는 것을 두고 시인은 ‘자연自然이란 이런 것이지’ 하며 깨달음의 일말을 슬쩍 던져 준다.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 사이, 흙과 하늘과 빛 사이에 생명들은 사랑을 꿈꾼다. 사랑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안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며 생명의 씨앗을 퍼뜨리는 행위이기도 하다. 낭떠러지에 밀려서도 ‘가슴은 콩닥콩닥’ 하는 벌금자리나, ‘꽃치마 속에 뾰족한 부리를 박고/ 쪽쪽’ 하는 직박구리는 여하한 일 중에서도 사랑하고 사는 일만큼이나 갈급한 것은 없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꽃무릇의 꽃과 잎처럼 서로 ‘만나지 못하는 사랑’도 결국은 서로를 완성시키는 밑바탕이 되는 이치를 생각하건대 사랑하지 않고 사는 건 죄 짓는 일임이 분명하겠다.

 

흙이 있던 자리에 해가 오고, ‘벼룩자리’에 ‘벌금자리’가 오듯이 내가 있던 자리에 네가 온다면 기꺼이 자리를 내어 주고, 또 다른 어디론가 스미고 싶다. 그런 봄이다.

 

 

 

아름다운 봄노래 메들리

 

장수철(시인)

 

  겨울이 단독자로서의 고립과 응축의 시간이라면 봄은 연대와 발산의 세계이다. 겨우내 뿌리 속으로 생의 기운을 홀로 감추던 만물이 봄이 되면 생의 진액을 경쟁하듯 뿜어댄다. 백화가 만발하고 백가가 쟁명하니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그 소리는 매우 조화롭고 안온하다. 아름다운 화성이며 그윽한 멜로디다.

 

  시인의 여섯 편의 시들은 그 아름다운 노래들의 메들리로 엮어진다.「한 끼 식사」에서는 직박구리 한 쌍의 정겨운 식사시간이 그려진다. 정겹고 다정한 모습에 홀려 매화꽃송이들까지 속치마를 훌훌 벗어던진다.「한 쌍의 봄」에서는 비둘기 한 쌍의 짝짓기가 묘사된다. 짝짓기가 끝나고 마주보는 사이 꽃봉오리들 부풀어 올라 마침내 터진다. ‘찰나의 열락’이 다른 존재로 전이되고 있는 장면이다.‘자연이란 이런 것’이란 말은, 근원적으로 만물이 서로가 서로에게 이처럼 연쇄되어 있다는 인식의 표현일 것이다.「봄밤의 꿈」에서의 도란도란 노니는 백목련과 달빛의 유희 또한 그렇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하이퍼링크되어 있다는 것. 얼마나 즐겁고 유쾌한 상상인가.

 

  재미있는 것은 이 시들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성애적 묘사이다.「한 끼 식사」의 3연에서‘꽃치마 속에 뾰족한 부리를 박고/ 쪽쪽 ,쪽쪽 빨고 있다’, 4연의 ‘속치마까지 훌훌 벗어던지니/..금세 매화나무 배불러 오겠다’ 등의 표현이 그렇고,「봄밤의 꿈」에서의 ‘가지사이 달물이 흥건히 흘러들어/ 젖꼭지 불어터지라고/ 단내나라고’ 등의 표현 역시 그러하다.「한 쌍의 봄」에서는 아예 소재 자체를 한 쌍 비둘기의 짝짓기에서 취재하고 있다. 봄이 발산하는 에로스적 정취를 굳이 감추어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겨울이 죽음과 타나토스를 표상한다면 봄은 약동하는 생명과 충일한 에로스 그 자체가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시편들과 달리「독작」과「벌금자리」에서는 이러한 연대와 공감의 세계에서 단절된 한 인간의 실존을 격정적으로 표현해내고 있어 이채를 보인다. 먼저「독작하는 봄」에서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 날리고 초례청의 신부처럼 봄햇볕 쏟아지는 아름다운 봄날, 화자는 대각견성하듯 화엄의 세계를 발견하지만 그것은 화자의 실존과는 너무 멀고 아득한,‘사약처럼 캄캄’한 것일 뿐이다.

 

  한편「벌금자리」에서의 벌금자리는 두렁에 거미줄처럼 번식하는 나물로 표준어로는 벼룩이자리나물로 불린다고 한다. 그 모양새가 볼품없어 시인은‘허리를 굽히고 가만히 내려다봐야’간신히 보이고, 그것도‘땅바닥에 죽은 듯 엎어져’있다고 표현한다. 물론 이 벌금자리는 화자의 감정이 투사된 객관적 상관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존재 방식의 불우함이나 비루함으로 읽히기 보다는, 화자의 예민한 실존적 감수성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화자는 삶을‘낭떠러지’ 또는 ‘벼랑’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청보리 익어가고 천지간에 단내가 풀풀 날려 가슴은 콩닥콩닥 뛰는 봄이어도 화자에게 삶은 늘‘가슴속 빈자리가 마냥 젖어’있게 하는 근원적 상실감으로 가득한 그 무엇에 불과하다. 봄날, 만물이 하나의 통합의 축에서 무한 링크되어 축제를 벌이는 이 세상에서 화자만이 외따로 떨어져 고절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 두 편의 시만으로 시인이 느끼는 고절감의 구체적인 연유를 우리는 알 수 없을지라도 ‘가슴속 눌어붙은 천년 그리움’(「독작하는 봄」)이나 ‘사는 일이 낭떠러지’라는 구절에서 얼추 그 단초를 어림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지나치게 일반화시킨 게 아니라면, 그것은 순결한 시인으로 살아가면서 ‘가이사’의 세계에 복무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모순된 현실 속에 느끼는 아이디얼한 세계와의 괴리감이며, 이 느물느물한 키취적 세상에 살아가는 시인의 모나고 각진 그러나 개결하고 고매한 정신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의 분량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봄은 봄이로되 봄은 실로 아닌 것이다. 아니 어쩌면 봄은 낱말로서만, 풍설로만 존재할 뿐 이방인들의 땅엔 이미 봄은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독작하는 봄

  

앵앵대는 벚나무 꽃그늘 아래

홀로 앉아 술잔을 채우다 보니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 절로 날리고

마음은 자글자글 끓어 쌓는데

가슴속 눌어붙은 천년 그리움

절벽을 뛰어내리기 몇 차례였나

눈먼 그물을 마구 던져대는 봄바람

사랑이 무어라고 바르르 떨까

누가 화궁花宮으로 초대라도 했는가

시린 허공 눈썹길에 발길 멈추면

사는 일 벅차다고 자지러드는 날

햇빛은 초례청의 신부만 같아

얼굴 붉히고 눈길 살풋 던지는데

적멸보궁 어디냐고 묻지 말아라

네 앞에 피어나는 화엄/花嚴을 보라

마저 피지 못한 꽃도 한세상이라고

꽃은 절정에서 스스로 몸을 벗는다

왜 이리 세상이 사약처럼 캄캄해지나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만 절로 날리니

달뜨는 마음 하나 마음대로 잡지 못하네.

 

 

한 끼 식사

 

겨우내 이 나무 저 나무로

동가식서가숙하던

직박구리 한 쌍

매화꽃 피었다고 냉큼 찾아왔다

 

여름도 한겨울이던 50년대

물로 배를 채우던 시절

꿀꿀이죽은 꿀꿀대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맛이야 꿀맛이 아니었던가

 

가지마다 사푼사푼 옮겨 앉아

꽃치마 속에 뾰족한 부리를 박고

쪽쪽, 쪽쪽! 빨고 있다

참 아름다운, 황홀한 식사다

 

놀란 꽃송이들 속치마까지 홀홀

벗어 던지니

이른 봄날 마른하늘에 눈 내린다

금세 매화나무 배불러오겠다.

 

 

한 쌍의 봄 

 

립4·19묘지

환한 매화꽃 아래

비둘기 한 쌍

포록, 올라타더니

아슬아슬

이층을 쌓는다

잠깐,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찰나의 열락)

파르르

꽁지를 맞추고 나서

금방 내려와

한참을,

꼼짝 않고 마주보고 있다

다시 한참을 부리로 깃을 고르고 나서도

또 한참을 그 자리 그대로 서서

누가 보거나 말거나 

자연自然이란 이런 것이지

가지 끝 조롱조롱 꽃봉오리들

슬그머니 부풀어 올라

마악 터지고 있다

백매화 푸른 눈썹 아래로

그녀를 살살 꾀어낸 봄날.

 

 

벌금자리

 

벼룩자리 벼룩은 어디로  튀고

어쩌다 벌금자리가 되었을까

청보리 한창 익어갈 때면 이랑마다

그녀가 머리 흐트러진 줄도 모르고

살보시하려 달뜬 가슴을 살포시 풀어헤쳐

천지간에 단내가 폴폴 나는 것이었다

벼락같이 달려드는 바람의 보드란 혀

다디단 세상이 갑자기 캄캄해져서

옆집 달래까지 덩달아 달떠 달싹달싹하는 바람에

땅바닥에 죽은 듯 엎어져 있는 것이

차라리 살아 있는 것이라고 옆찔러 주었다

허리를 굽히고 가만히 내려다봐야

겨우 눈에 뜨이는 벌금자리

해말간 열일곱의 애첩 같은 그녀

흐벅진 허벅지는 아니라 해도

잦은 투정에 식은땀이 흐르는 한밤

얼마나 뒤척이며 흐느꼈는지

가슴속 빈자리가 마냥 젖어서

사는 일이 낭떠러지, 벼랑이라고

벌금벌금 벌금을 내면서도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그녀는 작은 등롱에 노란 꽃밥을 들고 있었지만

한낮이면 뜨거운 볕으로 콩을 볶는 것도 아닌데

어쩌자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꽃무릇 천지 

 

우리들이 오가는 나들목이 어디런가

너의 꽃시절을 함께 못할 때

나는 네게로 와 잎으로 서고

나의 푸른 집에 오지 못할 때

너는 내게로 와서 꽃으로 피어라

나는 너의 차꼬가 되고

너는 내 수갑이 되어

속속곳 바람으로

이 푸른 가을날 깊은 하늘을 사무치게 하니

안안팎으로 가로 지나 세로 지나 가량없어라

짝사랑이면 짝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사랑이라서

나는 죽어 너를 피우고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가

나란히 누워보지도 못하고

팔베개 한 번 해 주지 못한 사람

촛불 환히 밝혀 들고 두 손을 모으면

너는 어디 있는가

마음만, 마음만 붉어라.

 

 

봄밤의 꿈 

 

백목련이 도란도란

달빛과 놀고 있고,

 

가지 사이 달물이 흥건히 흘러들어

젖꼭지 불어터지라고

단내 나라고

바람은

밤새도록 풀무질을 하고 있었나 봐

삼각산 위에 떠 있는 뽀얀 달

졸린 눈을 끔벅이고 있어,

 

며칠인가 했더니

여월如月 보름.

'시론 ·평론·시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누구인가  (0) 2010.04.24
<시> 빨랫줄  (0) 2010.03.04
[스크랩] 설매-천년의 사랑24  (0) 2010.01.27
[스크랩] <시> 계영배戒盈杯  (0) 2010.01.14
[스크랩] 설중매  (0) 2010.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