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죽이지요[홍해리]
시가 정말 죽이네요
시가 죽인다구요
내 시가 죽이라니
영양가 높은 전복죽이란 말인가
시래기죽 아니면 피죽이란 말인가
무슨 죽이냐구
식은 죽 먹듯 읽어치울 만큼 하찮단 말인가
내 시가 뭘 죽인다는 말인가
닦달하지 마라
죽은 밍근한 불로 천천히 잘 저으면서 끓여야
제 맛을 낼 수 있지
벼락같이 쓴 시가 잘 쑨 죽맛을 내겠는가
죽은 서서히 끓여야 한다
뜸 들이는 동안
시나 읽을까
죽만 눈독들이고 있으면
죽이 밥이 될까
그렇다고 죽치고 앉아 있으면
죽이 되기는 할까
쓰는 일이나 쑤는 일이나 그게 그거일까
젓가락을 들고 죽을 먹으려 들다니
죽을 맛이지 죽 맛이 나겠는가
저 말의 엉덩이같은 죽사발
미끈 잘못 미끄러지면 파리 신세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사발이 되지
시를 쓴답시구 죽을 쑤고 있는 나
정말 시가 죽이 되어 나를 죽이는구나
쌀과 물이 살과 뼈처럼
조화를 이루어야 맛있는 죽이듯
네 시를 부드럽고 기름지게 끓이거라
시가 정말 죽이네요
시가 죽인다구요.
* 어느 해인가 늙은 호박을 열몇개인가 누가 갖다주어서 겨우내 호박죽을 쑨 적이 있다.
호박죽을 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공정이 꽤 많고 까다로운 까닭이다.
우선 껍질을 벗기는 게 힘들고 속을 다 긁어내야 하며 쑤는 시간 자체가 지루하다.
게다가 중간중간 끓는 죽이 튀어올라 손등을 데어 조심조심해야 한다.
죽 쑤는 일도 이렇게 만만치 않은데 하물며 시를 쓰는 일이야 말할 것도 없고
산다는 것, 혹은 사랑한다는 것도 이와 같으니 세상에 쉬운일이란 없다.
좀 쉬운 일을 누워서 떡먹는 일이라고 하던데 누워서 떡 먹어보니 그것조차 어렵다.
잘 쑨 죽처럼 잘 쓴 시를 골라 읽는 일도 어려운 일이다.
작년에 남해에 가서 먹었던 전복죽처럼 푸르딩딩 맛있는 시를 읽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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