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신작특집> 閑居日誌 10편

洪 海 里 2010. 7. 5. 14:15

<시인의 산문>

 

뱀은 다리가 없다.

 

 

뱀은 온몸이 발이다.

 

 

 

* 2005년 7월 초순과 중순을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서병동 1016호실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겪은 일을「閑居日誌」라는 이름으로 메모한 것을 신작특집으로 발표한다.

  고대병원 안과의 이태수 박사, 김종완, 이 화 선생과 서병동 10층 간호사실의 여러 천사들의 노고와 친절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여기 적어 남긴다.

 

 

<작품>

 

閑居日誌

 

1. 夏安居

 

삼복의 병실

천정에 매달려

면벽하노니,

 

입도 막고

눈도 닫아 걸었으나

귀는 줄창 열려 있어,

 

바람이 울려주는 풍경소리

마음벽에 암각화 한 폭 그리네

 

묵언정진 중인

와불 하나 새기고 있네.

 

2. 高大山 求路庵에서

 

높은 산 골짜기

깊은 암자에 몸을 묻고

길을 찾노니,

 

밤하늘

홀로

날아가는 새.

 

몸이 가는 길 마음 가지 않고

마음 가는 길 몸이 가지 못하네.

 

눈이 가는 길, 귀가 가는 길

날아가는 길, 기어가는 길

눈물로 가는 길, 꽃의 길은 끝이 없네.

 

길은 보이지 않아도

늘 떠나고 있네

구로구로 떠도는 별들로부터.

 

3. 입원실에서

 

허공에 뜬 와불이 되어

실낱 같은 기대와 나락의 절망에서

시퍼런 대낮이 눈을 번뜩이는 사이

 

기대에 한없이 기대고

절망에서 끝없이 절망하는

죄 없는 눈물의 수인

 

분통의 분을 삭이고

통증을 날리는

홀로 있어 외려 외롭지 않은 수인

 

의심과 원망과 분노와 불안과 긴장과

초조와 걱정과 포기를, 체념을

화두로 끌어안고 묵언 수행하는,

 

나는 하안거 중인 중.

 

4. 꿈속에서

 

"얘야!

많이 힘들지?

애비야, 애비야!

곁에 있어 주지 못해 안됐구나!"

 

살아생전 제대로 모시지도 못한

자식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눈물 촉촉한 음성은 따뜻한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어머니.

 

"얘야,

얼마나 아프냐?

애비야,

애비야!"

 

5. 수술실에서 나와서

 

그곳은 암흑

죽음의 나라

나의 고향이었다

암흑에서 빛이 나오고

생명이 탄생한다

뱀 한 마리

검은 풀밭을 굴러가고 있다

굴렁쇠의 끝없는 선회

뒤따르른 사람이 없다

사람이 병을 만들고

인류가 병을 정복하려 한다

밤에 통증이 심한 것은

병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때문

어둠을 탈출한 후

나를 되찾기까지의 진통

아픔이 없는 생이 어찌 아름다우랴

나는 암흑의 자식

우주를 유영하는 유한 행성.

 

6. 병상일지

 

편안과 무료 속에 마음이 짓는

아름다운 죄 하나 만나

벼리는 고독의 날개

죽고 싶다 죽고 싶다 나는 살아 잇다

가장 큰 어둠의 날개

펄럭이는 소리 잦아들 때

낙심과 낙담으로 앞이 캄캄하여

세상이 막막하고 망막하다

비에도 젖지 않는 비애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다

내일은 철거덕 닫히는 철문으로

무의식 세계로 들어가는 날

어둠의 빛을 만나 꽃이 되는 날

창도 칼도 무섭지 않은

나는 모순의 방패인가.

 

7. 한가한 풍월

 

이렇게 아프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고통도 때로는 그리워지고,

 

과거는 추억이 되어

마음속에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지.

 

통증이 좀 가셨다고

이렇게 한가한 소리를 하는 것은

얼마나 염치없는 놀음인가.

 

죽겠다

죽고 싶다는 건

산사람의 사치.

 

사랑이여

생이 너무 단조롭거든

때로는 아파 보라.

 

영원의 가지에 그네를 매고

흔들흔들 흔들리는

내 사랑아.

 

8 언제일지 몰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내 生을 완창으로 풀어낼 이는

누구인가 나인가

목숨의 주인은 누구인가

들리는 소리마다 귀에 익은데

어디가 정상인가

피안은 어디고 차안은 어디인가

'죽고 싶어도 또 살고 싶은'

자는 듯 깬 듯 사는 삶

물소리 요란한 계곡에서

물거품 일으키며 흐르다가

구차한 목숨의 질긴 매듭

풀다 보면 영원의 바다에도 이를까

나의 한 生이 절창이 아니었던들

또 어떻겠는가

잠시 이 몸이 어둠을 깨워 환했다면

고요한 바다에 이르는 가벼움도

다 벗어 놓고 갈 투명한 마음도

기쁨 한 자락으로 환하지 않으랴.

 

9.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자식들아

치사랑이 어디 그리 쉽겠느냐

새끼들에게

내리사랑이나 제대로 내리거라

애비 에미 껍질만 남는 동안

새끼들은 통통하게 살이 오르지

너희들의 속이 다 빠져나가면서

손주들의 재롱으로

할미 할애비는 얼굴에 꽃을 피운단다

새끼들이 세상에 태어나

얼마나 많은 기쁨을 주었는가

생각하라

에미 애비여

그리하여

자식들은 또 제 새끼들에게서

얼마나 큰 기쁨을 얻을 것인가

애비 에미의 길은 내려갈 뿐,

내려가는 것을 보면

서운할 것도 섭섭할 것도 없느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겹지 않은가

영원한 사랑이여, 사랑이여!

 

10. 下山

 

까막산 求路庵에서

하산하다

이곳이 선계

사람 사는 곳

진흙구렁이라도 정답고

개똥밭이라도 좋다

구로암에서 길을 찾는 일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내 마음속으로 나 있을 뿐

불 없는 고행길은 끝이 없고

짐승들 울부짖는 소리만

산천에 가득하다

하루 종일 잠들지 못하는

암흑의 깊은 골짜기

나는 내려간다

내 마음속의 길을 따라

세상은 그래도 푸르고 환하다

아직은 따뜻하다.

              - 월간『牛耳詩』(2005.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