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詩 다시 읽기

시집『비밀』의 자선시 20편 · 1

洪 海 里 2010. 8. 30. 07:08

* 시집『비밀』의 자선시 20편 · 1

 

길에 대하여

 

洪 海 里 

 

 

한평생을 길에서 살았다

발바닥에 길이 들었다

가는 길은 공간이고 시간이었다

공간에서 제자리를 가고

시간에선 뒷걸음질만 치고 있었다

샛길로 오솔길로 가다

큰길로 한번 나가 보면

이내 뒷길로 골목길로 몰릴 뿐

삶이란 물길이고 불길이었다

허방 천지 끝없는 밤길이었다

살길이 어디인가

갈 길이 없는 세상

길을 잃고 헤매기 몇 번이었던가

꽃길에 바람 불어 꽃잎 다 날리고

도끼 자루는 삭아내렸다

남들은 외길로 지름길로 달려가는데

바람 부는 갈림길에 서 있곤 했다

눈길에 넘어져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빗길에 미끄러져도 손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오가는 길에 어쩌다 마주쳐도

길길이 날뛰는 시간은 잔인한 폭군이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마다

인생이란 그렇고 그런 것이라 했지만

끝내 비단길, 하늘길은 보이지 않았다

날개는 꿈길의 시퍼런 독약이었다.


 

洪 海 里

 

 

아내는 머릿속에 새를 기르고 있다

늘 머리가 아프다 한다

부리로 콕콕 쪼아대는지

귀에서 새소리가 난다고 한다

구름이 끼어 있는 사시사철

새는 푸른 하늘이 그립다 한다

새는 너른 들판이 그립다 운다

갇혀 있는 새는 숨이 막혀

벽을 쪼아댄다

날아가고 싶어

아내는 새벽부터 새가 되어 운다

지저귀면서

때로는 노래로

아내의 새는 울고 있다

조롱鳥籠 속에 산다고 조롱 마라

갇혀 사는 새는 아프다.

 

 

독작하는 봄

 

洪 海 里

 

 

앵앵대는 벚나무 꽃그늘에서

홀로 앉아 술잔을 채우다 보니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 절로 날리고

마음은 자글자글 끓어 쌓는데

가슴속 눌어붙은 천년 그리움

절벽을 뛰어내리기 몇 차례였나

눈먼 그물을 마구 던져대는 봄바람

사랑이 무어라고 바르르 떨까

누가 화궁花宮으로 초대라도 했는가

시린 허공 눈썹길에 발길 멈추면

사는 일 벅차다고 자지러드는 날

햇빛은 초례청의 신부만 같아

얼굴 붉히고 눈길 살풋 던지는데

적멸보궁 어디냐고 묻지 말아라

네 앞에 피어나는 화엄/花嚴을 보라

마저 피지 못한 꽃도 한세상이라고

꽃은 절정에서 스스로 몸을 벗는다

왜 이리 세상이 사약처럼 캄캄해지나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만 절로 날리니

달뜨는 마음 하나 마음대로 잡지 못하네.

 

 

사랑에게

 

洪 海 里

 

 

 

써레질을 잘 해 놓은 무논처럼

 

논둑 옆에 기고 있는 벌금자리처럼

 

벌금자리 꽃이 품고 있는 이슬처럼

  

이슬 속 천년의 그 자리 그냥 그대로.

 

 

자벌레

 

 洪 海 里

 

 

몸으로 산을 만들었다

 허물고,

 

다시 쌓았다

 무너뜨린다.

 

그것이 온몸으로 세상을 재는

 한평생의 길,

 

山은 몸속에 있는

 무등無等이다.

 

 

비밀 

 

洪 海 里

 

그 여자 귀에 들어가면

세상이 다 아는 건 시간문제다

조심하라 네 입을 조심하라

그녀의 입은 가볍고 싸다

무겁고 비싼 네 입도 별수없지만

혼자 알고 있기엔 아깝다고

입이 근지럽다고

허투루 발설 마라

말끝에 말이 난다

네 말 한 마리가 만의 말을 끌고 날아간다

말이란 다산성이라 새끼를 많이 낳는다

그 여자 귀엔 천 마리 파발마가 달리고 있다

말은 발이 없어 빨리 달린다, 아니, 난다

그러니 남의 말은 함부로덤부로 타지 마라

말발굽에 밟히면 그냥 가는 수가 있다

그 여자 귓속에는 세상의 귀가 다 들어 있다 

그 여자 귀는 천 개의 나발이다

그녀는 늘 나발을 불며 날아다닌다

한번, 그녀의 귀에 들어가 보라

새끼 낳은 늙은 암퇘지 걸근거리듯

그녀는 비밀肥蜜을 먹고 비밀秘密을 까는 촉새다

'이건 너와 나만 아는 비밀이다'.

 

 

구두끈

 

洪 海 里

 

 

저녁녘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구두끈이 풀어져

거치적거리는 것도 모르고

허위허위 걸어왔다

나이 든다는 것이 무엇인가

묶어야 할 것은 묶고

매야 할 것은 단단히 매야 하는데

풀어진 구두끈처럼

몸이 풀어져 허우적거린다

풀어진다는 것은

매이고 묶인 것이 풀리는 것이고

질기고 단단한 것이 흐늘흐늘해지는 것이고

모두가 해소되고, 잘 섞이어지는 것이다

몸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구두끈도 때로는 풀어져

한평생 싣고 온 짐을 부리듯

사막길 벗어나는 꿈을 꾸는 것을

나는 이제껏 모른 채 살아왔다

끈은 오로지 묶여 있는 것이 전부였다

구속당하는 것이 유일한 제 임무였다

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몸으로 제가 저를 잡고 있어야 하지만

끈은 늘 풀어지려고 모반을 꾀하고

헐렁해지고 싶어 일탈을 꿈꾼다

때로는 끈을 풀어 푸른 자유를 줘야 하는데

지금까지 나는 구속만 강요해 왔다

이제 몸도 풀어 줘야 할 때가 된 것인가

오늘도 구두끈이 풀어진 것도 모르고

고삐 없는 노마駑馬가 되어

휘적휘적 걸어서 어딘가로 가고 있다.

 

 

계영배戒盈杯

 

洪 海 里

 

 

속정 깊은 사람 가슴속

따르고 따루어도 가득 차지 않는

잔 하나 감춰 두고

한마悍馬 한 마리 잡아타고

먼 길 같이 떠나고 싶네

마음 딴 데 두지 마라, 산들라

세상에 가장 따순 네 입술 같이나

한잔 술이 내 영혼을 데우는 것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그리움처럼

줄지도 넘치지도 않는 술잔 위로

별들이 내려 빙글빙글 도는 것은,

무위無爲도 자연自然도 아니어서

내 마음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인가

은자隱者의 눈빛이나 미소처럼

입안 가득 번지는 넉넉한 향을

눈물로 태울까 말씀으로 비울까

온몸으로 따루어도

채워지지 않고 비워지지 않는

잔,

깊고 따뜻한 너.

 

 

대풍류

 

洪 海  

 

날 선 비수 같은 달빛이

눈꽃 핀 댓잎 위에 내려앉았다

달빛에 놀라 쏟아져 내리는 은싸라기

그날 밤 대나무는 숨을 놓았다

목숨 떠난 이파리는 바람에 떨고

대나무는 바람神을 맞아들여

텅 빈 가슴속에 소리집을 짓는다

그렇게 몇 번의 겨울이 가고 나면

대나무는 마디마디 시린 한을 품어

줄줄이 소리 가락을 푸르게 풀어낸다

때로는 피리니 대금이니 이름하니

제 소리를 어쩌지 못해 대나무는

막힌 구멍을 풀어줄 때마다

실실이 푸른 한을 한 가닥씩 뿜어낸다

사람들은 마침내 바람 흘러가는 소리를

귀에 담아 풍류風流라 일컫는다.

 

 

설마雪馬

 

洪 海 里

 

눈처럼 흰 말

눈 속에 사는 말

눈 속을 달려가는 말

 

설마 그런 말이 있기나 하랴마는

눈처럼 흰 설마를 찾아

눈 속으로 나 홀로 헤맨다 한들

 

설마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만

말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말 달려가는 요란한 소리만 들려올 뿐

 

한평생 허위허위 걸어온 길이라 해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아 막막하니

말꾼 찾아 마량馬糧 준비할 일인가

 

오늘 밤도 눈 쌓이는 소리

창 밖에 환한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 해도

 

나를 비우고 지우면서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설마를 찾아 길 없는 밤길을 나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