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론>
해리海里,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을 찾아서
-洪海里論
신현락(시인)
이름 없는 풀이나 꽃은 없다, 나무나 새도 그렇다
이름 없는 잡초, 이름 없는 새라고 시인이 말해서는 안 된다.
시인은 모든 대상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이다
이름 없는 시인이란 말이 있다
시인은 이름으로 말해선 안 된다
시로써, 다만 시로 말해야 한다
이름이나 얻으려고 주린 개처럼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기웃대지는 말 일이다
그래서 천박舛駁하거나 천박淺薄한 유명시인이 되면 무얼 하겠는가
속물시인,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꺼귀꺼귀하는 속물이 되지 말 일이다
가슴에 산을 담고 물처럼 바람처럼 자유스럽게 사는 시인
자연을 즐기며 벗바리 삼아 올곧게 사는 시인
욕심없이 허물없이 멋을 누리는 정신이 느티나무 같은 시인
유명한 시인보다는 혼이 살아 있는 시인
반가운 시를 쓰는 좋은 시인이 될 일이다.
- 「고운야학孤雲野鶴의 시를 위하여」의 일부
1
설날 며칠 후, 밤에 손전화의 신호가 울리어 발신자를 보니 홍해리 선생이었다. 선생을 알게 된 지 10년이 가까웠지만 늦은 밤에 전화가 온 경우는 처음이어서 의아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으니 이미 꽤 거나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부 따위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하는 말이 “시인특집 같은 것은 왜 하느냐?”며 “알잖아. 신 시인, 나는 그딴 거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까 쓰지 말아”달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선생은 마음에 없는 수사만으로 가득한 평론 같은 것을 거들떠보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에 대한 정당한 평가까지 마다하는 것은 아니다. 선생의 블로그에 들어가 보라. 선생은 자신의 시뿐만 아니라 시에 관한 평론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고 있다. 선생이 자신의 시에 대한 평가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선생이 늦은 밤 그런 전화를 한 것은 다른 까닭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2006년도에 오랜만에 나온 선생의 시집인 『봄, 벼락치다』에 대한 서평을 시작으로 그해에 다섯 편 정도의 평론을 쓰고는 그만 싫증이 나서 한동안 은둔 아닌 은둔을 했었는데 나의 사정을 헤아려서 그러한 전화를 한 것이다.
선생은 거의 산문을 쓰지 않는다. 산문을 싫어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마치 황순원 선생이 소설을 위해 수필을 쓰지 않는 것과 같이 시에 몰입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선생의 지론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선생은 시론도 산문이 아닌 시로 말하고 있는데 그중에 「고운야학孤雲野鶴의 시를 위하여」와 「명창정궤明窓淨几의 시를 위하여」는 천하의 명문이다. 시에 대하여 여러 말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선생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선생과의 인연 때문이니 세상살이란 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만 되겠는가.
내가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된 때는 우이시낭송회에 참석했던 2002년 봄이다. 그 무렵 나는 그동안 관계하던 모든 것들과의 인연을 끊고 시골에서 낚시로 허송세월 하고 있었다. 문학도 인생도 다 시들해지던 시절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활에 대한 회의감도 없지 않았던 까닭으로 낭송회에 한 번 참석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이대의 시인의 제의를 뿌리치지 못하고 참석하였던 것이다. 사람에 대한 기억은 신체적인 감각과 결부되었을 때 오래가는데 처음 선생과 악수했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른 체구의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손이 얼얼할 정도로 선생의 손아귀의 힘이 대단하였다. 얼마 전 임동윤 시인으로부터 「시인론」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나는 그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낭송회에 참석한 후 나는《牛耳詩》편집에 참여하게 되었다. 매월 낭송할 원고를 모아서 분류하고 워드로 편집하는 일을 약 1년간 하게 되어 선생과 자주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문단의 생리에 적응을 못하여 변방에서 헤매고 있었던 나는 그 일을 계기로 하여 선생의 시에 대한 열정과 사심 없이 일을 하는 인간적인 고결함에 반하여서 지금까지 우리시에 몸담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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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시와 인생에 대하여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글은 그의 오랜 지기인 이무원 시인이 쓴 「식물성 말 없는 시인」이다.
"그는 순식물성이다. 풀로 말하면 난이요, 나무로 말하면 매화다. 술로 말하면 소주요, 밥으로 말하면 꽁보리밥이거나 순 쌀밥이지 팥이나 콩이 섞인 잡곡밥은 아니다. 그는 술을 좋아하지만 술을 욕되게 하는 법이 없고, 그는 시를 생명처럼 사랑하지만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는 좋은 것은 좋고 싫은 것은 싫기 때문에 좋고도 싫다든가 싫지만 좋다는 어정쩡한 중간 개념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그는 직설적으로 짧게 말함으로써 더욱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이다. 두루뭉실 굴러가야 살기 편한 세상에 그는 낙락장송이듯 초연하다."
난과 매화는 선생을 대표하는 식물이다. 난을 좋아하는 선생을 보고 임보 선생께서 호를 난정蘭丁으로 지어주셨을 정도로 난에 관한 선생의 사랑은 각별한 바가 있다. 난에 대한 선생의 수집벽은 대단한 것이어서 한때는 자생란을 채집하기 위하여 전국의 산하를 누비고 다녔다고 한다. 산에서 내려오는 선생을 보고 마을 사람이 무장공비로 오인하여 신고하는 바람에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는 일화는 그 시절에 선생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난과 매화는 선비의 멋과 풍류, 지조를 상징하는데 선생의 삶과 문학을 나타내는데 이처럼 적절한 비유는 찾기 어렵다는데 나는 동의한다.
진초록 보석으로 날개를 달고
눈을 감고 눈을 뜬다
만 가지 시름이 적막 속으로 사라지고
가장 지순한 발바닥이 젖어 있다
내장산 비자림 딸깍다릴 지날 때에도
영원은 고요로이 잠들어 있었거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듯
투명한 이른 봄날 이른 아침에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女人의 中心
실한 무게의 남근男根이 하늘에 걸려 있다
-〈난꽃이 피면〉 전문
선생의 집은 각종 난분으로 가득했었다는데 아쉽게도 구경을 해보지 못해서 그 장관을 표현할 방법이 없지만 선생이 단지 호사가의 취미로 난을 모았던 것은 아니다. 선생에게 난은 단지 군자의 애완물이 아니라 우주의 근원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난의 개화 앞에서 시인은 ‘눈을 감고 눈을 뜬다.’ 육체의 눈을 감고 영혼의 눈을 뜨면 세속의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지고 존재의 근원이 비의의 모습을 보인다. 그때의 공간이 내장산이건 저자거리건 상관없이 ‘영원은 고요로이 잠들’고 삼라만상이 투명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 시인은 꽃 한 송이 속에 천지의 조화를 엿보는데 ‘여인의 중심’과 ‘남근’의 어우러짐이 그것이다. 음양의 어우러짐은 결국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가 아니던가.
풍류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인데 정말이지 선생은 술을 좋아해서 꽃 보고 술이요, 사람을 만나면 술이요, 시를 보고도 술이다. 선생은 술을 즐기지만 술로 인하여 생활을 소홀히 하거나 자신과 상대방을 욕보이지 않는다. 주량은 말술이지만 60년대의 전설적인 시인들처럼 만사를 제치고 사흘이고 나흘이고 폭음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나는 황정산 시인과 함께 선생을 찾아 술자리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낮술 탓도 있지만 이상하게 금세 취하여 나는 선생에게 “선생님의 시는 왜 그렇게 청상과부처럼 슬프냐”, “왜 그렇게 비슷한 시를 많이 쓰느냐”는 등 말도 안 되는 주정을 부렸다. 선생은 그저 고요히 미소만 짓고 있었을 뿐,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은 시간에서 또 어떤 주정을 부렸는지 다음날 깨어나서도 도통 가물가물한데 “괜찮으냐?”며 전화를 먼저 걸어온 쪽은 오히려 선생이었다. “죄송하다”고 어물거리는 나에게 선생은 “취하지도 않는 게 시인이냐?”며 껄껄 웃는 것이었다. 선생의 스승이었던 조지훈 시인은 술을 마시는 격조와 품위에 따라 주도의 단계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선생은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낙도樂道의 단계에 든 것이니 술을 마시기는 하지만 통제를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더불어 대작하는 것만으로도 송구스러울 뿐이다.
선생에 대한 나의 생각은 식물적인 특성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선생과 함께 오랫동안 우이시를 이끌어오던 임보 선생은
고불古佛 이생진李生珍은 물소
포우抱牛 채희문菜熙汶은 황소
난정蘭丁 홍해리洪海里는 들소
나 임보林步는 조그만 염소
- 임보,〈네 마리의 소/염소>전문
이 시에서 홍해리 시인을 평가하기를 ‘난정은 난과 매화를 즐기는 선비지만 들소와 같은 정력이 없지 않다고 하였다. 임보 선생의 깊은 뜻은 헤아릴 길 없지만 선생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추진력을 보면 ‘들소’란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작년 11월 말경 우리시 청주지회 창립식에 참석할 때의 일이다. 선생은 인사말 중에서 청주지역에 변변한 동인지가 없어서 《내륙문학》 창간을 주도하고 계간지로 만들려고 하던 중 서울로 이사를 하는 까닭에 그렇게 되지 못했는데 만약 자신이 계속 청주지역에 머물고 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계간지로 만들었을 거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선생이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남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는 시를 쓰겠다는 일념으로 우이시회를 24년간이나 지켜오고 키워온 열정과 추진력은 들소와 같은 저돌성과 순수한 정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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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리 시인은 1942년(실제는 1941년)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척산리에서 태어나 1969년 시집『투망도』를 통해 등단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15권의 시집과 두 권의 시선집을 출간하였다. 청소년기를 청주에서 성장한 그는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세광고와 청주상고 교사를 거쳐 서울에서 교편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동안 청주지역에서《내륙문학》창간을 주도하였고 서울로 이사한 후에는 《진단시》동인, 《우이동시인들》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최근에는 우리시진흥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문학단체 활동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왔다. 문학 내외적으로 기념할 만한 업적을 남기고 있는 사실에 비하여 선생에 대한 문학적 평가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에 대한 평론은 주로 시집 해설이나 서평 및 개별 작품에 대한 감상적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 점은 문학을 하는 우리들이 반성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부분이다.
선생은 등단부터 남과 달랐다. 그 당시 대부분의 시인들이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추천제도를 통해 등단한 반면 선생은 시집으로 등단하였다. 양채영 시인이 쓴 평론을 읽어보면 ‘등단 문제로 선생이 어떤 상처 같은 것을 받았다’는 구절이 보이는데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도 없고 선생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선생은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당시 고려대에는 김종길 시인이 영문학을, 조지훈 시인이 국문학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두 분들은 문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어서 추천을 받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보는데 선생은 그 길을 접고 다른 등단과정을 거쳤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떻게 되었든 나는 이 부분에서 선생의 고집을 느낀다. 그것은 시인은 오직 시로 인정받아야지 문단정치나 인맥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나는 읽는다. 선생의 이러한 고집이 입때껏 선생의 문학적 성과에 비해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근래에는 다행스럽게도 선생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도 많이 늘어나고 있으며 심심찮게 평론에 이름이 거론되고 있으니 시인이 올곧은 신념으로 시를 써나가는 일이 결코 외롭지 않은 길임을 선생을 통해 나는 깨닫는다.
선생의 초기시에 대한 평가는 주로 문우인 안수길 소설가, 양채영 시인, 이영걸 시인이 쓴 시집 발문과 해설에 의해 이루어진다. 양채영 시인은 「맑은 감성과 삶의 원환」이란 글에서 초기시의 심미적인 특성을 지적하면서 『투망도』에서는 ‘신선한 관능의 육화를 역사 속의 여성으로부터’ 찾아내고 있는 점을 주목하였다. 이러한 미의식은 제2 시집 『화사기』에서 추상성을 벗어나 구체적인 깊이를 얻게 되었다고 보면서 ‘삶의 한 양상으로 반복과 소멸과 생성의 원환’을 시의 주조로 결론을 짓고 있다. 선생의 초기시의 특징을 전통적인 세계에 대한 향수와 심미적인 세계를 바탕으로 한 삶과 자연의 탐구로 보는 견해에 이견은 없는 것 같다.
종일 피릴 불어도
노래 한 가락 살아나지 않는다.
천년 피먹은 가락
그리 쉽게야 울리야람
구름장만 날리는
해안선의 파도소리.
물거품 말아 올려 구름 띄우고
바닷가운데 흔들리는 순금 한 말
가슴으로 속가슴으로
모가지를 매어달리는 빛살
천년 서라벌의 나뭇이파리.
달빛을 흔들어 놓고
조상네 강물을 울어
손가락 입술까지 적신다만
금빛 가락 은빛 가락은
눈물 뿌리던 사랑.
먼지 쌓이는 한낮에 놀다 가는
그림자뿐.
-〈善花公主〉전문
선생과 《내륙문학》 동인으로 함께 활동했던 소설가 안수길은 「무교동의 클리토스」란 선생의 「시인론」에서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연대로 보아 그의 시작 초기에 해당 할 이〈선화공주〉는 시인 김용호金容浩 씨 말대로 〈옛설화를 詩化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면서도 표현과 구성면에서 특이한 기교를 보여 주었던 것 같다. …(중략)… 이 시기에 그가 쓴 시편들에서는 자주 그런 경향, 즉 전통적인 질그릇에 새로운 유약을 칠해 놓은 듯한 인상을 받게 하였다.
김용호 시인의 글을 읽어보지 못했으므로 어떤 문맥에 의하여 ‘옛설화를 시화하는데 성공’한 작품이라고 평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전통적인 질그릇에 새로운 유약을 칠해 놓은 듯’하다는 안수길의 조심스런 언급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이 작품의 소재가 ‘선화공주’라는 인물이라고 해서 이 작품이 단순히 전통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시인은 선화공주와 서동에 얽힌 사랑에 관한 노래를 감상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현대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시인이 바닷가에서 ‘종일 피릴 불어도’ 옛노래의 사랑의 가락은 ‘살아나지 않는’ 것이다. 그곳에서 시인이 보는 ‘바닷가운데 순금 한 말’은 ‘속가슴’으로 흘러오는 ‘천년 서라벌’의 ‘금빛 가락 은빛 가락’이겠지만 그것은 시인에게 새로운 노래로 부활하지 않는다. 시인은 단지 그곳에서 ‘먼지 쌓이는 한낮에 놀다가는/ 그림자’일 뿐이다. 시인은 전통적인 가락에서 ‘모가지를 매어달리는 빛살’을 보고 ‘손가락 입술까지’ 동화되어 가는 자신을 느끼지만 그것은 그저 ‘눈물 뿌리던 사랑’이었으므로 더 이상 옛노래에 연연하지 않는다. 전통은 금가락지처럼 빛나고 아름답지만 시인은 그저 그 빛 속에서 그림자로만 남는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아마도 선생이 이 작품 이전에 썼을 전통지향적인 경향과는 다른 시세계에 대한 탐구의 시발점으로 읽는다. 전통과 토속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은 이후 선생의 시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지만 전통적인 서정시의 문법과는 변별되는, 이미지와 생동감 있는 리듬을 바탕으로 한 심미적 세계의 가치 추구라는 홍해리 시세계의 출발은 이미 초기시부터 형성되었던 것이다.
4
선생의 시풍은 제3 시집 『무교동』편에 와서 사회적 상상력을 동원하면서 문명비판의 방향으로 변화하지만 ‘이미지의 연상적 전개와 수사적 자세와 활달한 리듬은 거의 변화가 없다’는 이영걸 시인의 지적은 음미할 만하다. 선생은 사회적인 비판을 주제로 시를 쓸 때에 일부 직설적인 어법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이미지를 생동감 있는 리듬에 실어서 상황에 대한 분위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
아스팔트와 시궁창으로 내리는
자정의 불빛
숨을 자들 다 숨어버리고
오줌 먹은 담벼락과 오물찌꺼기가
텅 빈 도시를 지킬 때
하늘에서 내려온 하얀 달빛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린다
- 〈무교동·12〉의 일부
‘무교동’은 도시문명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시인은 ‘아스팔트와 시궁창’, ‘오줌 먹은 담벼락과 오물찌꺼기’ 등 ‘어둠’의 이미지로 그 공간을 묘사한다. ‘숨을 자들 다 숨어버린’ 자정의 시간은 아마도 70년대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시대상황을 뜻하는 것으로 읽히는데 그 상황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부끄러움의 주체가 자신이 아닌 자연인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끄러움은 윤동주의 시가 그렇듯이 시대상황에 대한 인식과 자기반성에서 오는 감정이지만 선생은 시대상황에 대한 인식 이후에 자연을 반성의 주체로 놓는다. 암울한 도시의 공간과 시대의 어둠을 시인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하얀 달빛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시인이 새로운 출발을 위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영원한 종말
영원한 시작을 위하여
불의 꿈, 물의 꿈, 바람의 꿈, 모래의 꿈, 소리의
꿈, 빛깔의 꿈, 사람의 꿈, 죽음의 꿈, 하늘의 꿈,
꿈의 꿈들을 싣고
바다로 바다로 달려가는
끝없는 한강줄기
물빛에 반짝이는 허공의 불빛
절망의 하얀 손들이
그 불빛을 잡고
허허로이 나부끼는 덧없는 깃발이 되어
하염없이 펄럭이고 있다
영원한 끝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자궁
서울의 클리토리스
숱한 뉘우침을 만나
질긴 어둠이 되고 있다.
- 〈무교동·15〉의 일부
무교동은 ‘대한민국의 자궁’인 ‘서울의 클리토리스’이다. 부정적이고 어둠뿐이던 그 공간이 단숨에 대한민국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가 되는 것은 ‘숱한 뉘우침’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 뉘우침의 색인에는 ‘물, 불, 모래, 사람, 죽음’ 등 삼라만상이 다 들어 있다. ‘클리토리스’처럼 무교동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 숨어 있지만 가장 예민한 감각으로 시대의 뉘우침을 듣고, 인간과 자연의 꿈을 품으며, 새로운 출발을 향한 시간을 예비하고 있다. 그 출발의 방향이 무교동과 같은 현실세계가 아니라 미적 자연의 세계라는 것은 앞의 시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무교동 연작시편은 선생이 서울로 이사한 후 겪게 된 갈등의 산물로써 선생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시대와의 불화의식, 문명비판 등을 주제로 하고 있음에도 무겁게 읽히지 않는 것은 리듬 때문이다. 예로 든 시들은 대부분이 한 행이 2음보, 혹은 2음보가 중첩 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속도감은 전언의 정확성이나 진실성 보다는 독자들에게 상황에 대한 시인의 정서적 반응에 더 주의를 갖도록 하는 효과를 가진다. 운율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적 특징은 세계가 아무리 부정적이고 분열적이어도 그 세계를 긍정하고 통합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세계관의 반증이다.
5
선생의 시는 아무래도 현실세계의 체험의 가치를 추구하기 보다는 심미적 가치를 중시한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으로 본다. 선생의 시를 초기시부터 후기시까지 일독한 후 나는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시인들이 한 번쯤은 언급하고 있는 가족, 혹은 가족사에 대한 시편이 거의 없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몇 편이 보이긴 하여도 아주 단편적인 것뿐이다. 또한 현실의 경험적 세계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시편은 「무교동」연작시편 외에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2월말 시낭송회가 끝나고 행한 뒤풀이에서 나는 이 점에 관하여 말씀을 드렸더니 선생은 조금 생각해보더니 “정말, 그렇네. 거의 없는 게 아니라 아주 없지.” 라며 선선히 인정하였다. 나는 그 까닭을 더 물어보려다가 그만 두었다. 선생은 우리나라 시단에서는 초기부터 현재까지 자연과 심미적 세계의 미학적인 가치에 대한 탐구로 일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미학적인 가치에 대한 탐구의 절정에 난蘭이 자리하고 있다. 70년대에 시작해서 9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선생의 난에 대한 사랑과 탐구는 선생이 자부하듯이 현시단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선생이 난에 열정을 쏟았던 이유를 시대와의 불화 속에서 시인으로서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선택한 것으로 보았다. 나는 얼마 전에 이런 점을 말씀드리고 난을 탐구하게 된 계기에 대해 질문을 드렸다. 선생은 “그런 거창한 뜻 보다는 조선시대 문인인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을 읽다가 ‘동국무진란東國無眞蘭 : 조선에는 진정한 난이 없다’라는 구절을 보았는데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난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내심 그럴 듯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실망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역시 탐미주의자다운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집에 난분이 많이 남아 있는지 물어보았다. 선생은 난농장을 하는 친구에게 그냥 다 주어버렸다고 했다. 의아해하는 나를 보고 선생은 “그 친구가 내 아들 결혼할 때 신세를 갚기는 했지.”라며 “난은 풀일 뿐이야. 풀을 풀로 보아야지 돈으로 보는 순간 난은 사라져버리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자연이다. 자연의 마음을 가지고 함께 살아야 한다. 인격으로 대하고 같이 대화하며 생활해야 한다. 약간의 무관심과 적당한 게으름이 약이다. 자연은 그런 것이 아닌가. 자연은 가장 오묘하고 아름다운 詩이다. 우리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시이다. 난은 시이다. 서정시요 서사시이다.”
-시집 『애란』의 서문에서
선생에게 가장 아름다운 미는 자연이다. 자연 중에서도 선생의 마음을 사로잡는 난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이다. 자연은 우리가 흉내낼 수 없는 가장 오묘한 시인 까닭으로 난이야말로 시인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선생에게 난과 자연과 시는 하나이다. 시집 『애란』은 난과 자연과 시에 대한 선생의 미학적인 탐구의 결정체이다.
수천 길
암흑의 갱 속
반짝이는 언어의 사금
불도 없이 캐고 있는
이,
가슴엔
아지랑이
하늘엔
노고지리.
-〈애란愛蘭-시인詩人〉전문
난이 자연의 보석이듯이 시는 언어의 보석이다. 시를 쓰는 사람은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언어의 광맥을 찾아 ‘수천 길/ 암흑의 갱 속’을 광부처럼 파고 들어가야 한다. 동료도 없고 ‘불도 없’다. 수천 길 지하에서부터 하늘에 이르는 수직적 높이, 그러한 절대고독의 경지에서 ‘반짝이는 언어의 사금’ 하나를 시인은 가슴에 품지만 정작 그 언어는 ‘아지랑이’처럼 실체가 없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노고지리’의 지저귐처럼 노래의 여운만 있을 뿐이다. 만약 시인이 ‘언어의 사금’에 집착한다면 그는 이미 시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정주할 거처가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에서 정금같은 언어를 발굴하지만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 노래할 뿐이다. 시의 언어가 그렇게 노래처럼 아름답고 자유로운 것이기에 난초처럼 무소유의 향기를 품는 것이 아니겠는가.
6
시집 『애란』을 출간한 8년 후에 선생은 시집 『봄, 벼락치다』를 출간한다. 이전에 2년마다 시집을 출간한 간격으로 보면 꽤 오랜 공백 기간이다. 나는 그 까닭에 대하여 물어보았으나 “뭔가 꺾이어서 그랬다”는 대답 이외의 소득은 얻지 못하였다. 아마 선생에게 그 기간은 시세계에 대한 변화를 모색하는 시간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과연 선생은 같은 해에 『푸른 느낌표!』를 출간하고, 2년 후 『황금감옥』과 뒤이어 시선집 『비타민 詩』를 연속해서 간행한다. 그리고 2010년에는 『비밀』을 출간하는 등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창작욕을 선보이는데 출간하는 시집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연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탐구가 깊이를 더하고, 시와 시론에 대한 시가 자주 눈에 뜨인다. 시집 『비밀』의 서문을 대신하여 쓴 「명창정궤의 시를 위하여」는 시로 쓴 시인의 시론으로 읽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온다. 그 중에 선생의 시정신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시인은 감투도 명예도 아니다
상을 타기 위해, 시비를 세우기 위해, 동분하고 서주할 일인가
그 시간과 수고를 시 쓰는 일에 투자하라
그것이 시인에겐 소득이요, 독자에겐 기쁨이다
오로지 올곧은 선비의 양심과 정신이 필요할 따름이다“
이 글의 요점은 ‘시인은 선비이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선비는 누구를 말하는 가? 선비는 우선 독서하는 사람이다. 독서를 게을리 하는 시인은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선비가 물질보다는 정신에 가치를 더 두는 사람인 것처럼 시인은 감투와 명예와 같은 외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시인이라 할 수 없다. 선비가 시서화를 통하여 교양과 정신세계를 가꾸어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듯이 시인은 시를 통하여 맑고 깨끗한 정신세계를 독자들에게 제공해야 한다. 선비는 이득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고 의로움을 추구한다. 다라서 시속에 따라 자신의 처세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선비이고 시인이다. 선비의 양심과 정신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구태의연한 가치가 아니다. 선비가 한 나라의 정신문화의 뿌리이듯이 시인은 현시대의 정신문화의 뿌리이다. 시인의 정신이 썩으면 한 나라의 정신문화가 썩는 것이다. 현재 시인의 수가 몇 만 명을 상회한다고 한다. 가히 시인공화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이기는 하지만 시인의 본분을 잊고 외적인 이로움에만 눈길을 돌리는 시인들이 없지 않다. 선생은 그런 시인들이 못마땅하다. 그래서 선생이 다른 문학단체의 행사에 거의 참석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명창정궤明窓淨几’는 시인이 거처하는 정신의 서재이다. 오늘날 가끔 선비정신을 말하고 있는 시인은 있지만 선생처럼 삶과 문학이 소슬한 한 채의 집을 이루고 있는 시인은 거의 없다. 나는 가끔 마음이 어지러울 때 선생의 이 글을 자경문 삼아서 읽는다. 나는 아직 선생의 서재에 초대를 받지 못하였지만 글을 통해서나마 시인의 품격과 향기가 배어있는 차의 맛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느끼고 배울 수 있게 된 점을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다. 조지훈 시인을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라고 하는데, 그 분의 제자인 선생이야말로 선비의 진면목을 온몸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몸으로 산을 만들었다
허물고,
다시 쌓았다
무너뜨린다.
그것이 온몸으로 세상을 재는
한평생의 길,
山은 몸속에 있는
무등無等의 산이다.
-〈자벌레〉전문
선생의 블로그에 실린 자선시 10편 중의 한 편이다. 자신의 삶을 닮은 시라서 뽑은 것이라는 촌평이 덧붙여 있다. 4연 8행의 형식에 한 연은 2행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4연은 기승전결의 구조로 시에서 가장 많이 차용되는 형식이며 1연 2행으로 이루어진 형식은 정지용과 청록파의 초기시에 많이 보이는 것으로 시의 운율성을 살리고 의미의 통일적인 효과를 불러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자벌레’는 서정적 자아의 투사물이다. 1연과 2연은 자벌레의 운행을 시인의 시작과 연관지어 비유적으로 나타냈다. 자벌레는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앞으로 나가는데 수축할 때는 ‘산’처럼 몸의 중앙이 솟아오르고 이완할 때는 평지가 되는 것처럼 몸을 ‘무너뜨리며’ 간다. 시인도 시를 쓸 때는 자신의 온몸을 바쳐 한 편의 시/산을 세우는 것이며 다음 시를 쓸 때는 다시 자기가 쓴 시를 무너뜨려야만 새로운 시를 향하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자벌레가 자신의 몸길이만큼 앞으로 나아가듯이 시인도 자신의 ‘온몸으로 세상을 재’며 ‘한평생’ 시를 써왔다. 산은 시인이 평생을 쓴 시이다. 그 산/시는 그러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몸속’에 ‘무등無等’의 형태로 존재한다. 무등이라! 시를 온몸으로 쓴다고 한 김수영 시인도 여기까지는 미치지 못했으리라. 감히 온몸으로 시를 쓴다고 선언하기도 힘든데 온몸으로 쓴 시를 선생은 ‘무등’이라고 정의한다. 시/산과 시 아닌 것/평지의 경계가 사라지는 놀라운 순간을 나는 이 시에서 목격한다. 시의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한 하이데거의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시의 언어는 존재의 본질을 담고 있지만 정작 시인은 그 속에 머물지 않는다. 자신이 지은 집을 끊임없이 허물고 새로운 집을 향해 가는 게 시인된 자의 숙명임을 아는 시인이 얼마나 되는가. 더군다나 그것이 무등이라면 이미 선생은 무애无涯의 경지에 든 것이란 말인가.
선생의 시는 아직 진행형이므로 이 시기를 후기시라고 말할 수 없으나 연륜을 더할수록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인 조화에 매우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선생은 목월 이상의 스타일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시형식의 유기적 조화와 완결미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선생은 고전주의자이다. 이러한 시적 경향은 아무래도 선생의 스승인 조지훈 시인의 영향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안수길 소설가는 시인론에서 김용호 씨를 선생의 스승이라고 언급하였는데 내가 확인한 바로는 그 정도의 관계는 아니다.) 그러나 조지훈 시인의 중기 이후의 시가 현실과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으로 선회하면서 다소 형식적인 느슨함을 보이는 반면에 선생의 시는 후기에도 형식의 일탈이나 이완은 심해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선생의 작품 중에서 〈봄, 벼락치다〉를 좋아하는데 다소 자유로운 형식을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자연에 대한 통찰, 생명에 대한 경이를 선시적인 비유와 압축으로 마무리하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다.
7
선생의 본명은 봉의峯義이며 필명으로 해리海里를 쓰고 있다. 연보를 보니 60년도부터 필명을 쓰고 있었는데, 그 연유를 물으니 선생의 답변은 의외로 소박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클레멘타인인데, 거 왜 그 노래에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가 나오잖아. 넓을 홍洪자에 바다 해海자가 거기에서 나온 거야.” 물론 바다가 없는 충북이 고향이어서 미지의 바다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지만 해리라는 필명을 쓰게 된 직접적인 까닭은 그 때문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범박하게나마 선생의 문학적 경향에 대한 일단을 이해하게 되었다. 선생의 시는 지금 이곳에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해리라는 필명이 이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선생의 시적 출발은 현실세계에 대한 탐구보다는 심미적 세계의 가치 추구가 우선한다고 진술하였다. 선생의 미의식은 현실적 가치와 심미적 가치가 충돌할 경우, 때로는 비장미를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있는 세계와 있어야 하는 세계를 조화롭게 보려고 하는 우아미가 우세하다. 그런 면에서 선생은 형식적으로는 고전주의자이며 기질적으로는 낭만주의자이면서 전통에서 새로운 미학적 가치를 찾는 이 시대의 미학주의자요 멋과 풍류를 온몸으로 즐기는 선비의 시인이다.
시詩의 나라
우이도원牛耳桃源
찔레꽃 속에 사는
그대의 가슴속
해종일
까막딱따구리와 노는
바람과 물소리
새벽마다 꿈이 생생한
한 사내가 끝없이 가고 있는
행과 행 사이
눈 시린 푸른 매화,
대나무 까맣게 웃고 있는
솔밭 옆 마을
꽃술이 술꽃으로 피는
난정蘭丁의 누옥이 잇는
말씀으로 서는 마을
그곳이 홍해리洪海里인가.
-<홍해리는 어디 있는가> 전문
해리는 누구이며 해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 흔한 문학상 하나 받은 일 없는 무관의 제왕이 해리이다. 적절하게 타협하며 살아가야 편한 세상에 홀로 낙락장송처럼 푸른 귀를 가진 시인, 가슴에 우주를 품고 자연의 이법을 자벌레처럼 온몸으로 재면서 살아가는 시인, 유명한 시인 보다는 혼이 살아있는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시인이 해리이다. 해리는 진정한 시의 나라이다. 임보, 채희문, 이생진 시인과 함께 시와 술로 풍류를 즐기며 사는 우이도원이 해리이다. 선생의 시에 그토록 많이 나오는 찔레꽃 피는 마을이 해리이다. 선생이 시작에 몰두하느라 허리를 다쳤던 곳, 그곳에서 우이시낭송회를 20년 이상 이끌고, 자연과 생명과 시를 목숨처럼 여기는 《우리시》의 모태가 되었던 시수헌詩壽軒이 해리이다. 매실이 열리면 매화술을 담그고, 술이 익으면 벗들을 불러 꽃잎 띄운 술잔을 돌리는 곳, 시인들의 얼굴에 은은히 난초향이 어리는 곳, 세란헌洗蘭軒이 해리이다. 난정蘭丁의 누옥이 있는 말씀으로 서는 마을, 온몸으로 시를 쓰고 다시 부수며 새벽 세 시면 어김없이 한 사발의 냉수와 같은 시를 쓰기 위해 선정에 드는 마을, 그곳이 해리이다. 서정시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시대에 서정시의 불을 살리려고 온몸으로 불쏘시개가 되는 서정시의 순교자, 그 사람이 해리이다.
자연으로 가는 길에 시인의 마을이 있다. 해리는 시인의 마을의 촌장이다. 나도 그 마을에 물처럼 바람처럼 가서 살고 싶다. 그러나 나에게 해리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다.
- 시선집『시인이여 詩人이여』(2011, 우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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