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시인론> 난정기蘭丁記 / 임보(시인)

洪 海 里 2011. 5. 17. 15:48

<시인론>

 

난정기蘭丁記

 

임 보(시인)

 

 

 

 

세이천洗耳泉 오르는 솔밭 고개

바다만큼 바다만큼 난초蘭草밭 피워 놓고

한란寒蘭, 춘란春蘭, 소심素心, 보세報歲

흐르는 가지마다 그넷줄 얽어

구름을 박차고 하늘을 날다

빈 가슴에 시가 익으면

열 서넛 동자놈 오줌을 싸듯

세상에다 버럭버럭 시를 갈긴다.

 

  졸 시집『은수달 사냥』(1988)에 수록되어 있는 「난초 書房 海里」라는 글인데 난정에 대한 인상을 8행의 짧은 시 속에 담아 본 것이다. 그가 난에 심취한 것은 세상에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한때는 남도의 산하를 매 주말 누비며 채취해 온 기천 분의 춘란을 기르기 위해 자신의 집보다 넓은 온실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蘭丁’이라고 칭호한 것이다. 그러니 난정이 난을 즐긴다는 것은 특별한 정보랄 것도 없다. 이 글의 핵심은 마지막 두 행에 있다.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시원하게 오줌을 갈기듯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시를 쏟아내는 그의 열정을 찬미한 것이다. 그의 시는 늘 활기에 차 있다. 나이가 들어도 젊음을 잃지 않고 싱싱하다.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 홍해리「봄, 벼락치다」

 

 

  난정의 시집『봄, 벼락치다』(2006)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봄의 경이를 낭떠러지와 벼락이라는 역설적인 두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계절적인 급격한 변이를 ‘천길 낭떠러지’로, 봄이 화자의 심리에 던지는 충격을 ‘벼락’으로 보았으리라. 그러나 그 벼락은 화자를 혼절케 하는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을 환하게 밝히는 광명[昭昭明明]이다. 두 이미지를 작품의 전후에 배치하여 사진의 액자처럼 감싸고 있는 구조도 흥미롭다.

  속도감 있게 번지고 있는 북한산 자락의 진달래꽃들을 타오르는 불, 유격대(파르티잔)의 격전, 창궐하는 역병 등 역동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싱그럽게 잎을 피우는 나무는 푸른 불꽃으로 몸을 태우는 소신공양인가? 바위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도 향불 같다. 한겨울 감추었던 종아리 드러내고 거리로 나온 여성들 다 춘향이처럼 곱다. 벌이며 나비 같은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몸치장하고 짝을 찾는구나. 이 밝은 봄날 그냥 보내지 말라고, 내 속에서도 나를 일깨우는 소리 은은하다.

  제4연은 좀 난해한 면이 없지 않지만 내 나름대로 더듬어 읽어 보면 이런 뜻이 아닌가 짐작된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은 일체가 한 집안 식구와 같다. 그러므로 서로 분별할 일이 아닌데 새의 날개나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처럼 내 마음속에도 잔잔한 파동이 일어난다. 속된 욕망을 잘라내고자 하나 뜻대로 잘 되지 않는 이 고뇌, 이 봄에도 북한산의 봄과 더불어 내가 앓는다. ‘화병’의 ‘화’는 火와 花의 중의(重義)를 지닌 시어로 보아 무방하리라.

  이처럼 난정의 시는 활력이 넘쳐난다.

 

  이 글을 쓰면서 살펴보건대 난정과 나는 여러 모로 상반된 취향과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난정이 살아 있는 난을 좋아하고 있을 때 나는 생명이 없는 돌[水石]에 빠져 있었다. 그는 천성이 부지런해서 많은 생명들을 보살필 수 있었던 반면, 나는 게을러서 처음부터 부담 없는 돌에 기울었던 것 같다. 그는 열정적인 낭만파라면 나는 이지적인 고전파에 가깝다. 그는 내가 못 가진 적극성과 과단성 그리고 카리스마를 지녔다. 아마도 그가 지닌 이러한 성품이 <우이동 시인들>에 이어『우리詩』를 수십 년 동안 이끌어 왔으리라.

 

  나와 난정이 북한산 밑자락 우이동 골짝(행정구역상 난정은 우이동 나는 쌍문동이지만 지호지간의 거리다.)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1970년도 후반 무렵이다. 그런데 우리가 교유를 하게 된 것은 지연地緣이 아닌 인연人緣 때문이었다.

  내 맏딸인 우원진이 성신여중 2학년 때 그 학교의 영어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난정을 좋아해서 내 처녀시집 『임보의 시들 <59-74>』를 보낸 바 있다. 이로 하여 우원진의 애비가 임보라는 사실을 난정이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때가 아마 1978쯤으로 기억된다. 이를 계기로 서로를 알게 되었으니 우리의 교유는 30년이 넘은 셈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자주 만나게 된 것은 <우이동 시인들>이라는 동인지를 함께 하면서부터이다.

 

  1986년 가을부터 우이동 인근에 사는 몇 시인들- 홍해리 채희문 신갑선 이생진 등이 자주 만나서 술을 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의기투합하여 사화집을 만들어 보자는 데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우이동 시인들’이라는 동인이 탄생하게 되고 이듬해인 1987년 봄에 사화집 창간호가 간행되었다. 그러면서 동인지 출간 기념으로 시낭송을 덕성여대 입구에 자리한 <파인웨이>이라는 카페에서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이동시낭송회(지금의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의 효시가 된다.

  우이동 시인들의 사화집은 매년 2회씩 봄가을에 간행되었다. 1999년 ‘우이시회’에 통합되기까지 총 25집을 만들어 냈다. 신갑선 시인은 제6집까지만 참여하고 떠났기 때문에 제7집부터서는 동인들이 네 사람이었다. 우리는 한 동네에 살고 있어서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주말은 물론 주중에도 틈만 나면 만났다. 꽃이 피면 꽃 핑계로 단풍이 들면 단풍 핑계로, 세이천에서 혹은 소귀천에서, 솔밭에서 혹은 진달래 능선에서 술병을 지고 돌아다녔다. 그것도 성이 차지 않아서 우이동 한 건물의 옥탑을 빌어 사랑방 ‘시수헌詩壽軒’을 만들어 놓고 북을 울리기도 하고, 삼각산 자락에 수십 그루의 복숭아나무로 ‘우이도원牛耳桃源’을 일궈 놓고 흥청거리며 지냈다. 꽃이 한창 피어나는 봄철엔 시화제詩花祭를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에는 단풍시제丹楓詩祭를 천지신명께 올리며 시와 풍악의 잔치를 벌이는 곳도 바로 이 우이도원이다.

 

  우리 네 사람은 매 사화집에 합작시를 만들어 실었다. 하나의 시제를 놓고 한 사람이 첫 연을 시작하면 그것을 보고 다음 사람이 둘째 연을 쓰고 또 다음 사람이 이어받아 쓰는 공동 연작의 형식이다. 다음의 글은 제24집 『아름다운 동행』에 수록된 합작시 「우이동 시인들」이란 제목의 상호 인물평이다. 채희문, 홍해리, 임보, 이생진 순으로 썼다.

 

 

홍해리는 애란가愛蘭歌를 부르며 불도저를 모는 ‘난정법사蘭丁法師

임보는구름위에앉아마술부채로시를빚는‘시도사詩道士

이생진은 섬을 돌며 시를 섬으로 캐는 ‘시심마니’

채희문은 버스 끊어진 정거장의 썰렁한 ‘에뜨랑제’

 

임보 시인은 일경구화一莖九華다, 백운대 청상한 바람으로 향을 날리는.

이생진 시인은 제주한란濟州寒蘭이다, 성산포 청정한 석간수로 꽃을 올리는.

채희문 시인은 중국보세中國報歲다, 인수봉 삽상한 침묵으로 꽃을 피우는.

홍해리는 춘란소심春蘭素心이다, 우이동 옥진의 소주로 향을 씻고 있는.

 

고불古佛 이생진李生珍은 성산포城山浦 물소

포우抱牛 채희문은 포천抱川의 황소

난정蘭丁 홍해리洪海里는 청원淸原의 들소

나 임보林步는 화산華山의 하찮은 염소

 

‘산다는 것은 기다리는 거’ 누가 올 것 같아 문을 닫지 못하는 희문喜門

                          ‘애란愛蘭은 혼의 전령’ 시의 생리生理, 시의 열양熱襄, 시의 정자亭子, 시의 해리海里

‘시인은 북이다. 쓰고 싶은 놈 다 써라’ 소리치며 숲 속으로 걸어가는 임보林步

‘갈매기와 나는 한배에서 태어났으니까’ 끼룩끼룩 바다로 떠나는 생진生珍

 

 

  서로를 공히 부추기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보이고 있다. 나는 내가 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더 줄여 「네 마리의 소」라는 제목으로 사단시집 『운주천불』(2000)에 실었다.

 

 

고불古佛 이생진李生珍은 물소/ 포우抱牛 채희문蔡熙汶은 황소/

난정蘭丁 홍해리洪海里는 들소/ 나 임보林步는 조그만 염소

 

 

  우이동 시인들 네 사람을 우직한 소에 비유해서 읊은 것인데 이 작품의 말미엔 다음과 같은 짧은 해설이 달려 있다.

 

* 우이동 사인방(四人幇)의 인물시다. 고불은 섬에 미처 늘 물을 떠나지 못한 것이 마치 물소와 같다. 포우는 이중섭의 그림 속에 나온 황소처럼 강렬해 보이지만 사실 양순하고, 난정은 난과 매화를 즐기는 선비지만 들소와 같은 정력이 없지 않다. 나 임보는 굳이 소라고 친다면 보잘것없는 염소라고나 할까. 이분들의 아호는 내가 붙인 것이다.

 

  세상물정 모르고 지낸 네 사람의 풍류를 나는「시수헌詩壽軒」이라는 글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한시로 읊었다.

 

 

詩茶酒鼓 佛牛蘭華* 不聽騷音 不問世情 牛耳好日 勝於仙境

(시에, 차에, 술에, 북에/ 시수헌의 네 사람/

세상 소리에 귀 닫고/ 세상 물정에 입 다문/

소귀골의 좋은 나날/ 신선 세상 뺨칠레라!)

 

* 佛은 古佛 이생진, 牛는 抱牛 채희문, 蘭은 蘭丁 홍해리, 華는 華山 임보인데

이를 붙이면 佛牛와 蘭華가 되는 것이 흥미롭다.

 

 

  시화집을 간행하고, 사랑방 시수헌을 만들고, 우이도원을 일구며 시제를 올리는 등 이러한 일을 꾸미고 주도한 사람이 난정이다. 그에겐 들소처럼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있다.

  또한 그의 성미는 곧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초심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킨다. 그가 한번 좋아한 사람은 평생 변함없이 좋아하고 그의 눈에 한번 거슬린 사람은 회복하기 힘들다. 결벽증에 가까운 그의 이런 성미는 글을 쓰는 데도 작용한다. 그는 산문을 쓰려 하지 않는다. 시인이 시를 쓰지 않고 산문에 기웃거리는 것은 순수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세란헌洗蘭軒」이라 제한 난정의 작품을 보도록 하자.

 

 

하늘이 씻은 너를 내 다시 씻노니

내 몸에 끼는 덧없는 세월의 티끌

부질없이 헛되고 헛된 일이 어리석구나

동향마루 바람이 언뜻 눈썹에 차다.

 

 

  그는 이 글의 말미에 ‘우이동에서 난을 기르고 있는 달팽이집만한 마루’라고 주를 달았다. <세란헌>은 난정의 당호다. 난은 원래 정결한 식물이다. 그런데도 만족치 못하고 그 난을 더 정결히 하려고 씻는 집이란 뜻이다. 이 작품에서의 난은 난정 자신의 상징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염결 지향의 그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난정은 담배를 아주 싫어한다. 그 주변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간 핀잔을 듣기 마련이다. 많은 애연가들을 금연토록 만든 금연전도사다. 평교사인 그가 학교의 교무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장실의 재떨이까지 추방한 일화는 유명하다. 잡기雜技도 그는 싫어한다. 화투는 말할 것도 없고 바둑 장기 당구 같은 오락을 일절 가까이 하지 않는다.

문학단체에서 거들먹거리는 소위 문단정치인이라든지, 조잡한 문예지를 만들어 수준미달의 신인들을 양산하는 문단 장사치들을 그는 혐오한다. 감투나 수상을 넘보지 않으며 아첨과 아부를 싫어한다. 다만 그가 좋아하는 것이 시 이외에 하나 더 있다. 술이다. 아마도 마음에 맞는 사람들의 술자리면 종일 마셔도 사양치 않으리라. 수년 전 난정과 나는 거금도 앞 바다에 배를 띄워 놓고 종일 마셔대며 주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독일의 시인

귄터 아이히(Guenter Eich, 1907~1952)는 자랑했다

 

사론스키에 내 시를 읽는 독자가 한 사람

바트나우하임에도 또 한 사람 있음을 안다

그러면 벌써 두 명 아닌가!

 

춘추시대의 악인樂人 백아伯牙

그의 소리를 아는 유일한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세상을 떠나자

거문고 줄을 끊었다

 

귄터는 둘

백아는 하나

 

오늘 내 소리를 듣는 이는 몇인가?

내가 알기로는 아직

하나도 없다

 

 

  졸시 「지음知音」이다. 한평생 자신을 알아 줄 지기를 얻기가 힘들다. 나는 하나도 없다고 한탄했는데, 그래도 혹 내 소리를 들어 줄 ‘지음知音’이 한 사람쯤 내 가까이에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있다. 우이동 사인방 가운데서 고불古佛은 방학동으로 포우抱牛는 의정부로 편리한 아파트를 찾아 일찌감치 떠나갔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우이동 골짝을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버티고 있다. 난정이 아직도 세란헌에 머물며 내 소리를 들어 주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두 집의 내외는 매년 4월 25일 전후쯤 자리를 함께 해 서로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며 또한 자축하는 자리를 갖는다. 나의 기념일을 24일, 난정은 26일이기 때문이다.

 

                                                                    - 시선집『시인이여 詩人이여』(2011, 우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