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李茂原 시인을 말한다 / 洪海里 시인을 말한다

洪 海 里 2011. 6. 4. 21:41

 

<시인론>

 

<시인론>

 

李茂原 시인을 말한다

 - 불이 물에게, 바람이 바위에게

 

洪 海 里 (시인)

 

 

점과

선과 색깔로

우는

새여,

날개는 접어

천상에 두고

수묵색

노래 엮어,

이승의 하늘

무변의 지상

원으로 그리네.

              - 洪海里의「풍경 -李茂原」

 

 

  위의 글은 87년엔가 내가 발표한 작품이다. 인물을 시화하는 일이 쉽지도 않으려니와 제대로 되지도 않는 일인 것을 알지만 내 나름대로 이무원 시인을 그려 보았다.

우리가 만난 것이 1960년 봄, 까까머리 겨우 면하고서였으니 벌써 35년이란 기인 세월의 띠가 우리 두 사람을 묶고 있는 셈이다. 그간 우리에겐 아무런 마음의 변화가 없었다. 나는 변했는지 몰라도 그는 내게 있어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가 35년이나 우정의 변화가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인품 덕이다.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사실은 아는 게 없다. 할 말이 없다.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은 누구에게도 펼쳐 보일 수 없다.

  잡지사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 할 말이 없다고 하니 상대방이 쓰기로 했으니 나도 쓰라는 김규화 형의 명이었다.(『진단시』모임에서는 이렇게 호칭하고 있음.) 그러나 목을 조르는 것 같다. 정말 할 말은 가슴속 깊은 바다에 묻어 두어야 한다.

 

  이무원 시인은 돌이다. 바위다. 피가 도는, 따뜻한 피가 도는 살아 있는, 움직이는 돌이다. 『우이동시인들』동인(이생진, 임보, 채희문, 홍해리)의 작업실 창을 열면 북한산의 인수봉 백운봉 만경봉이 그대로 가슴에 안긴다. 인수봉은 그의 머리요, 백운봉은 그의 가슴, 만경봉은 그의 마음으로 내게 살아 있다. 그는 산이다.

 

  그는 물이요, 공기와 같아서 같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물 같은 사람 - 그래서 그는 오래 전부터 瑞雨라는 호를 달고 다닌다. 때로는 그의 호를 거꾸로 ‘우서(웃어)?’ 하고 놀리기도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그는 정말 비다. 서우瑞雨는 길하고 상서로운 비다. 천둥 번개와 더불어 쏟아지는 폭우가 아니라 필요할 때 조용조용히 내려 온 세상을 포근히 적셔 주는 비다. 기인 겨울잠을 깨우는 봄비요, 여름날 초록빛 숲을 씻어 그늘까지도 투명케 해 주는 시원한 단비요, 가을 저녁 일을 다 마치고 느긋한 마음으로 한잔 할 때 술맛 돋구는 밤비요, 책 펴들고 앉아 삼매경에 들 때 처마 끝에 듣는 느긋한 겨울비가 그다.

 

  나는 불이라서 물인 그에게 가면 늘 조용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바람이라서 바위인 그에게 가면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불이라서 술(물)에 빠지고 그는 물이라서 불(담배)에 빠져 산다. 나는 그에게 불을 끄라 하고 그도 나를 보면 물을 끄라 한다. 담배는 그에게 독이요, 술은 나에게 독이라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와 술을 하지 않는 그가 만나면 서로 끊어라 끊어라 한다. 그러나 그가 담배를 끊을 것 같지도 않고 내가 술을 끊을 것 같지도 않다.

 

  ‘그는 돌이다’라는 말은 앞서 했지만 그 돌 속에는 글과 그림이 보석처럼 박혀 빛을 내고 있다. 겉으로 드러내는 일 없이 오랫동안 닦은 그림 솜씨와 글씨는 이미 아는 이들은 다 알고 있다.

  이무원 시인은『詩文學』을 통해 등단한 후 ‘80년에 첫 시집『물에 젖는 하늘』을 내고 나서 7년을 참다 두 번째 시집『그림자 찾기』를 펴냈다. 이제 또 7년이 되는 금년에는 세 번째 시집이 빛을 보리라 믿는다.

  이제 50대 중반으로 진입하면서 그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제발 담배 좀 줄이고 건강에 유의해서 많은 작품을 보여 달라는 것뿐이다.

  불이 물에게, 바람이 바위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냥 가슴에 품고 살리라.

                                                                                                          - 월간『詩文學』(1994년 2월호)

 

 

 

洪海里 시인을 말한다

- 식물성의 말없는 시인

 

李 茂 原 (시인)

 

 

  그는 순식물성이다. 풀로 말하면 蘭이요, 나무로 말하면 梅花다. 술로 말하면 소주요, 밥으로 말하면 꽁보리밥이거나 순 쌀밥이지 팥이나 콩이 섞인 잡곡밥은 아니다. 그는 술을  좋아하지만 술을 욕되게 하는 법이 없고, 그는 詩를 생명처럼 사랑하지만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는 좋은 것은 좋고 싫은 것은 싫기 때문에 좋고도 싫다든가 싫지만 좋다는 어정쩡한 중간 개념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그는  직설적으로 짧게 말하므로써 더욱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이다. 두루뭉실 굴러가야 살기 편한 세상에 그는 낙락장송이듯 초연하다.

 

  이 다사다난, 복잡미묘한 세상에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오로지 시에만 매달려 사는 생활태도가 한편 부럽고 한편 답답해지기도 한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추진력의 화신이기도 하다. 그의 말에는 어떤 마력이 숨어 있는지, 평소에 닦아논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반작용인지는 몰라도 그가 맡아서 하는 일에는 여러 번 예고하거나 독촉하거나, 사정하거나 억압하지 않아도 의도된 대로 일은 척척 진행될 뿐만아니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따라주고 끝내는 찬사의 박수를 보내준다.

 

  그는 요즘 牛耳洞이 된 것 같다. 우이동으로 이사한 지 근 이십여 년, 처음에 우이동 산자락에 난초집을 멋들어지게 짓고 우이동을 예찬하면서 난 백여 분을 기르며 유유자적 난과 더불어 난이 되어 살더니 요즈음 그는 우이동의 몇몇 시우들(이생진, 임보, 채희문)과 뜻이 맞아 <우이동 시인들>이란 동인회를 만들어 시낭독회를 66회, 우이동 시인들의 동인지를 벌써 14호째나 만들어 냈다. 이제는 우이동이 그를 우이동으로 만드는지 그가 우이동을 우이동으로 만드는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우이동의 솔바람 소리가 되고 洗耳泉의 샘물이 되더니 진달래가 온 산에 춤을 출 때면 <北漢山詩花祭>를, 가을이 와 낙엽이 구르면 <牛耳洞落葉祭>를 올리는 우이동 귀신이 다 되었다.

 

  <우이동 시낭독회>(매월 마지막 토요일 5시, 도봉도서관에서 개최)에 가 보면 그가 사회를 보는데 놀라운 것은 언제부터 저 친구가 저렇게 말을 잘 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의 재주란 숨어 있는 것인가. 도대체 모를 일이다. 술자리에서도 늘 안경을 벗어 호호 불면서 닦는다든가 상대방의 말을 받아 대꾸하기보다는 술잔에 손이 더 자주 가는 저 친구의 달변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의 서재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과 독서량이 그 공급원이 아닐까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는 나보고 담배 끊고 술 먹으라 하고 나는 그에게 담배맛도 모르고 무슨 시를 쓰느냐고 빈정대지만 나는 담배 때문에 위장병이 완치되지 않는다는 의사의 진단을 이미 받고 있으니 그의 말을 듣기는 들어야 할 것 같다. 그도 옛날보다는 술 실력이 많이 줄긴 했어도 마음속으로는 이제 그만 마시라고 술자리마다 눈치를 준다.

 

  우리는 대학 다닐 때 같은 하숙집에서 반찬이 시원찮다고 소복한 밥그릇 위에 숟가락을 꽂아 제사를 지내고, 함께 자취를 할 때는 쌀이 떨어져 밥을 굶은 채 답십리에서 안암동까지 걸어가 인촌 묘소 잔디밭에 팔베개를 하고 나란이 누워 고향 생각에 하늘이 젖어오던 공동의 추억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는 벌써 여덟 권의 시집을 냈고 또 한 권의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말 많고 번잡스런 세사를 외면하고 오직 시업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그의 은근과 끈기에 대해 박수를 보낼 뿐이다. 머지않아 그의 집 마당에 매화가 꽃을 피우면 그 향기와 더불어 우이동 산새들이 그를 알고 에워싸 춤추며 노래하리라.

 

<詩>

 

洪 海 里

 

산자락 울리는

칼바람

 

파란 하늘만 먹어도 넉넉한

새벽 숨결

 

선혈이듯 번지는

살 속의 뼈

 

헤어지고 나서야

풍기는 香

                         - 월간『시문학』(1994.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