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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눈빛으로 세운 나라, 시인이여 詩人이여! / 손현숙(시인)

洪 海 里 2012. 7. 26. 14:19

 

<서평>

 

눈빛으로 세운 나라, 시인이여 詩人이여!

  - 홍해리 시선집『시인이여 詩人이여』

 

손현숙(시인)

 

 

  선생님, 보내주신 시선집『시인이여 詩人이여』를 읽는 동안 여름은 무르익어 매미소리 강철 같습니다. 어찌 지내시는지요? 안부도 여쭙지 못한 시간은 참으로 속절없어서 어제와 오늘의 경계가 흐리기만 합니다. 그래도 제 품 속에서 선생님의 시들은 유일하게 현실로 자리잡아서 눈 떠서 읽고, 눈 감는 그 순간에도 선생님을 읽고 공부하는 중입니다.

  공부는 근본적으로 몸과 우주의 탐구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자연 역시 몸과 우주를 탐구하는 일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시편들은 적극적으로 자연을 사유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선생님께서 불러들이는 자연들은 선생님처럼 엄정해서 때로는 섬뜩하기도 한데요. 가끔은 선생님의 눈빛 앞에서, ‘저 눈빛이 세운 나라가 시의 나라다’, 라고 혼자 읊조리곤 했습니다. 담담하지만 날카롭고 또 한없이 깊어서 아무것도 거부할 수 없는 지경까지 건너가는 눈빛. 그러니 선생님은 도무지 말이 필요 없으신 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어보다 눈빛으로, 그것보다는 마음으로 세상을 읽고 보고 느끼는 그때, 선생님 손끝에 시가 도착하는 것이겠지요.

 

  선생님의 시선집『시인이여 詩人이여』에는 초기 시부터 근작 시까지 모두 여든 세 편의 시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편편마다 모두 귀한 시편들이라 귀퉁이를 접고 연필로 긋고 하면서 선생님의 시간을 향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했던 것은 다른 시인들이 시간을 건너면서 많은 변화를 보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선생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단 한 가지의 모습을 고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 속에 사람이 많이 등장하지 않았던 것과, 줄기차게 식물을 노래했던 사건입니다. 사람 없는 그 속에 사람이 살고 사랑이 익고, 이별까지도 너무 진해서 한 권의 시집을 읽는 동안 온 우주를 헤매고 돌아왔다는 이상한 경험.

 

노을이 타는

바닷속으로

 

소를 몰고

줄지어 들어가는

 

저녁녘의

女人들

 

노을빛이 살에 오른

바닷여인들.

「갯벌』 전문 - 시집『花史記』(1975)

 

  선생님의 초기 시인「갯벌」은 밀레의 만종처럼 고요합니다. 문자로 이렇게 선명한 그림을 그리는 선생님의 성품은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나 담백해서 호와 오가 분명한데요. 저렇게 맑은 심성 속으로는 어느 불순물이 끼어들 여지가 없겠습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선생님은 참으로 외로운 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노을빛이 살에 오른 바닷여인들’을 바라보는 담담한 눈빛은 끝이 없이 깊어서 타는 노을 바다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현대판 백수광부의 얼굴이 문득 지나가기도 합니다. 어디선가 음악소리 들리고, 뒤돌아다보지 않는 선생님의 뒷모습은 노을을 끌고 멀리 떠나가는 바다의 붉은 울음을 닮았습니다.

 

하늘이 씻은 너를 내 다시 씻노니

 

내 몸에 끼는 덧없는 세월의 티끌

 

부질없이 헛되고 헛된 일이 어리석구나

 

동향마루 바람이 언뜻 눈썹에 차다.

 

* 세란헌 : 우이동에서 난을 기르고 있는 달팽이집만한 마루임

 

『세란헌洗蘭軒전문 - 시집『은자의 북』(1992)

 

 

  선생님께서는 한때 우리나라의 난에 정신이 팔려서 시간을 몽땅 탕진하셨다는 소문 들었습니다. 탕진, 이라는 말이 선생님께 불충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선생님의 성품으로 미루어봐서 탕진, 이라는 말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겠다는 생각입니다. 어딘가에 몰입을 하면 그 쪽으로 계속 빠져드는 광인의 자세. 그 폭풍 같은 힘으로 선생님은 오랜 시간 시를 써오신 것이겠지요. 끝장을 보고야 마는 근성. 술자리에서도 선생님은 허리 한번 휘지 않고 무사처럼 버티는 것을 뵙곤 했었는데요. 마음을 확, 잡아끄는 ‘난’ 앞에서야 선생님은 내심 생의 모든 것을 거는 마음이었다는 것 쯤, 말 한마디 오고가지 않았어도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동향마루 바람이 언뜻 눈썹에” 찰 때 선생님은 부질없고 부질없는 오늘을 살고 있는 자신에게 또 채찍을 내리치셨을 겁니다. 난을 기르는 달팽이 집만한 마루에 무릎 꿇고 앉아서 하염없이 들여다보았을 저 난들의 폭력성. 누가 알았을까요.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고야 마는 게임이라는 것을요.

 

 

의 나라

우이도원牛耳桃源

찔레꽃 속에 사는

그대의 가슴속

해종일

까막딱따구리와 노는

바람과 물소리

새벽마다 꿈이 생생生生

한 사내가 끝없이 가고 있는

과 행 사이

눈 시린 푸른 매화,

대나무 까맣게 웃고 있는

솔밭 옆 마을

꽃술이 술꽃으로 피는

난정蘭丁의 누옥이 있는

말씀으로 서는 마을

그곳이 홍해리洪海里인가.

      『홍해리洪海里는 어디 있는가』 전문 - 시집『봄, 벼락치다』(2006)

 

 

  홍해리가 어디쯤인지 행정상의 구역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봄이 되면 청매 피는 곳으로 몸 기울이는 시인은 알고 있습니다. 4·19탑 어느 귀퉁이 청매의 군락지가 있는데요. 청매가 꽃망울 영글어서 몸 터트릴 때까지 바랑 하나 지고 서성이는 시인. 그리고 그때쯤 어김없이 누군가를 청해서 청매 꽃받침을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 그 쯤 어디가 홍해리, 라 알고 있습니다. 홍해리에서 청매 소식을 듣고 나서야 제 가슴 어디 만큼에서도 봄은 시작되는데요. 집안의 홍매나무가 담 너머로 휘어질 때, 어김없이 친구를 청해 술 한잔씩 치는 마을. 그 나무의 꽃들이 열매로 영글면 정성껏 따다 씻어서 차곡차곡 쌓아서, 술로 익히는 술 익는 마을. 그 술 정성으로 담아서 밤마다 잠 못 드는 시인에게 한아름 안기면서 무심히 돌아서는 마을. 누구나 들 수는 있지만, 누구나 잊지는 못하는 마을. 시로 말하고 시로 잠드는 그곳, 홍해리!.

 

 

네 앞에 서면

나는 그냥 배가 부르다

 

애인아, 잿물 같은고독은

어둘수록 화안하다

 

눈이 내린 날

나는 독 속에서 독이 올라

 

오지든 질그릇이든

서서 죽는 침묵의 집이 된다.

                   『독』 전문 - 시집『봄, 벼락치다』(2006)

 

 

  사랑의 속성은 어쩌면 고통이어서 잿물 같은 고통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속으로 서슴없이 걸어 들어가는 시인의 뒷모습은 뭐랄까, 죽음을 향해 가는 밤의 향기입니다. 어둠으로 칠갑을 한 침묵 속에서 평생을 서서 죽어야 하는 형벌. 그것을 마다않고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시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사랑 앞에서는 죽어도 배가 부른 시인은 잿물 같은 고독은 어두울수록 화안하다 말을 합니다. 한번 꽂히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시인의 습성은 사랑 앞에서도 변함이 없는데요. 그 사랑 독하고 위험해서 침묵으로 할, 하는 한 순간 집이 되었다가, 허공이 되었다가, 내생이 되었다가, 당신이 되었다가, 내가 되기도 하는데요. 독 속에서 기꺼이 독이 올라 자신을 해치고도 기쁨이어서 스스로 멸망이어도 좋은 독, 그 사랑의 힘. 침묵으로 집을 짓는 시인의 일평생이 지나갑니다.

 

세상의 가장 큰 북 내 몸속에 있네

온갖 소리북채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려 대는 귀북이네

 

한밤이나 새벽녘 북이 절로 울 때면

나는 지상에 없는 세월을 홀로 가네

 

봄이면 꽃이 와서 북을 깨우고

불같은 빗소리가 북채가 되어 난타공연을 하는 여름날

내 몸은 가뭇없는 황홀궁전

둥근 바람소리가 파문을 기르며 굴러가는 가을이 가면

눈이 내리면서 대숲을 귓속에 잠들게 하네

 

너무 작거나 큰 채는 북을 울리지 못해

북은 침묵의 늪에 달로 떠오르네

 

늘 나의 중심을 잡아주는 북,

때로는 천 개의 섬이 되어 반짝이고 있네

          『귀북은 줄창 우네』 전문-시집『황금감옥』(2008)

 

  우리가 듣는 소리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요. 우주의 소리는 너무 커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고 개미의 소리는 너무 작아서 또한 우리에게는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고 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소리겠지요. 시인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은 지금 이명을 앓고 계신 듯합니다. 남들은 듣지 못하는 소리를 홀로 고독하게 듣고, 견디는 중입니다. 그 소리 시도 때도 없어서 새벽녘 시인을 찾아오면 시인은 지상에 없는 세월을 홀로 건너기도 하는데요. 지상에 없는 세월, 시간, 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그 시간 어쩌면 무섭고 두려울 수도 있을 것인데, 천만에 시인은 지금 그 속에서 천상의 복을 누립니다. 때로는 빗소리 북채가 되어 난타 공연을 하기도 하고요.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귀북. 이명조차도 시인의 손끝에 닿으면 마이다스의 금처럼 시가 됩니다. 어쩌면 시인은 참으로 무서운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고통을 담보로 시를 쓰는 사람. 그는 고통의 정 중앙에서 자신과 정면으로 맞서는 정신의 무사일지도 모르는 일. 선생님의 시를 보면서 그는 누구일까, 자꾸 묻게 됩니다. 오늘도 혹시 이명에 시달리시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절창의 시가 또 한 편 찾아오는 중이겠지요.

 

  선생님의 시들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자기를 드러낼 때는 무척이나 솔직합니다. 꼬거나 휘는 일 없이 정곡을 향해서 화끈하게 전투를 벌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성정을 시 속에 고요히 담아 단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가고 싶은 곳으로 시의 화자를 끌고 갑니다. 그래서 때로는 공허합니다. 감추거나 숨김없이 하늘과 땅과 새와 꽃들을 노래하지요. 새와 꽃들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들 모두 인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겁니다. 우주의 시선으로 보면 이 세상 만물은 모두 인간의 정으로 귀결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물처럼 흘러가는 선생님의 시편들은 타인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시선에 집착하면 할수록 시인의 내부는 텅 비어간다는 것을 선생님은 생래적으로 알고 계셨던 겁니다. 누구는 선생님을 식물성 시인이라고 하고, 누구는 선생님을 은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을 현재진행형! 으로 불러봅니다. 언제나 현역! 그의 가슴속에는 늙지 않는 짐승이 살아서 선생님은 언제나 지금입니다. 사랑 또한 대상이 아니고 자신의 문제임을 알아서 선생님의 사랑 또한 고요합니다. 그 고요가 때로는 너무 맑고 깊어서 서늘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시로 귀결됨을 이번 시선집『시인이여 詩人이여』를 읽어가면서 통감합니다. 많은 시인들이 겪는 환이 멸하는 지점에서 오는 비애보다는 선생님의 시편들에서는 허를 실로 오판하지 않는 힘의 결정체입니다. 선생님과 악수를 나눈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힘이 센 시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멀리 풀어졌던 선생님의 눈빛을 다시 불러들일 시간입니다. 그 나라, 그 눈빛으로 세운 땅. 시의 세상을 우리는 홍해리라 부릅니다. 선생님, 내내 건강하시길요. 그리고 여기 절창의 시 한 편으로 선생님의 다음 시집을 기대합니다.

 

 

물이 절벽을 뛰어내리는 것은

목숨 있는 것들을 세우기 위해서다

 

폭포의 흰 치맛자락 속에는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가 있다

 

길바닥에 던져진 바랭이나 달개비도

비가 오면 꼿꼿이 몸을 세우듯

 

빈자리가 다 차면 주저 없이 흘러내릴 뿐

물이 무리하는 법은 없다

 

생명을 세우는 것은 단단한 뼈가 아니라

물이 만드는 부드러운 뼈다

 

내 몸에 물이 가득 차야

너에게 웃음을 주고 영원으로 가는 길을 뚫는다

 

막지 마라

물은 갈 길을 갈 뿐이다

             「물의 뼈」전문 - 시집『황금감옥』(2008)

        

인물사진 
손현숙 시인
           1959년 5월 16일 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2002년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상
시집 :『너를 훔친다』(2002),『손』(2011)
저서 :『시인 박물관』(2005),『나는 사랑입니다』(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