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녘에 서서
洪 海 里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 시선집『시인이여 詩人이여』(우리글, 2012.)
* 연암 선생은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눈과 귀만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병이 된다고 했다.
외물(外物)에 현혹되어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인간은 보고 싶은 걸 보고,
듣고 싶은 걸 듣는다는 이야기도 부정하긴 어렵다.
눈과 귀는 선입견과 오류의 온상인 데다 욕망이 들어오는 창구이기도 하니 시인의 말처럼 “눈멀고”,
“귀먹으면” 어떨까 싶다. 눈과 귀를 통해 마음이 움직이기도 하겠지만, 마음에 따라 눈과 귀를 보완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음공부는 절실한 일이지만 시인은 그 마음마저 버리라고 한다.
집착하는 마음, 소유하려는 마음, 내 뜻대로 하려는 마음에서 풀려나야 한다는 의미로 와 닿는다.
“텅 빈 들녘”은 시인이 지향하는 마음자리다. 다 버리고, 다 주어버리고, 눈과 귀가 방해되지 않는 자리,
그 자리에 있고 싶은 거다.
- 이동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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