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감상> 홍해리 시집『독종』/ 주경림(시인)

洪 海 里 2012. 12. 12. 08:21

 

홍해리 시집『독종』

- 치명적인 毒에 매료되어

 

 

눈 내리던 날, 선생님 시집을 받았습니다. 성탄절 선물 같았습니다.

『독종』이라는 시집 제목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곱고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독종이다”라고 하셨으니 홍해리 선생님께서 독종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도 독종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곱고 아름다워지도록 시를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내던져진 자리에서/ 젖은 몸으로/

바닥을 바닥바닥 긁다 보면/

드디어,/

바닥은 날개가 되어 하늘을 친다/

바닥이 곧 하늘이다.”(「우화(羽化)」라는 싯귀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수련睡蓮 그늘」,「길의 소네트」에서 독화살이 날아와 제 가슴에 뻐근하게 꽂혔습니다.

독이 온몸에 퍼져 詩心으로 물들도록 빼내지않을 것입니다.

「시의 길, 시인의 길」은 조곤조곤 옆에서 들려주시듯 정겹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자유문학』계간평(2011년 봄호)에 실었던 글 중에 「수련睡蓮 그늘」에 대한 감상을 발췌해서 덧붙입니다.

 

 

환하고 깊은 그늘

 

 

수련이 물 위에 드리우는 그늘이

천 길 물속 섬려한 하늘이라면

칠흑의 아픔까지 금세 환해지겠네

그늘이란 너를 기다리며 깊어지는

내 마음의 거문고 소리 아니겠느냐

그 속에 들어와 수련꽃 무릎베개 하고

푸르게 한잠 자고 싶지 않느냐

남실남실 잔물결에 나울거리는

천마天馬의 발자국들

수련잎에 눈물 하나 고여 있거든

그리움의 사리라 어림치거라

물속 암자에 피워올리는

푸른 독경의 수리 없는 해인海印

무릎 꿇고 엎드려 귀 기을인다 한들

저 하얀 꽃의 속내를 짐작이나 하겠느냐

시름시름 속울음 시리게 삭아

물에 잠긴 하늘이 마냥 깊구나

물잠자리 한 마리 물탑 쌓고 날아오르거든

네 마음 이랑이랑 빗장 지르고

천마 한 마리 가슴속에 품어두어라

수련이 드리운 그늘이 깊고 환하다.

      -홍해리, 「수련睡蓮 그늘」(《우리詩》)

 

 

홍해리 시인의 ‘수련睡蓮 그늘’을 읽으면 시인의 맑고 투명한 영혼이 그대로 전해진다.

1969년 시집 ‘투망도投網圖’로 등단 이후 현재까지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를 이끌어오며

북한산 자연과 더불어 살며 시로써 맑고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고자 한평생을 시에 헌신한 시인이다.

첫 행, ‘수련이 물 위에 드리우는 그늘이/ 천 길 물속 섬려한 하늘이라면’은 바로 詩心의 바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진흙 속에서도 물들지 않고 피어나는 연꽃의 청정함에 매료될 때 홍해리 시인의 시선은 수련이 드리우는 그늘로 향한다.

겉으로 드러난 표상이 아닌 드러나지 않은 내면 세계를 깊숙이 투시한다.

그리하여 그늘의 속성인 ‘어둠’을 걷어내고 천길 물속에서 ‘섬려한 하늘’을 건져낸다.

하늘은 관념적으로 최상과 최선, 절대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따라서 ‘칠흑의 아픔까지 금세 환’하게 만들어주는 치유의 손길이다.

시인은 어둠을 걷어낸 수련 그늘에 ‘그늘이란 너를 기다리며 깊어지는/ 내 마음의 거문고 소리’ 라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이제, 그늘은 시적 화자의 내밀한 공간으로 더욱 깊어져 독자들은 시인의 마음의 소리인 거문고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시인은 그 내밀한 공간에서 ‘푸르게 한잠 자고 싶지 않느냐’ 하면서 읽는 이를 詩 안쪽으로 바짝 끌어당긴다.

그리움의 대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세속의 욕망을 ‘천마天馬의 발자국들’이나 ‘그리움의 사리’ 등의 표현으로 맑고 깨끗하게 승화시킨다.

시가 이쯤에서 끝맺음을 했어도 독자에게는 아름다운 서정시 한 편으로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조용한 반전(反轉)으로 시의 전환부를 마련하여 감동을 배가시킨다.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무릎 꿇고 엎드려 귀 기울인다 한들’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시인은 ‘저 하얀 꽃의 속내를 짐작이나 하겠느냐’ 라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리운 이의 속내 일 수도, 꽃을 피우고 지게 하는 우주의 섭리 일 수도 있다.

환한 줄만 알았던 수련 그늘 속이 ‘시름시름 속울음 시리게 삭아’ 마냥 깊어진 것이다.

게다가 빗장을 지르고 천마를 품어 두라고 한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슬픔을 간직했기에 ‘수련이 드리운 그늘이 깊고 환하다’라는 시인의 말이 더욱 긴 여운을 남긴다.

 

- 주경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