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무 그늘
洪 海 里
그가 단상에 앉아 있을 때
마치 한 권의 두꺼운 책처럼 보였다 한다
한평생 시만 덖고 닦다 보니
육신 한 장 한 장이 책으로 엮였는지도 모른다
한마디 말씀마다 고졸한 영혼의 사리여서
듣는 이들 모두가 귀먹었다 한다
자신이 쓴 시를 스스로 풀어내자
강당 안은 문자향文字香으로 그득했거니와
몸이 뿜어내는 서권기書卷氣로 저녁까지 환했다 한다
평생을 시로 살았다면
말씀마다 꽃이 피고 새가 울어야 한다
그는 평생 모래바람 속을 묵묵히 걸어온 낙타였다
길고 허연 눈썹 위에는 수평선이 걸려 있고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달빛처럼 흘렀다 한다
그가 생각에 잠겨 잠시 눈을 감자
먼지 한 알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 울 듯 요란했다
다시 입을 열어 말을 마쳤을 때
방안에는 오색영롱한 구름이 청중 사이로 번졌다고 한다
그의 시는 오래된 참나무 그늘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지친 걸음을 쉬고 있었다
주변에는 꽃이 피어나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한다.
- 『독종』, 북인, 2012.
<감상>
“그”는 시인이다.
“그”는 “두꺼운 책”과 같은 존재다.
오랜 독서와 마음공부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시에서 문자향 서권기가 절로 일고, 말씀마다 꽃이 핀단다.
“그”에 대한 헌사로 읽히는 이 시는 동시에 시인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시”는 “참나무 그늘”과 같다고 했다.
참나무는 진짜 나무다.
가짜 나무가 따로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만큼 베푸는 게 많아서 ‘참’이라는 호칭을 붙였을 것이다.
나무와 열매로 숲을 넉넉하게 하고, 짐승과 사람의 허기를 달래고, 겨울나는 땔거리로 요긴했으니 참 고마운 나무다.
시를 통해 진경을 맛보게 하고, 어리석음을 깨치게 하고, 영혼을 위로하기도 하는 사람도 참 고마운, 참 시인이라 할 것이다.
소설 <큰바위 얼굴>에는 ‘큰바위 얼굴’을 동경하던 주인공이 마침내 스스로가 큰바위 얼굴이 되어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드리운 참나무 그늘에서 쉬어 갔던 시인도 머지않아 누군가에게 서권기 피어오르는 참나무 그늘로 인식될 것이다.
- 이 동 훈(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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