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소통의 詩 / 丁成秀(시인)

洪 海 里 2013. 4. 2. 17:43

<오늘의 한국시>

 

소통의 詩

 

   丁 成 秀(시인)

 

 

  요즈음 대한민국의 화두 중 하나가 '소통'이다. 청와대와 국민과의 소통, 정치권과 국민과의 소통, 젊은 세대와 노년 세대 간의 소통 둥

서로의 의견이나 의사가 막히지 않도 서로 잘 통하는 것을 뜻하는 '소통' 문제가 현재 한국사회의 시대적 화두로 떠오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 문단은 어떠한가. 문인과 독자와의 문학적 소통은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사회와 사회, 집단과 집단, 사람과 사람 사이처럼 문학작품도 어떤 의미에서든 일단 작자와 독자와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글이 좋은

글일 것이다.

  즉 좋은 글이란 그 글이 아무리 수준 높은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특별한 실험적 글이 아닌 이상 적어도 기본적 소양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어느 정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작품도 지은이와 읽는이와의

정신적 소통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문학의 한 장르인 문학평론의 경우에도 쓸데없이 특별한 전문용어를 과다하게 남발한다든지, 쓸데없이 별 대단치도 않은

외국 이론을 무슨 금과옥조처럼 상투적으로 반복해서 내세운다는지, 쓸데없이 문장을 이리저리 억지스럽고 난해하게 비비 꼰다든지,

쓸데없이 의도적으로 현학적 표현을 자주 늘어놓는다든지, 특별한 주제도 없이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숨어 있는 것처럼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괜히 횡설수설한다든지 하는 등으로 독자와의 소통을 일정 부분 방해하는 글들은 좋은 글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좋은 글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체적으로 어느 시대에나 그 표현이 투명하고 확실하고 명쾌하다.

  그러면 '시'는 어떠한가. 흔히 문학의 꽃이라고 부르는 '시'는 다른 문학 장르보다 특별히 '애매성'이 인정되는(?) 장르이긴 하다.

  그것은 물론 시가 지닌 축소(압축) 지향의 특성에 의한 상징이라든가, 은유를 비롯한 각종 비유, 심상(이미지) 등의 여러 가지 다양한

시적 장치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가 그러한 시적 장치나 다의성 때문에 꼭 애매하거나 어렵거나 난해해야만 된다는 법은 없다. 이 세상엔

쉬우면서도 좋은 시가 얼마든지 많이 존재하기 대문이다.

  필자는 시 월평이나 계간평, 또는 일반 문학평론, 시집 해설 등을 4반세기 정도 써 오다 보니 평소에 여러 시인의 작품을 비교적

많이 읽는 편이다.

  그러다가 문득 '좋은 시'를 만날 경우, 한 사람의 독자로서 대단히 유쾌하고 즐겁다. 사적인 친소 관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시들은 표현 미숙, 또는 불필요한 제스처 때문에 소통에 문제가 있거나 시로서의 문학적 가치를 스스로 상실해

버려 한 사람의 독자로서 우울하다.

  심할 경우 나도 모르게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시를 읽는 특별한 즐거움과 행복감과 유쾌함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난해하든 평이하든간에 시는 시로서의 품격과 문학성을 지니는 것은 물로 일단 독자와의 기본적 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을 향해 시를 발표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굳이 자기 이름을 내걸고 문단에 등장할 이유도 없다. 자신의

시를 써서 혼자 읽고 혼자 감동하고 혼자 간직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독자와의 '소통'이 잘 되는 몇 편의 시를 살펴보자,

  우선 홍해리 시인의 시를 들여다보자.

 

이번 시집 제목이 무엇입니까"

'『비밀』입니다.

 

시집 제목이 무엇이냐구요?

'비밀'이라구요.

 

제목이 뭐냐구?

'비밀'이라구.

 

젠장맞을, 제목이 뭐냐니까?

나 원 참, '비밀'이라니까.

 

                  - 홍해리「불통」전문

 

  이 시는 두 사람이 시집에 대해 말을 주고 받는 대화체 형식을 취하고 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제목이 시사하고 있는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철저한 '불통'이다.

  한 사람은 시집 제목에 대해 질문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동어반복,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대답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대답하는 사람은 초지일관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묻는 사람은 초지일관(?) 그 진실을 '오해'하고 있다. 그 결과 두 사람의

답답한 대화는 점층법 식으로 점점 거칠어진다. 마지막엔 '젠장맞을, 제목이 뭐냐니까?'/ 나 원 참, '비밀'이라니까.'라고

서로의 불통에 대해 함께 화를 내기에 이른다.

  왜 그럴까…?

  '진실'을 말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 한마디로 불신시대, 소통 불능, 즉 '불통'의 시대…!

상대방에게 진실을 고백해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나…? 진실을 감추고 거짓말을 해야 소통이 되는 것인가?

  이것은 시나 소설 같은 '창조'의 세계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처해 있는 실제 '현실'의 세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시는

현대사회의 쓸쓸한 자화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편의 시로서는 독자와의 소통이 너무나 잘 되는 시원하고 화통한

시가 아닐 수 없다.

 

           --- 이하 생략 ---

 

- 계간《한국시학》2013. 봄호 (제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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