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고 버리다
- 치매행致梅行 · 160
洪 海 里
훨씬 더 오래 산 나보다 먼저
아내는
한 사람의 일생을 다 내려놓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는데
나는 아내가 내려놓은 것까지
몽땅 짊어지고 낑낑거리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바라보기만 해도 울렁거리던 가슴
물 건너간 지 오래
이제는 절벽처럼 먹먹하고 막막해
오늘은 마음속에 어떤 밥그릇을 안고
살아야 하나
스산한 봄날이 가고 세상은 푸르른데
민들레 꽃씨 하나 어딘가로 떠 가고 있다.
* 다 비우고 버렸어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사이가 부부다. 내
려놓은 것 무심코 보다가도 문득,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앉는 이가 부부다.
나는 “다 내려놓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상황을 경험하지는 않았으나, 그 모습도 가슴에 새로 살림을 차리는 일로 여긴다.
망각의 지점에 오가는 아내 곁에 머물지 못한다면 남은 날이 더 슬퍼질 것이다.
서로 흔적을 버릇처럼 챙기니 부부다.
이제 “바라보기만 해도 울렁거리던 가슴”의 기억이 멀지만,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구역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부부다.
봄날은 가고 우리 생은 점점 가벼워진다. 절벽 앞에 서서 이별을 예감하는 날이 오면 나는 무슨 말을 할까.
마침 날아가는 꽃씨라도 눈에 들면 어찌할까. 잊는 것은, 또 다른 꽃으로 피는 일이라고 적을 수 있을까.
- 금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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