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문感想-門」
「말문을 닫다 -치매행致梅行 ? 3」의 '존엄한 자율성'에 대하여
정 병 성(시인)
말[言]의 문은 입[口]인데
말문을 닫으면 한 '一'자의 들판이 된다
말 떼가 푸른 들판에 뛰어놀아야
햇빛 더욱 맑고 하늘이 푸른 법
소나기 시원스레 쏟아지고 나면
무지개도 천상과 지상을 맺어 찬란히 선다
말문이 막히면 웃음이 살아나는지
어떤 물음에도 답은 하나, 웃음이다
웃음이 만국의 언어라지만
우선은 너와 나 두 나라의 말이 필요할 때
자유로이 뛰놀아야 할 말 떼
사방 벽인 입 '口'자 감방에 갇혀 있다
갇혀 있음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
마장의 숙련된 조련사가 못 되는 나는
무능하고 악랄한 간수일 따름
말이 죽어가는 것은 그냥 바라다보며
한 편의 시를 엮는 죽일 놈의 시인(?)
아내여, 미안하다
어찌 내가 당신의 말문을 닫아걸었는가
언제 다시 혀가 돌까
오늘도 병원에 갔다
약 보따리를 메고 돌아오는데
영혼이 빈 집 한 채 내 옆에 걷고 있다.
- 홍해리,「말문을 닫다 - 치매행致梅行?3」 전문
홍해리 시인의 시집『치매행致梅行』은 말문을 닫고 시작한다. 어느 누가 스스로 제 말문을 걸어 잠그겠는가? 인간의 닫힌 말문[言口]에 대하여 마음대로 조련할 수 없는 말[言]의 의문疑問과 동시에 아내의 닫힌 입[口]에 대하여 미안함을 표현한 일기日記, 이것이 홍해리 시인이 목격한 치매다. 기억력 회복memory aids은 인지능력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멈춤이나 떨림을 받아든 시집은 넘기기 어렵다. 말문을 여닫는 것은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서 결국 눈물로 넘긴다.
홍해리 시집『치매행致梅行』 은 첫 번째 시「다 저녁때」, 두 번째 작품「입춘 추위」를 지나 세 번째 글 「말문을 닫다」의 순으로 문文을 연다. 그러나 혹여 말문을 걸어 잠그지 않는 이들은 치매를 이해할 수 없다. 말문[言口]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너와 나 두 가슴으로 열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에게는 홀로 감방에 갇혀버린 말문[言口]이 의문스러우면서도 고통 없는 세계로의 약속을 소망한다. 시집『치매행致梅行』의 시인의 말에서 “치매癡?는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 매화에 이르는 길이다. 무념무상의 세계,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아이가 되는 병이 치매다”라고 치매의 정의를 내린다. 그리고 “이 글은 아내에 대한 관찰 기록이요, 나 자신의 반성과 그 고백이라서 잘 쓰려고 기교를 부리지 않았으니…. ”라고 말한다. 이렇듯 치매의 정의는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다. 홍해리 시인이 치매를 바라본 각 시편은 의식이 무의식에 혹은 무의식이 의식에 뜨겁도록 질문하는 <인간 존엄성>에 근거한다. 따라서 치매를 겪는 아내에 대한 보살핌은 실존에 대한 '존중'과 살아 있음에 대한 '마지막 예배'일 것이라는 의식이 당연하다. 무념무상의 세계, 치매를 매화에 이르는 길이라 말할 수 있는 고백은 얼마나 조용하면서 침전되지 않는 삶의 극치인가!
「치매행致梅行」의 서 번째 작품「말문을 닫다」는 생멸하는 근원적根源的 경계에서 말문이 닫히기 시작하는 육체와 영혼의 대화로 시작하고 있다.
"말[言]의 문은 입[口]인데/ 말문을 닫으면 한 '一'자의 들판이 된다/ 말 떼가 푸른 들판에 뛰어놀아야/ 햇빛 더욱 맑고 하늘이 푸른 법", 홍해리 시인은 말이 없는 아내의 말문 앞에 독백하듯 조용히 말을 건넨다. 말문이 닫힌 세상은 '들판'이며, 그곳은 '환경'이라는 인본주의 범주를 탈피하여 긴요한 햇빛 즉 '생명'을 자각自覺하는 세상임을 전한다. 시인은 치매를 절대적 비극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홍해리 시인은 시집 서두에 치매로 신음하고 있는 환자들과 환자를 돌보고 있는 분들에게 행복과 평화를 기원하였다. 이처럼 말문이 막혀버린 말 못하는 사유는 지각知覺의 갱신을 통해 자아를 재발견하고 어떤 불문율이라도 감각의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해주는 의미일 것이다.
"소나기 시원스레 쏟아지고 나면/ 무지개도 천상과 지상을 맺어 찬란히 선다"
과연 아픔조차 모르는 아내의 들판에 무지개는 어떤 모양일까? 여기서 '소나기'가 자아내는 것은 순진하고 무구한 아내의 몫이다. 화자에게 스치고 지나간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라 짐작된다. 차라리, 잠깐, 시원스레, 잊고 싶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폐기해버린, 등등 그런 후에야 말문이 완전히 닫혀버린 고통스러운 내적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실타래를 풀듯 말문을 잇는다. 애이불비哀而不悲하고 찬란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그야말로 감각의 세계에 천상과 지상을 이어 화해를 끌어낸다. 홍해리 시인이 목격하고 경험한 치매癡?가 치매致梅로 성립할 수 있음은 매화 숲을 지나 말[言]떼가 사는 들판이 있기 때문이리라. 무념무상의 세계, 부단한 자기 검색은 말문이 닫힌 '一' 하나의 <녹색평원>을 발견하게 되고, 바로 이곳은 지각의 전회轉回를 통한 <감각의 갱신>, 곧 매화에 이르는 길, 치매행致梅行이라 믿는다. 참으로 신비한 일 아닌가? 그러나 시인은 한편으로 치매를 무섭도록 증오한다. 아내의 치매는 같이하고자 했던 여생을 단기기억부터 장기기억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빼앗아 갔다. 그러기에 시인의 마음은 단지 안타까움에 머물지 않는다. 치매의 원인을 개인의 미시적 시각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가 밝혀내야 할 부탁의 규범으로 느끼길 바라며 서서히 밀어닥칠 죽음을 인지하고 있다.
"말문이 막히면 웃음이 살아나는지/ 어떤 물음에도 답은 하나, 웃음이다/ 웃음이 만국의 언어라지만 우선은 너와 나 두 나라의 말이 필요할 때/ 자유로이 뛰놀아야 할 말 떼// 사방 벽인 입 '口'자 감방에 갇혀 있다/ 갇혀 있음은 서서히 죽는 것// 마장의 숙련된 조련사가 못 되는 나는/ 무능하고 악랄한 간수일 따름/ 말이 죽어가는 것은 그냥 바라보다보며/ 한 편의 시를 엮는 죽일 놈의 시인(?)"
아내의 웃음 뒤편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너와 나'의 말이 자유로이 뛰어놀아야 할 들판에서 시인은 죽음을 본다. 저무는 기슭에 햇살을 머금고 냇물은 말없이 흐른다. 입[口]의 감방에서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아내와 이를 지켜본 시인의 마음은 애처롭기만 하다. 말[言]떼들이 달아난 세상은 웃음이다. 그래서인지『치매행致梅行』시편 어디에도 삶과 인간본질에 대한 고정된 시간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詩眼)는, 자연 세계의 '죽음'과 '소멸'을 뛰어넘어야 가능하다. 위 시편이야말로 사라지는 기억을 통한 안타까운 자신의 고백과 숨가쁜 입김으로 뿜어낸 경전이다. 치매의 웃음은 소리가 나질 않는다. 대학원에서 노년학을 전공한 필자는 감상문을 적기에 두렵다. 감상感想이라 일컫는 말은 맞지 않는다. 누구든지 맑고 투명한 흡반을 내밀어 서사의 시작과 끝을 그대로 빨아들여야 한다. 20세기 최고의 정신의학자이자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 Kubler-Ross, 1968-2004)는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심리적 변화과정을 분석하였다. 그는 인간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부정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의 순으로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말한다. 지금 아내의 모습을 낱낱이 지켜보며 현실 세계에 대한 분노와 타협 그리고 수용을 지나 암묵적 죽음과 맞닥뜨린 환류還流의 단계를 은유하고 있다.「말문을 닫다」의 행간에서 아내의 웃음이 그러하다. 치매癡?를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무구한 치매致梅라 부르며 치매 환자는 물론 이를 돌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웃음' 안쪽에 있는 그 민감한 의식을 깨우고 싶은 것이다. 치매의 웃음은 모순이 건네는 형상 언어일까?. '너와 나' 말 떼들이 뛰놀지 못하고 감방에 갇혀 서서히 죽는 것, 점점 말들은 사라지고, 그러다가 말 떼들이 사라져 가는 죽음을 바라보며 수용하는 것, 시인은 말[言]이 사라진 날들에 대하여 자신에게 묻고 있다. 사라진 기억을 존중해 주길 바라고 있다. 상실된 삶을 아껴주길 바라고 있다.
나를 존중하고 사랑해주고 아껴주지 않는 사람에게
내 시간 내 마음 다 쏟고 상처받으면서
다시 오지 않을 꽃 같은 시간을 힘들게 보낼 필요는 없다.
비바람 불어 흙탕물을 뒤집어썼다고 꽃이 아니더냐.
다음에 내릴 비가 씻어준다.
- (생략) -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너무 일찍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가장 불행한 것은 너무 늦게 사랑을 깨우치는 것이다.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 Kubler-Ross),「상실수업」 중에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바쳐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선정한 정신과 의사, 퀴블러 로스(E. Kubler-Ross)는 어느 때든지 평범한 삶에서 죽음으로 내몰려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살고(live), 사랑하고(love), 웃어라(laugh), 그리고 배워라!(learn!) 고 조언한다. 홍해리 시인은 「말문을 닫다」에서 사랑하는 아내가 겪는 치매의 고통을 타자와 교감하고 상생하고자하는 심리적 움직임을 시적 언어로 표현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철저히 미안해 하고 있다.『치매행致梅行』시집은 아내의 것이라 할 만큼 시의 행간들마저 미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와 살고, 아내와 사랑하고, 아내와 함께 웃고, 아내에게 배우고 있는, 그럼에도 아내가 겪는 치매癡?의 고통을 시인은 무엇으로 노래하겠는가? 과연 말문이 닫혀 버린 시편들은 누가, 누구에게 기록한 것이며, 아내는 시인 남편에게 자신의 못 다한 이야기를 무엇으로 전달하겠는가?
"아내여, 미안하다/ 어찌 내가 당신의 말문을 닫아 걸었는가/ 아내여, 미안하다/ 어찌 내가 당신의 말문을 닫아 걸었는가/ 언제 다시 혀가 돌까"
심리학자 에릭슨(Erikson, 1959)의 발달이론에 근거하면 노년기의 심리사회적 위기는 <자아통합>과 <절망>이다. 그러나 죽음을 준비하는 노인 모두가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자아통합을 이루어내기란 쉽지 않다. 에릭슨(Erikson) 이론에 노년기의 자아통합은 발달단계에 있어서 인생 전반에 걸쳐 반드시 이전단계를 거쳐야 한다. '좋은 죽음(Well-dying)'은 인생 전반에 '잘 나이 들기(Well-aging)'와 직접적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인기(24세~65세)를 성공적으로 거쳤다할지라도 위계질서에 따른 노인성 치매와의 상관관계는 정확하지 않다. 즉 좁은 의미에서의 관점은 의미가 없다. 「말문을 닫다」의 시를 열어보면 홍해리 시인은 '좌절'의 순간으로부터 마지막 '자아통합'의 손끝을 내밀고 있다. 아내에게 절실히 미안해하고 치매의 단서를 아내에 대한 투병 일기日記로 반문하고 있는 것, 이는 홍해리 시인 자신이 쓰라린 의식과 고통을 감내하며 현실 세계에 충실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 끝없는 울림을 "아내여 미안하다"라고 적는다. 그저 무능한 현실 앞에서 미안해 하며 말문을 건네고 싶은 것이다. 평범했던 아내에게 절망을 안겨준 것 같은 심리적 압박감이란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아내를 향하여 현재의 삶에 필사적으로 미안해하며 오히려 아내의 사라진 말문 속으로 들어가 '너와 나'의 합일을 향해 관계하고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존엄한 자율성greatest autonomy을 실천하고 아내의 권리를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언제 다시 혀가 돌까/ 오늘도 병원에 갔다/ 약 보따리를 메고 돌아오는데/ 영혼이 빈 집 한 채 내 옆에 걷고 있다." 간절한 저 마지막 시구詩句가 영혼이 영혼에 속삭이는 언어로 들린다. 사람이 하늘에 울지 않으면 삶이 아니리라, 치매癡?란 어느 사람이든지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닫힌 말문이 소리 없이 대화하는 상호적인 것, 따라서 홍해리 시인은 침묵하는 치매의 닫혀버린 말문[言口]에 대하여 신음하며 치매致梅라 적는다.
* 정병성 : 2015년 월간《우리詩》로 등단.
- 월간《우리詩》2016.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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