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치매행致梅行』(2015)

<跋文> 필화筆花 한 송이 / 임채우(시인)

洪 海 里 2015. 2. 26. 16:18

<跋文>

 

          필화筆花 한 송이

 

                                                임 채 우(시인)

 

 

 

   얼어붙은 얼음장 밑으로 계절이 움츠리며 지나가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칼바람 앞에서 생존의 절박함으로 안으로 안으로 오그리며 연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밤도 차가운 바람이 산정을 내달아 온 도시를 꽁꽁 얼릴 것입니다. 이 도시의 산자락 서쪽에서 능선 너머 동쪽 끝자락으로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은 그곳에 시인님과 사모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난 가운데도 꽃은 피어난다고 새해 들어 반가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지난 1월 10일 3남매의 막내인 따님이 혼례를 올렸습니다. 우환 중에 치르는 혼사에 가족 친지는 물론이고 평소 시인님을 존경하고 흠모하는 많은 지인들이 자기 일처럼 모여 기꺼이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신부가 너무도 화사하게 피었고 신랑이 듬직하여 한 쌍의 잘 어울리는 원앙이었습니다. 모처럼 고운 한복 차림의 사모님도 다소곳이 행복해 보였고 시인님의 한복 두루마기도 넉넉하니 품위가 있어 보였습니다. 두 아들에 며느리 손자 손녀 신랑 신부 소녀 같으신 사모님, 그리고 모처럼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신 시인님,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그 고우신 사모님께서 치매라는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사모님께서는 불과 사오 년 전만해도 서울시내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집에서는 세 아이와 여간 까다롭지 않은 시인님의 뒷바라지를 묵묵히 수행하시던 현모양처였습니다. 며느리도 봤겠다 손자 손녀도 다 컸겠다 이제 퇴직하여 그간 시인님께서 못 다한 사랑 넘치게 받으시며 두 분이 여유롭게 여행도 하고 외식도 하며 알콩달콩 행복하게 사실 일만 남았는데 사모님께서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건망증이려니 했겠지요. 그때는 치매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고, 그런 질병은 노망이라고 해서 노인네들에게나 발병하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증세가 날로 심각해지며 기억력이 현저하게 감퇴되고 실어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 시인님께서 “집사람이 명사를 기억하지 못해.”라고 말씀하시어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껏 시인님께서 지인들에게 사모님의 발병에 대해 한마디 언급이 없었거든요. 말씀을 들어 보니 그간 시인님께서는 사모님의 날로 심해지는 증세를 두고 고민하시다가 병원에 가서 진찰도 받고 약도 먹이면서 남모르게 애를 태우신 듯합니다. 가족회의도 가졌겠지요.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두 아들은 분가해서 살고 있고, 과년한 딸 역시 어머니에게만 매달릴 수 없는 처지여서,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부자지간이라 하더라도 짐이 되는 것을 못 참는 시인님의 외곬 성향에 비추어볼 때 너희 어머니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가족들에게 독하게 선언했을 것입니다. 짐작컨대 요령 없는 시인님께서 사모님을 데리고 이 병원 저 병원 전전하시다 천근같은 다리를 이끌고 집에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소태 같은 가슴을 치며 홀로 독작으로 답답함을 삭히셨겠지요. 또 그러시길 몇 날 며칠 얼마나 암담한 시간이었을까요. 부랴부랴 지역 공무원인 시인 한 분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문의하여 치매등급판정을 받기 위한 절차를 알아보고, 적당한 요양 시설을 소개하여 가족들이 짊어진 짐을 집 밖에서 함께 나누는 체제로 전환하여 낮에는 케어센터에서(시인님은 아내가 유치원에 간다고 표현했습니다.) 밤과 공휴일은 댁에서 돌보는 것으로 일단 숨통이 트이게 되었습니다.

   시인님께서는 그 와중에도 혈서를 쓰고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어 출구가 도무지 보이지 않은 깜깜한 나락에서 시인님은 몸으로 시를 쓰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누가 감히 이 시를 잘 썼다 못썼다 좋다 나쁘다 왈가왈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시편들은 이 둔한 자의 가슴을 후비고, 눈시울이 붉어지게 하고,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고, 때론 아픔을 통과하여 시인님이 도달한 평정심에 숙연해집니다. 제가 읽은 그 어떤 시보다도 진실되고 감동적이며 깊이가 있는 절창입니다. 실로 치매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의 입장에서 수많은 희비로 엮으신 이 시편은 우리의 시문학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시인님께서는『치매행致梅行』을 월간《우리詩》에 연재하면서〈시인의 말〉에 “치매는 치매癡呆가 아니라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 매화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선언宣言 아닌 선언善言을 하고 있습니다. 치매癡呆와 치매致梅는 소리 은유로 치매致梅는 시인님께서 만드신 말입니다. 매화에 이르는 길, 즉 무념무상의 세계,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아이가 되는 병이 치매이기 때문에 치매致梅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님, 치매癡呆는 현실이고 치매致梅는 당신께서 애써 희구하여 마지않는 구경究竟이나 초월의 세계입니다. 그러기에 『치매행致梅行은 치매癡呆에서 치매致梅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벽에 갇혀 답답하고 울부짖고 처연해 하다가 그 너머 환한 빛을 염원하며 숭고한 사랑과 인생의 깊은 통찰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치매행致梅行』의 행이란 중국 한 대의 악부시樂府詩에서 나온 시체의 일종으로 대개 제목 뒤에 붙여집니다. 행이라 하면 대체로 자기의 감정이나 사물을 거침없이 가볍게 노래할 때 붙이는 것입니다. 시체가 글씨의 유려한 행서行書와 같다는 뜻이지요. 시인님께서 왜 이 시편의 제목에 구태의연한 행 자를 붙이셨는지 알 만합니다. 평생 시업에 매달려 개인 시집을 스무 권 남짓 상재하신 시인님께서 사모님을 향한 가장 간절한 꾸밈없는 마음을 모름지기 시론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연스런 내적 흐름을 좇아 막힘없이 노래한 것이 아닌지요. 시인님의 몸을 통과한 노래들이 사자후처럼 뜨겁고,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절박하고, 식은 재처럼 차분하고 개운하며, 때로는 해맑기 그지없으니 후배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경지에 그저 아득할 따름입니다.

   시인님께서는 또한 “이 시「치매행致梅行」을 치매환자를 돌보고 있는 분들에게 바치고자 한다.”고 하십니다. 시인님께서는 시집이 발간되기도 전에 전국의 치매환자 요양시설의 주소를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시집이 발간되면 전국 요양시설에 나누어드려 수고하고 짐 진 자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고자 하신다니 그 깊은 뜻을 어찌 저 같은 장삼이사들이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픔이란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정념덩어리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혹독하고 매섭고 아린지 가슴을 예리하게 후벼 팝니다. 그러나 잉크나 먹물 한 방울을 호수나 강물 위에 떨어뜨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아픔은 그렇게 상쇄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기만을 고집하며 사신 분들은 아픔마저 움켜쥐고 펼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이중고에 갇히게 됩니다. 우리는 다 유한한 인간들입니다. 유한한 인간이기에 생로병사가 흠이 아니라 아름다울 수 있겠지요. 생로병사에서 오는 아픔을 서로 나누고 이해하고 위로할 때 인간은 가장 인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시인님께서 당신의 아픔을 나누시겠다는 그 따뜻한 인간적 체취의 진한 향내가 누리에 퍼지길 고대합니다.

   시인님을 보면 헤밍웨이의『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산티아고 노인이 생각납니다. 저 84일이 되도록 허탕을 친 노인 말입니다. 수염이 덥수룩한 게 아마 외모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노인이 드디어 85일 만에 큰 고기를 잡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큰 물고기는 상어를 만나 다 뜯어 먹힙니다. 노인은 자기가 잡은 고기를 지키기 위해 상어와 사투를 벌입니다. 이틀간의 사투 끝에 결국 승리하나 뼈만 앙상하게 남은 고기를 달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소유의 관점에서 본다면 노인의 삶은 실패작이지요. 85일만의 앙상한 뼈다귀라니요. 손에 쥘 것도 없는 도도한 허무주의입니다. 그러나 노인은 그날 밤도 사자 꿈을 꾸면서 다음날 역시 바다로 나갈 것입니다. 노인은 상어들에게 자신의 고기를 다 빼앗겼지만 적어도 지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노인은 기력이 다하지 않는 한 바다로 나가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시인님, 감히 여쭙겠는데 그 노인의 낚시질이 바로 시를 쓰는 행위와 같지 않을까요? 이 도도한 허무 속에 무엇인가 내 몸에 새기듯 습관처럼 그것에 대항하여 일구는 작업이 바로 시 쓰는 일이 아닐까요? 그 무엇으로 이 옥죄이는 절망감이나 왔다 가는 덧없음, 순간의 사라짐을 떨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산티아고 노인처럼 자신이 잡은 고기를 상어라는 절망에 왕창 물어 뜯길망정 “사람은 박살이 나서 죽을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는 당하지 않아”라는 당찬 사자후를 토하는 노인 두 분이 겹쳐 보입니다.

   시 「말문을 닫다」에서 보면 두 분이 사시는데 사모님께서 점점 말수가 줄어들더니 그저 웃기만 한다고 하십니다. 사모님을 간병하시는 시인님께서는 아내의 증세에 날로 불안하며 갑갑하겠지요. 아마 그런 사모님을 보며 언어의 조련사인 시인님께서는 “마장의 숙련된 조련사가 못 되는 나는/ 무능하고 악랄한 간수일 따름/ 말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바라보며/ 한 편의 시를 엮는 죽일 놈의 시인(?)”이라고 자신을 학대하십니다. 말〔馬, 言〕은 소리 은유로 여기서는 중의적인 표현입니다. 말이 죽어간다는 것은 마장의 조련사라는 의미에서 자신이 돌보는 아내가 서서히 죽어간다는 뜻도 되고 또한 아내가 점점 말이 없어진다는 뜻이겠지요. 두 분이 함께 기거하는 집에서 한 분이 말문을 닫으면 또 한 분도 저절로 말문이 닫힐 수밖에 도리가 없지요. 그런데 시인은 타고난 말을 부리는 조련사인데 말문이 닫히면 살아도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시인님께서는 아내를 향한 지극한 사랑과 속죄하는 마음을 담아 “마지막 선물”을 마련합니다. 어찌 보면 평생 가족이란 허울에 희생만하다 몸과 마음이 병들어 말문을 닫고 있는 아내에게 바치는, 최초이자 마지막 진정한 사랑 고백의 소리 없는 노래, 바로 “필화筆花 한 송이”입니다.

   까마득한 후배가 시인님의 큰 뜻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괜히 시인님의 노고의 뒤를 어지럽혔습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시인님께서 각별한 시집을 출간하시는데 발문을 써주실 격에 맞는 어르신들이 즐비한 우리 시단에 굳이 일천하기 짝이 없는 저에게 이 소중한 지면을 고집하시는 이유를 여태껏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의 내세울 것도 없는 인생의 부끄러운 이력이 하나 있다면 사랑하는 아내를 십수 년 투병생활 끝에 먼저 천국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벌써 햇수로 육 년 전의 일입니다. 처처에 아픔이 강물처럼 흐른다는 말을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시인님이 희구하는 꽃비 내리는 봄은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매서운 추위라 하더라도 자연의 순리 앞에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겨울이 오면 봄도 머지않다는 말이 결코 허사가 아닙니다. 간절한 마음이 모여 산을 이룰지니, 그 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아기가 엄마 품에 파고들 듯이

아내가 옆으로 들어와 팔베개를 합니다

그냥 가만히 안고 있으면

따뜻한 슬픔의 어깨가 들썩이다 고요해집니다

깊은 한숨 소리 길게 뱉어내고

아내는 금방 곯아떨어지고 맙니다

마른 빨래처럼 구겨진 채 잠이 듭니다

꽃구름 곱게 피어날 일도 없고

무지개 뜰 일도 없습니다

나도 금세 잠 속으로 잠수하고 맙니다

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 보다

가벼워도 무거운 아내의 무게에

슬그머니 저린 팔을 빼내 베개를 고쳐 벱니다.

                         -「행복 -치매행致梅行·65」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