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치매행致梅行』(2015)

[스크랩] <서평> 치매, 황홀한 유리감옥! -- 홍해리 시집『치매행致梅行』/ 손현숙(시인)

洪 海 里 2016. 6. 18. 14:45

<시집 서평>

 

치매, 황홀한 유리감옥!

- 홍해리 시집『치매행致梅行

 

    손 현 숙(시인)

 

 

  선생님, 뜨거웠던 여름도 가고 이제는 아침과 저녁에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해 질 녘, 뒷산을 산책할 때는 성마른 삭정이의 매캐한 냄새가 폐부를 관통하기도 하네요. 그림자도 한결 짧아진 것이 복숭아뼈 근처까지 밀물져 왔다가는 하염없이 뒤로 밀리곤 합니다. 선생님, 저는 벌써 며칠째 ‘치매행’ 원고를 앞에 놓고 혼자 부질없는 마음의 여행을 청하곤 합니다. 어딘가로 떠나가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처럼, 아마도 그 속내는 “얘 어디 갔어?”라는 사모님의 질문 앞에 명쾌한 답을 찾아 드리고 싶어서였을 겁니다. 범속한 저의 생각으로는 사모님도 잠시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신 거라 단정 짓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원고의 매수가 더해지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은 스핑크스의 이상한 수수께끼 앞에 결국은 넘어져 버릴 것 같은 슬픈 예감.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하늘의 시간표 앞에 인간의 운명을 고백해야 하는 연약한 순간 같은 것이겠지요. 선생님, 저는『치매행致梅行』의 시편들 덕분에 인간은 누구나 그저, 아케이드 같은 유리감옥을 통과하면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여러 가지의 풍경을 구경하는 구경꾼임을 알았습니다. 유리감옥에서는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도 마지막에는 모두 하나의 문을 통과해야 하는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이지요. 때로는 유리창으로 멀리 있는 새끼들이 왔다 가기도 하고, 사랑이 오고, 절망이 오고, 우리가 그렇게 끔찍하게 믿고 있는 詩가 오기도 하고, 그러나 그럴 때마다 건물의 골조는 수순처럼 낡아지고, 막다른 길은 선하게 눈에 밟히게 마련이겠지요. 그 어디쯤에서 사모님은 잠시 쉬어가는 중이라 믿어 봅니다. 우리 눈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스핑크스의 질문을 들고 골똘하게 궁리 중이신 거지요. 절해고도에 갇힌 그 질문은 유리감옥 이쪽의 언어로는 도저히 해답이 불가능해서요. 그래서 침묵, 사모님은 지금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속으로 입적하신 겁니다. 혼돈의 상징인 스핑크스는 이집트 신화 속에서는 사원의 입구를 지키는 선한 존재로 표상되곤 합니다. 얼굴은 분명 사람이지만, 몸통은 맹수인 사자를 닮았고 겨드랑이엔 맹금의 날개를 붙인 채, 뱀의 꼬리를 달고 있는 기묘하고도 복잡한 형상의 복합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복합 동물인 스핑크스는 인간에게 두 가지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 유명한 수수께끼는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점심에는 두 발로 걷다가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짐승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두 자매가 있다. 언니가 동생을 낳고 다음에 동생이 언니를 낳는다. 이 자매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모두 시간에 관한 질문이었는데요, 또한 소멸에 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스핑크스의 질문 앞에 골똘하게 답을 찾아 스스로가 액막이가 되어 버린 사모님의 침묵 속에는 우리 모두의 모습들이 조금씩 투영되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역사는 결국 기억을 조금씩 지워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해답. 그래서 사모님은 지금 용감하게 본능을 수행하시는 겁니다. 군더더기 모두 떼어 버린 우리들의 발가벗은 영웅. 선생님도, 저도, 이천 년 전의 그 사내도, 그리고 당신도, 우리는 모두 시간의 유리감옥 속에 갇힌 불가능의 상징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 날것의 심장으로 길어 올린 선생님과 사모님의 지난한 연애를 차근히 짚어 보려 합니다.

 

 

곱게 나이 들던 아내가 이상합니다

하찮은 일 중요한 일에 연연 마라는 듯

큰 것 작은 것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적은 것 많은 것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다 버린 듯, 다 잊은 듯, 담담합니다

세상을 초탈한 듯 덤덤합니다

세월도 비껴가지 못하는 무심한 언덕에서

남에게 보이기 위해 살지 마라는 듯

창밖을 내다봅니다

걸어가는 이들

뛰어가는 사람들

병원 창문으로 보면 위대해 보입니다

아파야 사는 일도 맛이 더 합니다

오늘은 사랑의 편지를 보내도 받지 않는

아내의 이메일 주소를 지워버렸습니다

 

아, 내가 이상하다.

     -「아내가 이상하다 - 치매행致梅行 18」

 

 

  이상할 정도로 담담해진 아내를 두고 시인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아내는 욕망도 미련도 상처도 없어 보이는 듯.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사람처럼, 아내는 너무나 담담하여 오히려 시인을 겁나게 하네요. 세상은 어쩌면 “아파야 사는 일도 맛이 더” 한 법인데. 시인의 아내는 언제부터 “세상을 초탈한 듯 덤덤”하기만 합니다. 이게 웬일일까요. 사실 여기, 즉 이 무렵부터 시인의 아내는 이상한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던 겁니다. 아니다, 벌써 그 전부터 어쩌면 아이스크림이랑 빵이랑 냉동실에 켜켜로 쌓아놓고 살이 몽실몽실 찌도록 먹어치울 때부터 증상은 이미 시작된 것이지요. 그러나 나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하듯,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바람처럼 별 탈 없이 지나갈 것이라는 바람은 잔인하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빚쟁이가 처 놓은 간교한 덫에 덜컥 걸려 넘어지듯, 시인의 아내는 “다 버린 듯, 다 잊은 듯” 소신공양하듯 무심함의 땅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습니다. 순식간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훌쩍 넘어가 버렸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아내가 이상하다」는 치매행 18번이니 비교적 초기에 쓴 시인의 기록이지만, 아내는 이미 병이 깊습니다. 이제 아내의 메일함 속에는 오는 편지도, 가는 편지도 없네요. 시인은 아내의 증상을 눈치 채고는 곧 외부와의 적극적인 소통인 메일함의 주소를 삭제합니다. 이제 시인의 아내는 오직 제 속으로만 오고 가는 길을 닦을 뿐입니다. 슬프지만, 죽음이 홀로인 것처럼 그 길 위에는 아내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설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아, 시인은 “아, 내가 이상하다”라고 ‘아내’와 ‘아, 내’라는 여백 사이에서 아내와의 일평생을 서성거립니다.

 

 

새벽마다

물가에서

목을 씻고

나뭇가지에 앉아

아침을 열어 주던

새,

 

샘이 마르자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노래마저 끊기니

새가 앉았던 가지부터

선 채로 입적한

나무,

 

 

새 소리가 그리운 나무

땅거미 내리는 저녁.

     -「입적立寂 -치매행致梅行 29」

 

 

  처음에 시를 읽을 때는 새가 입적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읽기의 미천함을 드러내는 필자는 사람이 입적하여 새가 된 것이라, 오독을 했던 겁니다. 그러나 시를 깊이 뜯어 읽다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생은 일찍 주무시고 일찍 깨는 것으로 문단에서도 유명한 시인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일까요. 시인의 하루를 깨워주는 새벽 곁에는 늘 시인의 아내가 있으리라는 생각. 시인의 아내는 고집 센 남편이 남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할 때, 언제나 시인의 곁을 조용히 지켜낸 증인이었던 겁니다. 사람의 일평생이 홀로 깨고 홀로 잠드는 것이라, 많은 시인들은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일갈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늘에 별이 뜨면 땅에는 꽃이 피듯, 부부는 어쩌면 하나의 소망을 향해 하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운명공동체 같은 것이 아닐까요. “새벽마다 <중략> /나뭇가지에 앉아 /아침을 열어 주던 /새”, 그렇게 새는 아침마다 나뭇가지에 앉아 나무를 깨워주고 아침을 깨우면서 저도 샘가에서 목을 축였을 것입니다. 그런 새가 어느 날 홀연히 날아가 버렸습니다. 시인의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진 겁니다. 그것은 아마도 언어가 사라지고, 기억이 사라지고, 무엇보다 새가 새였던 존재의 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새가 사라지고 뜻밖에도 나무가 이상합니다. 새가 앉아서 지저귀던 나뭇가지는 새가 없어도 분명 나뭇가지로 존재해야 하는데, 시의 정황상 전혀 그렇지 못하네요. 그림자가 없으면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듯, 새가 날아간 자리는 텅 비어서 공이 되어 버렸습니다. 새소리가 사라진 나뭇가지는 그만 죽어서 즉 “선 채로 입적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날아오리라 믿었던 새의 지저귐에 대하여 시인은 “새 소리가 그리운 나무/ 땅거미 내리는 저녁”을 뒷모습처럼 걷는 겁니다.

 

 

오동이 천년을 서서 속을 비우니

줄이 없어도

바람이 와서 거문고를 뜯고 있습니다

 

 

금현琴絃이 울지 않는데도 귀가 향긋합니다

아내도 저 소리를 듣고 있을까요

아내도 귀가 향긋해 하고 있을까요

 

 

갈비뼈를 현금 삼아 한 곡조 뜯으면

봄바람 향기로 울릴까요

향기로운 꽃으로 들릴까요

 

 

아내 홀로 오는 길 어두울까 봐

등불 하나 밝혀 걸고

가슴에 촛불 하나 켜 놓았습니다.

     -「무현금無絃琴 -치매행致梅行 50」

 

 

  시인은 자서에서 “치매는 치매癡?가 아니라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 매화에 이르는 길이다. 무념무상의 세계,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아이가 되는 병이 치매다.”라는 신념을 언표 했습니다. 치매는 사전적인 의미로는 “대뇌 신경 세포의 손상 따위로 말미암아 지능, 의지, 기억 따위가 지속적ㆍ본질적으로 상실되는 병. 주로 노인에게 나타난다”라고 명시되어 있네요. 한자를 풀어보아도 치매癡?는 어리석다는 내용을 내포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치매癡?를 치매致梅로 치환했습니다. 시가 만약 사유 체계를 다른 사유로, 관념을 다른 관념으로 대체하는 것이라면 치매癡?를 치매致梅로 대체하는 것은 시인으로는 선택의 여지없이 마땅한 해석이 될 법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지 않은가요, 매화에 이르는 길이라니! 시인은 봄이 되면 국립4?19민주묘지에 만개하는 청매靑梅를 구경하도록 벗들을 기꺼이 청하시곤 합니다. 말없이 바람길을 따라 걷는 시인의 뒷모습은 참, 하염없기도 해서요. ‘무현금無絃琴’에서도 시인의 상념은 여전히 하염없습니다. 오동이 속을 비워야 바람은 그제야 무현금을 타기 시작한다는 발화.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이고, 들리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시의 세계란 바로 저런 것이 아닐까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오는 극락의 순간, 그런 시! 시인은 지금 아내가 무현금의 소리가 들리기를 간청합니다. 아픈 아내를 위해 “갈비뼈를 현금 삼아 한 곡조 뜯”어서 아내를 위로하고 싶습니다. 필자도 시인의 위로가 아내에게 닿아서 “봄바람 향기”와 “향기로운 꽃으로” 들려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잔인해서 “아내는 홀로” 어딘가로 떠나가는 중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은 지금 “가슴에 촛불 하나”켜 들고 섰습니다. 시인은 아내의 가는, 혹은 오는 길이 혼자서 어두울까 오늘도 노심초사합니다.

 

 

1

비 내리는 날

빗소리가 흔들린다고

 

 

고독하지 않다고

외롭지 않다고

 

 

오늘도

해탈解脫하지 말라고

 

 

2

네 발자국

물이 고이듯

 

 

아득한 날

가만히 되뇌는 맹목盲目이란 말

 

 

종일토록 읽어도

오독誤讀일 뿐인 나라

 

 

바람으로 가고

물로나 스미는

 

 

그곳

아내가 홀로 가고 있는.

     -「은향銀鄕을 찾아서 - 치매행致梅行 104」

 

 

  사람이 육신을 벗고 가는 길은 어떤 묘향을 맛볼 수 있는 걸까. 궁금합니다. 그것보다 사람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경계는 또한 어디까지일까, 비루하고도 잔인하지만 그것들에 골똘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해탈하지 않는” 그때까지라고 시인은 답하는 듯합니다. 살고 지지고 볶으면서 울고 웃는 그때까지가 사람이 사람다운 육신의 향연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런지 시인은 당당하게 “해탈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따지고 보면 해탈은 신의 경지. 그것은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로서는 알 수도, 알고 싶지도 않은 경지일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곳에 도달했다면 무엇 때문에 시를 쓰고, 음악을 듣고, 기어이 길을 걷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한 인생들입니다. 그때부터 우리에게는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가는 꿈이라는 것이 생겨났던 겁니다. 하여, 시인은 비 오시는 오늘, 오감을 풀어헤치고 “고독하지 않다고/ 외롭지 않다고” 흔들리고, 또 흔들립니다. 절대로 해탈을 꿈꾸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쩌랴, 시인의 곁에는 이미 해탈한 발자국 하나가 선명합니다. 해탈한 존재와 해탈하지 못한 존재는 꿈에서라도 공존은 불가능한 법인데, 그래서 시인은 시인의 아내가 하는 행동과 말을 모두 “오독”해야 하는 곤고함에 처했습니다. 그것은 아내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미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그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인생들 가운데서는 시인의 아내 또한 “홀로 가고 있는” 먼 길의 수행자이니까요. 그래서 제목 또한 ‘은향을 따라서’ 아니라 ‘은향을 찾아서’가 된 것이리라 짐작해 봅니다.

 

 

도봉도서관 우이시낭송회를 마친

동짓달 열사흘 저녁

우이동 솔밭공원

앞가슴 풀어헤친 푸른 바다

어스레한 서녘으로 가고 있는 한 여자

쑥 내밀고 있는 쓸쓸한 배

무엇을 싣고 있는지

하늘이 기우뚱

중심을 잡고 있는 우주가 흔들

곧 적막에 닿을 시간

어쩌자고 어쩌자고

찬 길을 혼자서 가고 있는

얼굴이 기운 한 여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자.

     -「동짓달 열사흘 날 - 치매행致梅行 103」

 

 

  동짓달은 음력으로 열한 번째 달이기도 합니다. 열한 번이란 시적으로 해석하면 완전수. 일 년 열두 달을 기점으로 십일월은 완성입니다. 왜냐하면 십일월은 마지막을 코앞에 둔 가장 아름답지만, 이별을 예감해야 하는 슬픔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달도 차면 곧 기울겠지만, 그러나 완성에 닿을 수 있는 가장 힘이 센 숫자. 시인은 오늘, 동짓달에 유독 주목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시인이 이끌고 있는 우이시낭송회는 벌써 328회를 돌파했습니다. 햇수로 따져보면 28년을 훌쩍 넘어선 성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한 단체를 말없이 묵묵하게 이끌어 오신 분이라면 생의 근력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긍정할 수 있는 튼튼한 나무일 터. 그런 시인에게 그만 믿을 수 없는 적막이 찾아온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한/ 여자”. 그 여자 “찬 길을 혼자서 가고 있는/ 얼굴이 기운 한 여자”, 그 여자 지금 “어스레한 서녘으로” 가고 있는 중일까요. 그러니까 시인의 아내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저조차도 모르는 길을 헤매는 중인가 봅니다. 치매! 물론 치매는 치매가 아니라, 매화에 이르는 ‘치매致梅’. 그 향기 너무나 은은해서 사람의 생으로는 눈치 챌 수도 없는 ‘은향銀鄕’,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겠지만, 그 길은 “우주가 흔들” 흔들거리고 “하늘이 기우뚱” 기울어야 갈 수 있는 멀고도 먼 길. 어쩌면 살아서는 함께 갈 수 없는 죽음처럼 지독한 이별이겠습니다. 어쩌랴, 우이시낭송회는 그래도 계속 되어야 할 것이고. 시인은 그 뜻이야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기어코 건너가야 하는 “푸른 바다” 깊은 속을 심장으로나 건너가는 운명을 태어난 것이겠지요.

 

 

나는 평생 비운다면서도

비우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버린다 버린다 하면서도

버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내려놓자 하면서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버린다 비운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내려놓는다는 말도 없이

아내는 다 버리고 비웠습니다

다 내려놓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평안합니다

천하태평입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걱정이 없습니다

집 걱정 자식 걱정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는 아내는

천하제일의 부자입니다.

     -「아내는 부자 - 치매행致梅行 78」

 

 

  세간에서 ‘치매癡?’를 역설적으로 ‘황홀병’이라고도 합니다. 치매가 황홀이라니, 그것은 어쩌면 가장 시적이고, 한 편으로는 너무나 가혹한 발화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치매’의 결을 잘 더듬어 들어가 보면 그것은 분명 ‘황홀’과 통하는 구석이 있기도 합니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자신의 주체를 잃었으니 ‘치욕’이고 ‘민망’일 수 있겠지만, 그러나 주체라는 상징의 허울을 벗고 나면 사실은 실재적인 자유일 겁니다.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고, 바라는 것이 없으니 그 무엇도 두렵지 않고, 그렇게 되면 완전한 자유에 이르게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처럼 자명한 수순이 아닐까요. 은유를 한껏 사용했던 위의 시들과는 달리 ‘아내는 부자’는 사실적인 진술로만 이루어진 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 시를 시답게 하는 것인가‘의 고민이겠지요. 시란 세상의 무엇을 향해 다가가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이 아닐까요. 그렇게 본다면 여기서 시를 시가 되게 하는 요소를 까딱 잘못하면 “비운다” “내려놓다” “버린다”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더 꼼꼼하게 따져 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부자”에서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부자와 시인이 일컫는 부자는 사뭇 다르니까요. 거기에 달려 나오는 단어들이 “천하태평” “아무것도 없는” “거칠 것 없는” 즉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까지 가게 되는 겁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시인의 아내는 부자가 되었다고 시인은 발화합니다. 뭘까, 다 비우고 버리고 거칠 것이 없는 상태란? 그것은 세상의 잣대로 재어 보면 물신이 사라진 세상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시의 나라에서는 물신을 지우는 것이 목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와 시가 아닌 것이 갈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시인이 주목하는 시의 탄생은 아내의 자유, 즉 세상의 잣대로부터 탈속해 버린 아내의 ‘치매행致梅行’에 관하여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파 봤니, 아파 봤어

아내는 아픈 것도 모르고

순진한 얼굴 가득

무구한 웃음을 피우는데

그걸 보고 시 쓴답시고

끼적대고

끼적거리다니

죽일 놈

제가 시 쓴다고

시인이라고

시가 약이냐

시가 아픈 것 낫게 해 주냐

병 고쳐 주냐

죽일 놈!

     -「시인 - 치매행致梅行 120」

 

 

  가끔씩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시를 다시 쓸 것이냐? 대답은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하고 이어지는 질문은 언제나 한가지일 겁니다. 시인을 배우자로 선택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아니다’입니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남들이 느끼지 않는 것들을 저절로 느끼는 ‘영매’하고도 닮은 족속들이니까요. 바람이 천하고 귀하고의 차이를 가리지 않는 것처럼, 저 가고 싶은 곳으로만 기울어지는 이상한 존재들. 그래서 시인은 어쩌면 세상의 규범하고는 일정 거리를 둔 사람과 자연의 ‘중간 계’ 쯤의 존재들일 지도 모릅니다. 그런 시인들이 사람의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모두 잘 수행하기란 바람에게 옷을 입히려고 애쓰는 부질없음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그런 남편을 시인으로 둔 아내는 평생 외로웠을 겁니다. 시인 중에서도 가면 하나 뒤집어 쓸 줄도 모르는 ‘꼴통’ 중에서도 ‘꼴통’시인을 남편으로 둔 시인의 아내는 저 많은 시간 동안 얼마나 오래도록 남편을 기다려야 했을까요. 저기, 시인은 이 순간에도 아픈 아내를 향해 연필을 들고 원고지를 메우네요. 사람의 살 냄새보다는 연필과 종이의 향에 취해 버린 사람의 속사정을 아무나 눈치 챌 수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시인은 작두 위에서 춤을 추다 말고도 가끔씩 제정신으로 돌아와서는 “죽일 놈!” 자신을 죽일 놈,이라 고백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과 시인이 아닌 사람들로 세상은 나뉘는 겁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시인은 지금 제가 뭔 짓을 하고 있는지, 자기 자신과의 대결에 치열한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이 시간에도 시인은, 적어도 진짜 시인은 인간의 본연 앞에서 무릎을 꺾을 줄도 압니다. 모두가 내 탓이라고, “아내가 아픈 것을” 나는 모른다고 아프게 고백하는 시인. 시인은 결국 겨울의 언 땅덩어리를 견뎌야 봄에 꽃이 온다는 사실을 저절로 눈치 챈, 천형의 존재일 지도 모릅니다.

 

 

아내는 어쩌다 나일 꺼꾸로 먹어

정신줄을 놓아 버렸습니다

대신 잡아 줄 수도 없어 답답한 마음

얼마큼 가야 길이 보일지

하루라도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면

하고 싶은 말 한마디 있습니다

'여보, 사랑해!' 바로 이 말 한마디

나는 그조차 인색한 사내였습니다

젊어서 받지 못한 사랑

이제 받고 싶어 아내는 조르는 것인가

쓰잘머리 없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오늘도 내 마음은 열대야입니다

잠도 자지 못하고 땀만 줄줄 흘립니다

이러다 잠을 깨면 하루가 천년입니다

삼시 세 끼는 왜 그리 빨리 돌아오는지

아침 점심 저녁 준비로 분주한 날마다

외상말코지도 아닌데 마음만 팍팍합니다.

     -「여보, 사랑해! - 치매행致梅行 129」

 

 

  그러나, 시인도 결국 이생을 살다가는 사람입니다. 혹시, 시인은 아내가 나와 동어반복인 줄 알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요? 그것은 다시 뒤집어보면 믿음, 사람을 얼마나 믿으면 아내가 자기 자신이라 굳세게 믿을 수 있었던 걸까요. 이 또한 물론 시인이라 가능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아이가 되어 버린 시인의 아내처럼 시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내의 아이로 살았습니다. 낙타처럼 비굴하지도, 사자처럼 사납지만도, 그렇게 시인은 아이처럼 유순하게 아내를 자기라고 믿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시인은 평생 아내를 살갑게 대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바람에게, 꽃에게, 하늘에게, 공기에게, 날마다 ‘사랑해’를 소리 내어 확인할까요. 그냥 거기 있어서 내가 되는 존재. 그렇게 시인은 아내 곁에서 응석을 부리고 살았을 지도 모르는 일. 그런데 덜컥, 아내가 이상해졌다면 당신이라면 어찌할 것인가요? 시인은 그제야 자신을 돌아다봅니다. “여보, 사랑해! 바로 이 말 한마디/ 나는 그조차도 인색한 사내”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제 시인은 아내의 간절했던 마음을 압니다. 그것은 남편에게 “젊어서 받지 못한” 사랑이었음을. 평생 남편의 뒷수발로 아내의 일상은 참으로 허망했으리라는 것을요, 시인은 아내가 통째로 지워져버린 지금에서야 사실을 통감합니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은 더욱 더 아프기만 합니다. 너무나 빨리 돌아오는 삼시 세 끼! 먹거리 준비로 분주한 날마다를 통과하면서, 일상을 함께하지 못하는 아내에게 늦었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여보, 사랑해!” 시인은 그 말 한마디가 아내에게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여기까지 선생님의『치매행致梅行』150여 편을 읽었습니다. 읽다가는 가슴이 아파서 뒷산을 뛰어 오르기도 하고, 더러는 여러 번 시편들을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치매라는 괴물의 기습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사모님은 어느 심연의 허방을 건너가고 계실까요.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엉뚱하게도 프랑스의 건축 양식인 ‘빠사쥬’를 떠올렸습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유리지붕을 올려서 밖의 풍경이나 날씨는 예감할 수 있지만, 직접 닿지는 못하게 만든 건물 양식. 그 유리 감옥 속에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더러는 유쾌합니다. 지나가는 구름과 하늘과 때때로 찾아오는 이별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느끼지만 함께 동참할 수는 없게 만든 유리 돔 속의 산책. 그런 말초의 감각들이 제게는 그저 낭만적으로만 보이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치매에 걸린, 그리고 그 곁에서 함께 감내해야 하는 이 모든 시간은 어쩌면 빠사쥬처럼 비현실적이기도 합니다. 눈으로는 환하지만 소리가 통하지 않아서 결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는 이쪽과 저쪽의 동거. 그래도 땟거리가 되면 국 하나 찬 몇 가지를 앞에 두고 함께 수저를 부딪칠 수 있는 지금이 또 천국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여보, 사랑해!”, 평생 입 밖으로 소리 내지 못했던 홍해리 선생님식의 사랑법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들었던 이야기를 받아 적으며 글을 마감하려 합니다. 치매는 아이처럼 순진무구해서 자신을 사랑해 주는지, 아닌지를 본능적으로 안다고 합니다. 하여, 선생님 앞에서는 식사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더러는 와락 끌어안기도 하는 사모님의 지금은 오직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 하나로 연명 중이시네요. 그렇게 사모님의 그 마음을 또 너무 잘 알아서 저버리지 못하시는 선생님의 마음을 우리는 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힘 내시길요! 이무원 선생님의 일갈처럼 ‘소신공양하듯’이라는 사모님의 부름에 왠지 시인의 생이 뭉클, 잡혀서 뒷모습이 쓸쓸해지는 가을날입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시길요. *

 

 

 

출처 : 洪海里 시인의 집 <세란헌洗蘭軒>
글쓴이 : 洪 海 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