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가을엔 시인이 되자 / 김형태 /금강일보 2017. 09. 18,

洪 海 里 2017. 9. 20. 16:41

<김형태의 노변한담>

금강일보 2017. 09. 18,


가을엔 시인이 되자


김형태(한국교육자선교회 이사장)



  날씨가 삼삼해지고 이슬이 내리며 하늘은 드높이 파랗고 연약한 듯 강인한 코스모스 꽃잎들이 하늘거리며 고추잠자리들이 높게 나니 그 누구든 하늘을 보고 산을 보고 들판을 보게 된다. 머리가 맑아지고 사색하기에 알맞은 날씨가 되면 우울한 사람일지라도 서재에서 시집을 꺼내게 된다. 사람에게는 지성만 있는 게 아니라 감성, 심성, 영성도 있기 때문에 머리로 따지던 사람도 가슴으로 느끼는 것들을 챙기게 된다. 그래서 아마추어 시인이 되는 것이다.

  ①“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대중가요에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가사 하나에도 곧잘 귀를 모은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깊은 밤 등하에서 주소록을 펼쳐 들고 친구들의 눈매를 그 음성을 기억해낸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한낮에는 아무리 의젓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가 기운 다음에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 하나에도 귀뚜라미 우는 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여는 연약한 존재임을 새삼스레 알아차린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두고 싶다/이 다음 세상 어느 길목에선가 우연히 서로 마주칠 때 오- 아무개 아닌가 하고, 정답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익혀두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법정 스님/「가을은」)

  ②“가을에 오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의 등불 하나 켜두고 싶습니다/ 가을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진실한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가을엔, 그리움이라 이름 하는 것들을/ 깊은 가슴으로 섬기고 또 섬기며 거룩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싶습니다// 오고 가는 인연의 옷깃이 쓸쓸한 바람으로 불어와/ 가을이 올 때마다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세월// 꽃으로 만나 낙엽으로 헤어지는/ 이 가을을 걷노라면, 경건한 그 빛깔로 나도 물들고 싶습니다// 그대여! 잘 익으면 이렇듯 아름다운 것이 어디 가을뿐이겠습니까/ 그대와 나의 사랑이 그러하고, 그대와 나의 삶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이채/「가을처럼 아름답고 싶습니다」)

  ③“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 한 말/못다 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 잎 두 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문정희/「가을편지」)


   ④“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洪海里/「가을 들녘에 서서」)

  봄과 여름이 상승곡선을 그었다면 가을과 겨울은 하강곡선을 긋는다. 시계바늘도 0시에서 6시까지는 오른쪽으로 내려가고(우파) 6시에서 12시까지는 왼쪽으로 올라간다(좌파) 내려가고 올라가는 것(좌회전과 우회전)의 교대와 반복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좌파-우파-허파”라는 시어를 만들었다. 새의 두 날개. 철로의 두 레일. 인간의 남-여 왕래(가고 오는 것)가 있기에 인간의 삶과 역사의 진행이 계속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