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2018)

아내의 지우개 - 치매행致梅行 · 322

洪 海 里 2018. 4. 23. 04:19

아내의 지우개 

- 치매행致梅行 · 322


洪 海 里




아내의 지우개는 성능이 탁월합니다

어느새 세상도 다 지워 버리고

세월도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어느 틈에 말도 말끔히 지워 버리고

생각도 이미 다 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러고 나서

침묵의 집이 되어

멀뚱하니 누워 노는 애기부처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지우는 일도 모두 잊었습니다

그걸 아는 나는 실큼한 생각에 젖어 있다

슬그머니 돌아서고 맙니다

잃어버린 그림자 같은 사랑과

잊어버린 격정의 세월을 지나

하롱하롱 져버린 꽃잎이 되어

아내는 혼자 아파서,

아픈 줄도 모르고 누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