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무등, 무등 좋은 날 " / 道隱 정진희 시인

洪 海 里 2018. 11. 10. 03:35

      

    
무등, 무등 좋은 날
 
    道隱 정진희(시인)
 
 
1) 시집을 열며
 
아내가 정리한 깨끗한 집안, 때맞춰 옷 갈아입고 반듯해진 내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편안히 잠을 자는 동안에
 
우이동 세란헌 홍해리 시인의 집에는 치매로 말을 잃은 아내의 간병으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내며 오늘도 잠들지 못하는 노시인이
있다는 생각을 하다 보면
 
나는 이렇게 편안하게 살아도 괜찮은가?
시인은 왜 늘그막에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가?
시인의 수고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에 이른다.
 
세상에는 누군가의 고통과 희생으로 다른 사람이 생활에 편안함을
누리며 사는 게 이 세상의 이치다. 그렇다면 시인의 고통은 누군가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는, 의미가 큰 희생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시인의 자식들이든, 수많은 치매환자들의 가족이든 아니면 나같이
지금 편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든, 분명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영향을 끼질
것이기 때문이다.
 
洪海里 시인의 '치매행致梅行3시집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를 받았습니다.
우선 제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내의 회복을 위한 시인의 희망이요,
긍정적인 바람으로 생각하고 싶지만어쩌면 봄이 오면 눈은 녹는데, 얼어붙은
아내의 마음은 여전할 것이라는 슬픔이 느껴집니다. 그 생각에 이르니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
시집의 독서가 더디게 진행됩니다.
 
2) 치매행 231- 300편 읽기
 
시인은 삶 자체를 수도승처럼 살고 있습니다.
혼자 먹는 만찬은 참으로 간결합니다.
 
삶은 감자 한 알/ 달걀 한 개 / 애호박고추전 한 장/
 막걸리 한 병// 윤오월 초이레/ 우이동 골짜기/
가물다 비 듣는 저녁답/ 홀로 채우는 잔.”(만찬 치매행 237 전문)
 
아내가 아파서 함께하지 못하니 늘 혼밥으로 차라리 쓸쓸하기까지한
저녁 상차림입니다. 먹는 것이 단출하다면 다른 삶도 그러겠지요.
 
아내도 한때는 향기로운 꽃이었고
내 어둔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었다.” (꽃과 별 치매행 240 부분)
 
, , , , 강으로 된/ 한 편의 서정시이더니, // 자식, 연탄, 세금, 건강, 걱정의
/ 장편 통속소설이 되었다.” (아내, 대추꽃 초록빛(1987) 부분) ///
지금은 와불이 되어/ 세상에서 가장 평안합니다. (세월 치매행 244 부분)
 
끝내,/ 꽃이 되어 누웠다./ 말 않는 꽃” (꽃에게 후편 치매행 245 부분 )
 
끝내 아내는 "말 않는 꽃"으로 변해 버렸다. 얼마나 슬플 것인가?
그러나 시인은 슬픔 속에서도 가장 좋은 말만 하자며 현재를 긍정합니다
 
이만한 것만도 다행이야/ 옆을 봐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가장 좋은 말 치매행 248 부분 )
 
결국 우리의 몸은 언젠가는 무너지고 마는 탑이라며……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아내의 몸을 보며 자신을 경계합니다.
 
세월을 버리면서/ 채워가는/ 헛재산,/ 쌓고/ / 쌓아 올려도 /
무너지고 마는 탑” (치매행 249 전문)
 
시인은 늦가을에 막막한 마음을 서정시로 표현합니다.
 
상강 지나 물 마른 옹달샘/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사슴의 눈빛 같은
 / 마음 하나/ 허공에 띄우고/ 홀로 가는 길/ 팍팍하고/ 막막한.”
(늦늦가을 치매행 251 전문 )
 
그리고 아내를 생각하며 단 하루만이라도 양귀비꽃처럼 피어나길
원합니다. “아내여, 단 하루, 하루만이라도/ 양귀비 양귀비꽃처럼
피어나 보렴” (한여름날의 꿈 치매행 258 부분 )  
 
그간에도 주변에서는 시인의 고생을 생각하며 이제 그만 요양시설에
보내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결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요양시설의 비인간적인 면도 그렇겠지만 자신을 돌아보며
 
아내가 와불이 되다니/ 아 내 탓이로다, 내 탓!” (내 탓 치매행 305 부분)
이제껏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빈손으로 떠나보낼 수는 없습니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견뎌내고/ 가는 데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이제 그만 치매행 267 부분
 
라면서 오히려 그분께 미안해 합니다. 참으로 큰 사랑입니다.
 
긴병에 효자 없다고, 아내의 간병으로 8년여를 고생했다면 이제는
정이 떨어질 만도 한데 시인은 아내가 응급실로 떠난 후에
 
아내를 병원에 두고 온 날 밤/ 집의 반이 빈 집이 되었다// 단잠을
자던 집/ 잠도 달아나 버렸다” (늙마의 집 치매행 271)며 허전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아내는 남이 아니고 바로 자신의 몸의 일부였습니다.
 
자신의 몸의 일부인 아내이기에 비록 말 한마디 못하고/ 미소 한번
짓지 않아도/ 곁에만 있어 다오” (저무는 추억 치매행 277)라며 점점
병세가 악화되어 가는 아내를 바라보며 간절한 바람을 기원합니다.
 
시인은 초겨울 풍경에서 아름다운 서정시로 안타까운 바람을
표현합니다. 아내가 다시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아내 곁에서 이제는
수다쟁이가 되겠다며 그간의 목석같았던 무심함을 후회합니다.
 
말없는 나라로부터 소식이 올까/ 혹시나 하지만 온종일 대답도 없고//
바람에 슬리는 낙엽, 낙엽,/ 나겹나겹 낮은 마당귀에서 울고 있다//
내 마음 앞자락까지 엽서처럼 날아와서/ 그리움만 목젖까지 젖어 맴돌고
있지만// 마음만, 마음만 저리고 아픈 날/ 솟대 하나 하늘 높이 푸르게
세우자// 여린 날갯짓으로 당신이 날아온다면/ 나도 비인 가슴으로
기러기 되어// 무작정 당신 곁에 가 앉아 있으리/ 하염없이 지껄이는
지아비 되리.” (초겨울 풍경 치매행 283 전문 )
 
아내에 대한 애틋함은 사과를 깎으면서도 아내 손잡고 과수원 길이라도
걸으련만하며 그 애틋함을 아름다운 시 한 편으로  완성됩니다.
 
햇볕이 내려와 얼마나 핥아 주었으면/ 이리 붉을까// 바람이 와서
얼마나 쓰다듬었으면/ 이리 반짝일까// 보이지 않는 손이 얼마나
주물렀으면/ 이리 둥글까//  이런 날, 스담스담,/ 아내 손잡고 과수원
길이라도 걸으련만” (사과를 깎으며 -치매행290 부분 )
참으로 가슴 시린 정경입니다.
 
3) 치매행 291- 330편 읽기
 
영하 18도의 추운 겨울날 예전 같으면 부부의 소소한 일이 되었을
그런 외출이 이제는 쉽지 않은 바람이 되었고, 지친 시인은 어느 날
환영과 환청으로 외출을 대신합니다.
 
아내의 손을 잡고/ 미끄러운 거리를 걸어다니다/ 포장마차 문을 밀치고
들어갑니다/ 따끈한 어묵과 소주 한 병의 어슬녘/ 아득하고 어둡고/
그윽하고 멉니다.” (환영과 환청 치매행 301 부분 )
 
이렇게 시인은 점점 지쳐갑니다. 간병은 무쇠도 녹일 수밖에 없는 노고인데
8년여의 세월을 이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결코 힘든다는
말 하지 말자/ 식욕 부진/ 체력 저하/ 수면 부족/ 당연한 일 아닌가
(간병 치매행 307 부분)   참으로 무서운 내공입니다.
 
그러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새벽 3시 우이동 세란헌 시인의 서재, 달빛이 비치는 고요한 방안에 정좌한 시인은
깊은 명상에 들어간다. 이 순간은 낮 동안의 간병에 따른 고통도, 세상살이의
번잡함도 잊어버리고 오직 하늘과 소통의 시간이다이 시간을 통하여 시인은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순수하게 된 마음에서 한 편의 시가
태어나는 때이리라!
 
시인이 아내와 잠시라도 나들이를 간 것은
 
지난여름 무덥던 날 오후/ 국립4.19민주묘지/ 연못의 황금잉어를
보았습니다/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을 본 게/ 쓸쓸한 마지막 나들이였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하다못해 집 뒤 둘레길이라도 걸었을 것을/
이제 와 생각하니 한이 됩니다” (마지막 나들이 치매행 317 부분)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시인은 미리 후회될 일을 만들지 말라고
제게 조언해 주는 것 같습니다. 지난 날 내 삶에서 아내에게 보다 자상하지
못하고 무심하게 지낸 날들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글쎄요, 제게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희망이 있다고요? 사람이 이런 큰 고통을 직접 닥쳐보지
않고서는 늘 잊고 사는 게 우리네 인생이니 그냥 또 잊고 살겠지요.
 
만약 시인의 아내가 정신이 제대로 돌아온다면 시인의 지난 8년의 수고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어쩌면 아내는 지금도 지아비의 순애보를 느끼면서 
속으로 눈물 흘리며 감격해 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내는 다 듣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문 여닫는 소리부터/ 인기척까지/
늘 들려주는 유행가와/ ‘잘 잤어, 배고프지!’ 하는 말// 이것으로 아내는
허기를 채우는지 모릅니다// 울지 말자 /슬퍼하지 말자/ 괴로워하지 말자//
아내는 우리를 걱정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깜박깜박!” (눈으로 하는 말- 치매행 326 전문 )
 
그러나 말을 듣지 못하는 지아비는 "뒷모습이 추욱 처지고" 허기진 마음으로
울고 있습니다
.
아내가 아파 눕고 나서야/ 비 오는 날/ 쪼로록, 쪼로록 우는 호반새처럼/
나는 우노니, 허기지게 우노니// 뒷모습이 추욱 처져서/ 수척한 그림자/
질질 끌고 가는 저녁답/ 허기진 내 마음의 문을 닫노니!" (호반새 치매행 329 부분)
 
4) 시집을 접으며
 
새벽에 잠을 깨는/ 적막강산에서/ 남은 날/ 말짱 소용없는 날이 아니 되도록/
깨어 있으라고/ 잠들지 말라고/ 비어 있는 충만 속/ 생각이 일어 피어오르고/
허허 적적/ 적적 막막해도/ 달빛이 귀에 들어오고/ 바람소리 눈으로 드니/
무등,/ 무등 좋은 날!"(무심중간 치매행 330 전문)
 
아내가 치매로 말을 잃고,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노시인에게 고통은
높은 깨달음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묵언 수행 중이던 어느 날
 
달빛이 귀에 들어오고, 바람소리 눈으로 드는 날,” (치매행 330- 무심중간)  
깊은 명상으로 알파파 상태인 "무심중간"의 마음 상태에 있던 시인에게 갑자기
지금, 오늘 이곳이 더할 나위 없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다 ”라는 
깨달음의 환희가 터집니다.
 
이 말씀은  ‘치매행시집을 읽고 있는 내게 시인께서 들려주시는
살아 있는 환희의 법문입니다.
 
어느 날 새벽 3시 바람 좋은 날창가에 밝은 달이 비치는 세란헌洗蘭軒의 작은 방!
8년의 긴 세월을 흔들리지 않고 백운대를 바라보며 묵언 수행하던 노시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흐르며 갑자기 환희의 오도송悟道頌이 터집니다.
 
달빛이 귀에 들어오고/ 바람소리 눈으로 드니/ 무등, 무등 좋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