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수련睡蓮 그늘

洪 海 里 2018. 11. 13. 04:25

     * 운악산 봉선사에서 나영애 시인 촬영. 2012. 6. 9.

 

 

수련睡蓮 그늘

 

洪 海 里

 

 

수련이 물위에 드리우는 그늘이

천 길 물속 섬려한 하늘이라면

칠흑의 아픔까지 금세 환해지겠네

그늘이란 너를 기다리며 깊어지는

내 마음의 거문고 소리 아니겠느냐

그 속에 들어와 수련꽃 무릎베개 하고

푸르게 한잠 자고 싶지 않느냐

남실남실 잔물결에 나울거리는

천마의 발자국들

수련잎에 눈물 하나 고여 있거든

그리움의 사리라 어림치거라

물속 암자에서 피워올리는

푸른 독경의 소리 없는 해인海印

무릎 꿇고 엎드려 귀 기울인다 한들

저 하얀 꽃의 속내를 짐작이나 하겠느냐

시름시름 속울음 시리게 삭아

물에 잠긴 하늘이 마냥 깊구나

물잠자리 한 마리 물탑 쌓고 날아오르거든

네 마음 이랑이랑 빗장 지르고

천마 한 마리 가슴속에 품어 두어라

수련이 드리운 그늘이 깊고 환하다.

            - 시집『독종』(2012, 북인)

 

* 감상 * 

  수련, 수련 그늘, 수련잎을 넘나드는 시인의 연주는 물탑을 세우는 일처럼 박력이 있으면서도 그 물탑이 잔상만 남기고 금방 사라질 것 같은 애잔한 느낌도 준다.
  수련 그늘은 수련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으니 그늘은 일차적으로 존재의 배경이 되고 존재를 환기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후 존재와 상관없이 생명력을 얻은 그늘은 하늘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깊어진다. 그 깊이는 투명도 하여 “섬려한 하늘”을 그대로 반영하기에 “칠흑의 아픔까지 금세 환해지”는 느낌이다. 그 그늘에 무릎베개하고 한잠 자도 좋을 것을, “그리움의 사리” 같은 눈물 하나 보고 만다.
  그늘이 커질수록 그리움도 자라고, 그 그리움은 끝내 결실하지 못하는 건가. 연못 밖의 화자에게 참하게 앉은 수련은 더없이 이끌리는 존재일 테지만 품고 싶은 것은 언제나 한 발 멀리 있다. 수련은 쉽게 가 닿을 수 없는 연인처럼, 아무리 애써도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 진리처럼 저만큼 있고 그늘만 길게 드리는 것이리라.
  그늘은 존재를 반영한다. 존재의 높이가 그늘의 깊이로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참된 존재를 지향하는 건 구도와 같아서 한 걸음씩 그늘로 들어가서 마음의 이랑에 빗장 지르는 염결한 자세도 요구되지만 동시에 천마 한 마리 품는 비상한 꿈도 간직하고 있다. 수련잎 모양새에서 천마의 발자국을 연상하고, 천마의 발자국에서 해인海印을 연결하는 자유자재한 상상력은 이 시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대목이다.
  “수련이 드리운 그늘이 깊고 환하다”지만 시인이 드리운 그늘도 그 못지않게 깊어서 자꾸 아득해진다.

   - 이 동 훈(시인)

 

   * 홍해리 시인의「수련睡蓮 그늘」을 읽으면 시인의 맑고 투명한 영혼이 그대로 전해진다.

1969년 시집『투망도投網圖』로 등단 이후 현재까지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를 이끌어오며 북한산 자연과 더불어 살며 시로써 맑고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고자 한평생을 시에 헌신한 시인이다.

  첫 행, ‘수련이 물 위에 드리우는 그늘이/ 천 길 물속 섬려한 하늘이라면’은 바로 詩心의 바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진흙 속에서도 물들지 않고 피어나는 연꽃의 청정함에 매료될 때 홍해리 시인의 시선은 수련이 드리우는 그늘로 향한다.

겉으로 드러난 표상이 아닌 드러나지 않은 내면 세계를 깊숙이 투시한다.

그리하여 그늘의 속성인 ‘어둠’을 걷어내고 천길 물속에서 ‘섬려한 하늘’을 건져낸다.

하늘은 관념적으로 최상과 최선, 절대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따라서 ‘칠흑의 아픔까지 금세 환’하게 만들어주는 치유의 손길이다.

시인은 어둠을 걷어낸 수련 그늘에 ‘그늘이란 너를 기다리며 깊어지는/ 내 마음의 거문고 소리’ 라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이제, 그늘은 시적 화자의 내밀한 공간으로 더욱 깊어져 독자들은 시인의 마음의 소리인 거문고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시인은 그 내밀한 공간에서 ‘푸르게 한잠 자고 싶지 않느냐’ 하면서 읽는 이를 詩 안쪽으로 바짝 끌어당긴다.

그리움의 대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세속의 욕망을 ‘천마天馬의 발자국들’이나 ‘그리움의 사리’ 등의 표현으로 맑고 깨끗하게 승화시킨다.

시가 이쯤에서 끝맺음을 했어도 독자에게는 아름다운 서정시 한 편으로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조용한 반전反轉으로 시의 전환부를 마련하여 감동을 배가시킨다.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무릎 꿇고 엎드려 귀 기울인다 한들’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시인은 ‘저 하얀 꽃의 속내를 짐작이나 하겠느냐’ 라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리운 이의 속내 일 수도, 꽃을 피우고 지게 하는 우주의 섭리 일 수도 있다.

환한 줄만 알았던 수련 그늘 속이 ‘시름시름 속울음 시리게 삭아’ 마냥 깊어진 것이다.

게다가 빗장을 지르고 천마를 품어 두라고 한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슬픔을 간직했기에 ‘수련이 드리운 그늘이 깊고 환하다’라는 시인의 말이 더욱 긴 여운을 남긴다.

    - 주경림(시인)

웅숭깊은 기다림의 사유思惟, 그늘의 미학

 '그늘'이란 사전적으로는 불투명한 물체에 가려 빛이 닿지 않는 상태이다.

사물의 물리적 현상을 넘어서 그늘은 삶과 예술에 있어서 둘 다 똑같이 적

용되는 미학적, 윤리적 패러다임이다. 그늘은 한국의 예술, 한국의 미

서 세계의 예술에 결코 뒤지지 않는 우월적 가치를 보여 주고 있다. 문학

적 관점에서도 그늘은 그 자리가 광역적이다. 시야를 시적 관점으로 좁혀보

면 '그늘'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홍해리 시인의 시「수련 그늘」을 통해

'그늘의 미학'의 일면을 더듬어 본다.

 화자는 바람이 연못가에서 수련을 바라보고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연녹색

수련잎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련이 물 위에 드리우는 그늘'의 이면을

보고 있다. 대유법代喩法을 통해 수련 잎에 가린 "한 뼘의 둥근 그늘'을

보는 화자의 눈은 웅숭깊다. 한 뼘 둥근 수련 그늘 밑의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수직의 깊음에서 "천 길 물속 섬려한 하늘"을 찾아내는 눈이

놀랍다. 수련 그늘의 깊이가 '천 길'이라는 것은 '천 명의 사람 키'만큼의 깊

이가 아니라 수련의 그늘에서 수직으로 지구를 관통하여 반대편 하늘 공

간 너머 무한한 길이를 상징하고 있다. 화자는 무슨 연유로 수련 그늘에서

무한의 깊이를 생각한 것인가?

 수련 그늘에서 "천 길 물속 섬려한 하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시인

자신이자 화자가 "칠흑의 아픔까지 금세 환해"지기를 희구하는 '기다림의

숙명적 존재'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한 학자는 「거문고와 가야금의 배

음구조에 따른 색청 연구」논문에서 "가야금은 노랑에 가까워서 밝고, 거

문고는 보라에 가까워 어둡다"고 기술하였다. "그늘이 너를 기다리며 깊

어지는/ 내 마음의 거문고 소리 아니겠느냐"는 표현에서 '거문고 소리'를

차입하여 '기다림'으로 치환된 '그늘'의 기간과 빛깔을 감지하게 된다. 그러나

숙명적 기다림의 깊고 긴 그늘의 시간이 결코 지쳐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오히려 그늘 깊은 곳까지 맑게 들여다보이는 것은 "그 속에 들어

와 수련꽃 무릎베개하고/ 푸르게 한잠 자고 싶지 않느냐"고 독백하며 초대

하는 행간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자의 기다림은 아픔으로 모면하려 함이 아니

라 오히려 기다림 속으로 뛰어들어 아픔을 일상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보증된 기다림은 마음을 살찌게 한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눈물샘이 열

리곤 한다. 자나 깨나 계속되는 기다림이기에, 그늘의 시간을 "수련꽃 무

릎베개하고 푸르게 한잠" 눈을 붙일 때에도 꿈을 꾸는 듯, 연못에 떠 있는

수련잎들은 "남실남실 잔물결에 나울거리는/ 천마天馬의 발자국들"로 여

기며 꿈에라도 천마를 타고 오는 '너'라는 존재가 오기를 고대한다.

 우리가 희구하는 것들을 향한 기다림은 많은 아픔을 수반하는 '그늘'이

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이라는 존재를 기다리며 깊어지는 일엔

눈물 보 터트리듯 서러워해선 안 될 일이다. "수련 잎에 눈물 하나"가 "그리

움의 사리"처럼 구르듯 사무치게 참아내고, "물속 암자에서 피워 올리는/

푸른 독경의 소리 없는 해인海印을/ 무릎 꿇고 엎드려 귀 기울"이듯, 경건

하고 담담하게 희구해야 한다. 수면 위로 방긋 웃는 수련 한 송이 "하얀 꽃

의 속내"조차 짐작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이기에, 수련 그늘 아래 "속울음

시리게 삭아 물에 잠긴 하늘"처럼 의연하게 "천마 한 마리 가슴속에 품어

두"고 당신이 오기를 기다려 볼 일이다.

- 김필영(시인)

(『그대 가슴에 흐르는 시』<한국 현대시 100년의 時間, 96편 감상평론>, 밥북, 2018)

 

  * 수련의 계절이 또 다가왔다. '수련'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화가 클로드 모네.

프랑스 인상파의 거장인 그는 생애 마지막을 파리의 외곽 지베르니에서 보냈다.

일본식 연못을 지어놓고 명상과 산책을 하며 20년을 넘게 집요하게 수련 연못만을

고집해서 그렸다. 19세기 근대 미술에서 20세기의 현대 미술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클로드 모네를 주축으로 한 프랑스 인상주의는 미술사조 역사상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야외에서 빛의 순간적인 흐름만을 포착하여 작업을 했던

그를 나는 "빛의 마술사"라 부르고 싶다.

  모네의 수련 연작을 감상하면서 떠오르는 한국의 시인 한 분이 있다. 언어를

자유자제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모네가 빛의 마술사라면 나는 그를 "언어의 마술사"라고 칭하고 싶다.

그의 시는 사람의 마음을 울렸다가 웃겼다가 또한 설레게 만드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다. 북한산 아래 우이동에 자리잡고 사신 지 40년이 넘었다는

홍해리 시인. 그를 통해 난 오늘 어딘지 모르게 인상파의 거장 모네를 본다. 
그의 아름다운 명작 시「수련 그늘」을 6년 전에 다녀왔던 지베르니의 모네의

집 뜰과 수련 연못의 사진과 함께 올린다. 
차 한잔의 여유를 가지고 모네의 뜰도, 홍해리 시인의 수련 그늘도, 함께 감상해 보시길….

- 공은화(화가)

*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못 위의 다리’. 1899년.

 

**********************

 

睡蓮阴影 / 金金龍 詩人 翻譯

 

睡莲在水中投下的阴影

是千丈深水中细腻的天空

漆黑的苦痛也立即明亮

阴影岂不是因等待而变得幽怨的

我心中的玄鹤琴声

岂不想来枕着睡莲花入眠

做一个碧蓝的

在波光粼粼,泛着涟漪的水面上

阴影仿佛是天马的脚印

若睡莲叶子上汪着一颗泪珠

那定是相思的舍利

从水中庵堂里发出的

蓝色经,无声海印1)

即使屈膝伏地侧耳倾听

又岂能揣摩这白色花朵的内心

缠绵不断心哭泣凄凉之极  

水中的天空如此之深    

水蜻蜓筑水塔而飞

你心田插上门闩

胸怀着一匹天马吧

睡莲投下的阴影幽深明亮

            - 번역 : 김금용 (시인)

 

 

* 노민석 박사 촬영.
* 박구미 시인 촬영(20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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